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서팬질
분류없음 2016/09/01 02:47
뒤늦게 아이돌(?) 팬질하려니 에구구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다. 핑클 같았으면 딱 네 명인데 이거 원 9명, 아니 8명이나 되니 얼굴 구별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음색 구별하는 것들이 죄다 노동이다. 한 명의 원년 멤버께서 진작에 빠져주셔서 그나마 9명이 8명으로 줄어든 것이 다행(?)이라면... 시카의 팬들께는 죄송. 이화여대 총장퇴진을 위해 농성을 벌이던 이화여대 학생들이 "다시 만난 세계"를 불러주셨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수퍼주니어의 노래랄지, 아이오아이의 노래랄지 암튼 열 명 이상 멤버들의 노래를 불렀다면 진작에 미처부렀을 것이야.
이십 년 전에 네 명밖에 안되는 핑클을 따라잡는 것도 벅찼는데 8명을, 게다가 (꽃개 혼자 잃어버린) 그 양반들의 십 년을 따라잡으려니 아찔하지만 그래도 꽃개가 누군가. 매년 평균 오십 명이 넘는 엠비씨청룡-엘지트윈스 야구단을 삼십 년이 넘도록 척척 따라잡지 않았던가! 어차피 이 양반들 팬 하기로 다짐한 뒤로 이 양반들 환갑 때까지 팬질하기로 했으니 아직 삼십 년이나 더 남았다. 쉬엄쉬엄 천천히 한명 한명 가보자. 가다보면 "소녀 신세"를 면하는 멤버도 나올 것이고 제시카 씨처럼 다른 길을 찾아 떠나는 멤버도 나오면 수고를 덜 수도 있겠지. 그런데 막상 그런 생각을 하니 섭섭하구나. 싴 팬들 마음이 이런 거였어. 꺽꺽꺽. 정확히 이명박근혜 십 년을 오롯이 이들을 모르고 지낸 나의 "잃어버린 십 년" 동안 이 양반들이 한 일은 엄청나다. 정규앨범 다섯 장을 비롯해 중간중간 미니앨범과 싱글을 제법 냈고 "태티서" 라는 유닛 활동에다가 태연 씨, 티파니 씨는 솔로 데뷔도 했다. 최근엔 유리 씨와 서현 씨가 또 유닛 비슷무레한 걸 시작했고 나머지 멤버들도 드라마, 뮤지컬, 예능 등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포스트포디즘적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만능 엔터테이너즈".
말이 길어졌지만 쉬엄쉬엄 한명한명 시작하자는 결심대로 귀에 들리는대로 시작하기로 했다. (본능에 충실하자규). 아무리 막귀라도 귀가 두 개나 있어서인지 태연 씨가 노래를 너무나 겁나게 아주아주 잘한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버렸다. 아마 처음에 이 양반들 노래를 진지하게 들으면서 패티김-김추자 삘을 받았던 건 태연 씨의 탈렌트 탓이 크지 않나 싶다. 그런데 이 양반이 작년에 솔로 데뷔를 하면서부터 기존의 소녀시대스러운 노래풍과는 아예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계시다. 그도 그럴 것이 스물 여덟이나 되어서, 연습생 시절까지 합해 십오 년 이상 전문적으로 노래를 불렀으니 어리다고 놀리지 말라등가 뚜뚜뚜뚜르르 키싱 유 베이베라등가 오오오오빠를 좋아해 따위로 노래를 계속 부른다면 얼마나 식상하겠는가 말이다. "I", "UR", "Why" 모두 좋다.
