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우당 이회영과 6형제
피 묻은 솜옷, 한 줌 재
난잎으로 칼을 얻고, 민국의 길, 자유의 길 연
우당 이회영과 건영, 석영, 철영, 시영, 호영 6형제
모진 고문, 굶주림 견디며 대륙 땅 누빈 드넓은 웅혼
조국은 남산 자락에 기념관을 세워 님들을 기리다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태어난 님들, 500년 조선 역사에 6판서 3정승을 무수히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태어난 우당 이회영과 형제들은 조선이 국권을 강탈당해 강토를 잃고 일제의 먹이가 되자 결심하였다. 구국을 위하여 힘을 기르자! 오로지 한마음 한뜻을 세워 전 재산을 다 팔아 40여 식솔들과 함께 서간도 이주를 결행한다. 이 모든 것을 앞장서서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우당 이회영이었다.
1910년 12월 지린에 도착한 님들은 “칼춤 추고 말을 달려 ‘총칼로 빼앗긴 나라를 총칼로 되찾자.’”라는 뜻을 세운다. 이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세운다. 1911년 12월 제1기생 4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1912년에는 ‘합니하’에 새로 부지를 사들여 무관학교로써 격식을 갖춘 교사를 세운다. 그동안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개편하여 번듯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니 조선의열단, 한국독립군, 한국광복군의 뿌리가 되었다.
6형제의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계속된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기까지 3.500여 명의 독립투사를 길러내어 한국 무장 독립운동 사상 양대 대첩인 봉오동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전투(1920년 10월)를 승리로 이끈다. 양 대첩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되었던 것, 우당의 행보는 거센 바람과 검은 풍운에 맞서 겨레와 나라를 구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길에 방략과 실질적인 행동과 현실에 뿌리내린 구체적인 실천 그 자체였다.
나라가 풍운에 휘둘린 1910년 이후의 우당은, 척박한 타국땅에서 독립의 염원을 담아 자신의 고혈을 오로지 짜내 피로 새긴 불굴의 발자취였다. 혁명가 이회영이 새긴 무장 독립투쟁은 망명을 결행한 순간부터 제국주의 왜적에게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는 능동적인 방략에 기인한다. 일제의 강압으로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닫은 후의 활약은 아나키스트 행동 조직을 지속하여 꾸리고 지도하며 노구를 이끌고 항일공동전선 형성을 계속한다.
이에 지하조직망 구축을 위해 비밀리에 영국 배 남창호 밑바닥 4등 선실에 몸을 싣고 상하이를 떠난다. 만주로 가기 위해서였다. 어찌 알았으랴! 아들 규창과 황푸강 와이탄 부두에서 작별을 고하면서 만주로 향하던 길이 우당의 마지막 길이 될 것임을. 우당은 다렌항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뤼순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모진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난다. 유품은 오직 누비솜옷과 모자와 해진 신발 한 켤레가 전부였다. 그의 나이 예순다섯, 1932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요당한 날과 날짜가 같았다. 1932녀 11월 경기도 장단 큰댁으로 한 줌 재로 돌아오시다.
난잎으로 칼을 얻고 민국의 길, 자유의 길 여신 그 자취
피 묻은 솜옷과 모자, 신발 한 켤레, 한 줌 재
부국강병 문화강국 조국의 초석 되셨으니
조국은 여기 우당 이회영과 6형제의 웅혼을 받들어
남산 자락 예장공원에 기념관을 설립하고 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