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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일기 : 류미례편 ③]행복한 엄마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 ||||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한다. 나는 특히 더 그렇다. 그리고 드디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역운동이 활발한 관악구. 어느 지역모임의 일일주점에 갔다가 씩씩이 어린이집 이모(씩씩이 어린이집은 ‘교사’ 대신 ‘이모’라는 호칭을 쓴다)를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내 고민을 들은 이모가 귀가 반짝 뜨일 만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행복한 엄마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하루라도 더 오래 엄마가 키우면 좋긴 하겠지만 당위 때문에 억지로 그러는 건 좋지 못하다. 행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36개월을 함께 하는 것보다는 함께 행복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18개월부터 하은이를 씩씩이 어린이집에 맡기기 시작했다. 푸른영상의 다른 동료들에게 그 말을 전하니 한 남자선배가 겁을 주었다. “너 말야, 아기랑 떨어질 때 아기가 막 울거든. 그거 장난 아니다. 마음 아파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데 그래서 자꾸 미적거리고 있으면 놀이방 이모가 빨리 가라고 그래.” 울먹울먹하면서도 울지 않는 아이 2003년 1월 6일. 하은이는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서 씩씩이 어린이집의 어린이가 됐다. 하은이가 씩씩한 어린이가 되길 바랐으나 하은이는 아주 독특한 행동을 보였다. 매일 아침 헤어질 때마다 하은이는 울먹울먹 하면서도 울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이 더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모들은 오히려 크게 우는 아이들이 더 쉽게 적응하는데 하은이는 일명 ‘착한아이 콤플렉스’같은 것이 있어서 자기감정을 안으로 누르는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몇 번이고 그만 둘 생각을 했다. 악몽을 꾸는지 밤마다 울다 깨는 하은이를 보면서 도대체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짓을 하는 건가 한탄하기도 했다. 보통 한 달이면 적응이 끝난다는데 하은이는 6개월을 넘어서도 힘들어했다. 급기야는 매일 얼굴에 손톱자국이나 멍을 달고 들어와서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은이와 같은 반의 한 아이가 당시 집안에 불화가 많아 그 스트레스를 어린이집에 와서 푼다고 했다. 도망가거나 맞서 싸우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하은이는 가만히 앉아서 고스란히 당한다고 했다. 그 아이의 집안 문제가 해결되는 동안만이라도 하은이를 집에 쉬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씩씩이 이모와 상담을 하던 날, 나는 또 한 번 내 인생의 지표가 될만한 말을 들었다.
“다 같은 우리 아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안될까요? 그 애도 많이 안아주고 많이 다독여주니까 점점 변해가요. 그리고 하은이가 언젠가는 겪어야할 일을 지금 겪고 있다고 생각해주세요. 어렵게 어렵게 적응하고 있는데 지금 쉬는 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잖아요?” 아이 통해 확인한 문제 아이와 함께 풀어 나는 그렇게 하은이와 함께 자라왔다. 문제가 생기면 견디기보다 도망가고 싶어 했던 그 마음들을 하은이를 통해서 확인했고 하은이와 함께 풀어갔다. 나의 세 번째 영화 <엄마…>는 바로 그 시간을 담은 것이었다. 처음 하은이를 낳았을 때엔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지만 갈수록 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다른 집 엄마들은 손주 보는 게 낙이라던데 왜 우리 엄마는 저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은 걸까? 나는 내 문제를 애꿎은 엄마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엄마가 새 인생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엄마는, 엄마라는 존재는 내가 마지막 순간에 기댈 수 있는 존재여야 했다. 밀린 일거리로 허덕이며 1시간만, 아니 10분만 누가 아기를 봐줬으면 하는 간절함에 빠져들 때마다 나는 엄마를 떠올렸고 이내 서운해 했다. 가끔은 맹렬히 미워하기도 하면서 나의 이기심에 괴로워했다. 그렇게 이성과 감정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 문득 하은이를 보았다. 나는 우리 엄마랑 뭐가 다른가? 말로 표현하진 않겠지만 하은이도 나에게 그런 생각을 품을 것이다. 왜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나 키우는 것에만 만족하지 못하고 저렇게 일을 하려고 할까? 왜 우리 엄마는 저렇게 이기적일까……. 엄마이자 평범한 욕망을 가진 한 사람 ‘하은아. 나는 말이다 ‘엄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란다. 난 네 엄마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욕망을 가진 한 ‘사람’이란다.’ 내 카메라는 엄마를 찍고 있었지만 정작 내 마음은 하은이에게 향해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엄마의 새 인생을 지지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대고 싶어 하고 서운해 하는 내 마음을 나는 영화를 통해서 정리하고 싶었다. 내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내 엄마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날, 나는 내 딸에게도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를 만드는 시간은 내게 많은 변화를 주었다. 그동안의 나는 국가보안법이나 환경, 장애를 중심으로 다뤄왔고 아기엄마가 된 후로는 더 이상 연출자로서는 활동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은이를 놀이방에 맡기기는 했지만 오후 여섯시만 되면 사무실을 나서야했고 그렇게 낮의 일을 끝내면 밤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가정을 안식처라고 하는가? 그곳은 또 다른 일터였다. 내가 찍을 인물이나 사건들이 여섯시가 되면 ‘그럼 이만’하고 내일을 기약해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의 어느 지점에서 영화를 만들어야하는 내게 ‘여섯시면 땡!’인 운명은 더 이상 연출자로서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구성을 하거나 나레이션을 쓰는 작가 일을 하면서, 그렇게 국한되어버린 내 자리를 깨달으며 ‘괜찮아. 괜찮아. 연출만이 의미 있는 건 아니야’ 열심히 다독였지만 마음은 한없이 쓸쓸해졌다. 둘째아이 임신…기쁘기보다 당황, 반갑기보다 혼란 그러다 발견한 새로운 길! 어느 순간 나는 나를 보고 있었다. 평범한 나. 아기 엄마인 나. 영화를 만드는 나. 일과 육아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 그리고… 연애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한 우리 엄마와 그것을 바라보는 복잡한 마음의 나! 모녀 3대의 이야기인 <엄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제 더 이상 하은이는 내 일의 반대편에 서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내 카메라와 함께 있어도 되는 내 영화의 등장인물이었다. 하은이를 업고 다니며 촬영을 했고 엄마와 나는 자주 하은이를 매개로 연결되었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우리는 마지막 촬영지인 러시아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내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할 러시아! 그런데 여권과 비자를 만들며 들떠있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찾아왔다. 둘째아이를 임신한 것이다! 자꾸 태몽을 꾼다는 엄마의 걱정(?)을 한 귀로 흘렸는데 남편마저도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는 꿈을 꿨다는 어느 날 아침, 별 생각 없이 임신테스터기를 확인하는 순간, 선명한 두 줄을 발견하며 아득해졌다. “어떡하니?” 함께 있던 사무실 언니의 걱정. 언니는 순간 실수를 한 듯, “앗 미안해. 축하해”라고 얼른 말을 바꿨지만 나 역시 비슷한 상태였다. 기쁘기보다는 당황스럽고 반갑기보다는 혼란스러운 그 마음 한 가운데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놀랄 따름이었다. ◎ 류미례 감독은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98년 '22일간의 고백' 조연출로 다큐작업을 시작했으며 2002년 '친구-나는 행복하다2'로 제27회 한국독립단편영화제 중편우수상을 수상했다. 이어 2003년 서울여성영화제 옥랑상, 2004년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수상했다.하은이와 한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 ||||
게시일 2006-01-25 14:1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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