꽃개는 개인적으로 Dean이란 사내가 피처링한 "Starlight" 가 좋고, 그리고 "Rain" 을 아주 좋아한다. 이 가운데 "Starlight" 는 새벽에 들을 때, 볕이 있는 낮에 들을 때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러니까 해가 지고 난 뒤 볕이 없는 늦은 밤에 들을 때엔 퇴근 뒤 술자리가 떠오르고 해가 창창한 낮에 들을 땐 낮술을 하는 기분이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 예전에 서울에 있을 때 퇴근 뒤 혼자 바에 가서 하이네켄을 마시며 음악을 듣던 때가 있었다. 기분이 울적하고 가라앉는 날에 "Starlight"를 들으면 마치 그 날 그 밤, 그 곳을 향해 계단을 걸어내려가는 것 같다. 기분이 그래도 덤덤하고 마땅히 가라앉을 구석이 없는 그런 날엔 친구들과 혹은 지인들과 대폿집에서 소주나 사케를 마시던 그런 밤들이 떠오른다. 이 노래, "Starlight"는 일조량과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달리 들리고 달리 느끼게 되는 신기한 노래다. 듣는 나로선 기복이 심한 노래. 그래서 그런대로 더 좋다. 반면 "Rain"은 늘 들을 때마다 태연 씨에게 품은 나의 사심이 그대로 오고가는 (응? 오진 않고 그냥 가기만 하겠지) 느낌이다. 추욱 가라앉으면서 차분하다고 해야할까. "UR" 에서는 태연 씨가 발라드를 부를 때 그녀만이 가진 장점이 더욱 완숙하게 드러난다면 "Rain" 에서는 그 장점에 더불어 태연 씨가 지닌 음색의 저음-고음, 진성-가성이 매우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내추럴. 편안하다. 꽃개가 지금껏 가장 많이 들은 태연 씨의 노래가 바로 "Rain". 이 노래는 아마도 많은 이들이 알고 있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꼭꼭 숨기고 함께 듣고 싶은 사람에게만 살짜쿵 들려주고 싶은 그런 노래다.
티파니 씨는 목소리에 상당한 퇴폐미와 걸쭉함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매우 독특하다 (유니크하다). 나중에 환갑에 가까우면 아마도 에이미 와인하우스나 아델에 비슷한 보컬톤을 내지 않을까 내심 걱정 + 기대하고 있다. 가사를 칠 때 교포가 부르는 것 같다 (교포 맞다). 이 곳에서 교포 1.5세대, 2세대, 3세대들이 한국어를 어떻게 말하는지 종종 들어봐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교포가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좋다/나쁘다의 가치판단은 전혀 아니고 대단히 독특하며 때론 몽환적으로 들린다. 목소리 자체에 실린 퇴폐미가 잘 어우려져 매우 유니크한 분위기를 낸다. 게다가 걸쭉한 그 분위기는 인생이 뭔지 알 것 같은 "센 언니적 (?)" 느낌을 준다. (이에 비하면 태연 씨의 목소리와 톤은 묵직함을 뒤에 깊숙이 감춘 더 나이든 느낌?) 티파니 씨의 노래에서는 "Fool" 이 좋다. 펑키한 느낌에 더불어 하우스풍의 가락 (?) 이 티파니의 목소리와 보컬을 최상으로 살려줬다.
티파니 씨 이야기가 나왔으니 지난 광복절 전후에 있었던 사달. 일명 "티파니 방지법" 논의의 단초가 된 이야기 잠깐. 고향을 떠나 외국에 나가살면 죄다 애국애족하는 마음이 퐁퐁 용솟음친다는데 꽃개는 전혀 그렇지 아니하고 되려 더 매국노가 되는 것 같다. 솔직히 사과문을 두 번이나 내야할 일인지, 예능프로그램에서 쫓겨나야 할 일인지, 소속회사 이십주년 행사에 초대조차 받지 못할 일인지 잘 모르겠다. 조선 사람들을 대놓고 일부러 능욕하려 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티파니 씨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태국을 가든, 타이완을 가든, 프랑스를 가든, 늘 그랬던 것처럼 소셜미디어 어플리케이션이 로케이션에 따라 제공하는 자동 스냅챗에서 그냥 골라서 썼을 것이다. "늘 하던대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티파니 씨의 죄라면 "늘 하던대로" "몰랐던 죄" 그 뿐이다. 실수를 했으니 그 몰랐던 일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하고 자숙하고 배우면 될 일이다.
- 티파니를 싫어할 수는 있겠지만
- 티파니·설현은 안 되고, 박근혜 대통령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