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씨의교훈
분류없음 2016/06/18 03:09
아주 오래 옛날부터 있었던 한반도와 왜(倭)의 빈번한 교류, 조선시대에 있었던 전쟁, 그리고 일제의 한반도 병탄에 이르기까지 가장 가까운 타인, 일본에 대해 한국인 (꽃개를 포함해) 이 품는 감정은 상당히 복잡하다. 어릴 때만해도 가장 저주스러운 욕이 "빨갱이"와 "일본놈; 쪽바리" 같은 거였다. 한일 축구경기가 열리면 그날은 거의 닥치고 애국의 날로 된다. 일본에겐 밀리면 안되고 당연히 패배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 우겨도 독도는 우리땅" 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폭력적인 노래를 밥먹듯이 들었고 불렀다. 네 말은 아예 듣지 않겠다는 소리니 그 얼마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가. 왜구와 일제, 그리고 현대 일본의 재무장에 이르기까지 국가로서 일본이 이웃인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일들은 이루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것이 "일본"이라는 집단을 싸잡아 저주하고 배격해야 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일본인을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왜색이 짙게 배인 문화를 소비하고 언어를 쓰고 일본문학을 읽고 접하는 게 일상이었어도 "일본사람"을 만날 일은 별반 없었다. 그러다가 이 나라에 와서 제법 적지 않은 수의 일본인을 만난다. 다양한 연령대의 일본인을 접하면서 일반적으로 서구 사람들이 일본인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 가령 절대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예의바르다 따위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도 알게 됐다. ("상대적으로" 한국인에 비해 "얌전하다" 정도는 인정할 수 있으므니다) 컬리지에서 만난 한 일본인 중년 여성과는 상당히 가까워져 따로 만나 차도 마시고 이런저런 정보도 나누곤 했는데 어느날 어느 만남 뒤로 그게 어렵게 됐다. 감자탕을 한국 전통 음식 (궁중 음식) 으로 알고 있던 그이에게 감자탕이 어떤 경로로 탄생했는지 아는대로 얘기해줬더니 경악했다. 막걸리가 먹고 싶다고 해서 한국마트에서 막걸리키트를 판다는 정보도 알려줬더니 아주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날, 왜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독도" 이야기가 나왔다. 선빵은 그 쪽에서 먼저 날렸다. 너네 한국인들은 왜 독도를 너네 꺼라고 얘기해? 너네 한국인들은 왜 국제분쟁해결 절차를 싫어해? 정말 너네 땅이면 국제적인 문제로 해결하면 되잖아? 유엔사무총장도 너네 사람이잖아, 그 사람을 잘 활용하면 되잖아?
사실 나는 저런 주제의 이야기를 저런 방식으로 하고 싶지 않다. 일부의 일본인들은 친해지면 바운더리를 너무 빨리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침범한다. 애초 처음부터 대놓고 막말하는 일부 남아시안들, 동유럽사람들, 중국인들, 한국인들이 어쩌면 더 솔직할는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데 당황했던 것 같고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것 같고 독도는 한국 영토인 게 맞다고 했고 (맙소사) 그리고 반기문따위의 사람이나 국제영토분쟁해결절차 같은 건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에게 너 무정부주의자야? 하고 대뜸 묻는 게 아닌가. 맘대로 생각해. 라고 답했고 대화하는 내내 나는 결단코 일본인들은 왜 그렇게 못생겼어 따위의 집단을 싸잡아 일컫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하고싶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헤어지는 길에 나중에 또 만나, 라며 요식적인 인사는 했는데 더 이상 그이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전차를 타고 집에 오면서 치밀어오르는 부아를 다스리느라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 같은 때에 그이를 만났다면, 그리고 저런 대화를 했다면 아마도 나는 좀 더 근사하고 여유있게 반기문처럼 미꾸라지처럼 살살 잘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단정적인 말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좀 더 그이의 생각을 끌어내기 위해 애쓸 것 같고 그이의 생각을 더 경청하려 노력했을 것 같다. 이런 사람을 더 만나야하나 말아야하나 그런 결정은 그 뒤에 천천히 해도 상관없다. 이태 전 쯤에 일어난 일인데 아무래도 그때엔 혈기가 왕성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혈기가 너무나 왕성방자한 나머지 독도가 왜 한국땅인지, 한국땅이면 뭐가 좋은지, 나와 같은 흙수저 삶들에게 독도가 한국땅이어서 뭐가 이롭고 행복한건지 그런 생각을 좀 더 진지하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에게 무정부주의자냐고 그이가 물었었지. 아마도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