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의슬픔
분류없음 2016/06/08 05:23
동안 (童顔) 의 슬픔 외
클라이언트 한 명이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며 얘기를 하자길래 그러마, 하고 대화 시작. 자신의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이야기. 그래 너의 상황이 어떠한대. 들려줄 수 있겠니. 얘기를 하던 도중에 "내가 너 나이때에는 괜찮았어. 젊었을 땐 괜찮았는데 이젠 잘 모르겠어" 라고 한다. 클라이언트 파일을 열어보면 나이를 알아내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대화 도중에 그럴 순 없고 살짝 물어봤다. 꽤 어려보였기 때문이다.
- 미안하지만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
= 응, 스물여섯이야.
- 어렸을 때라면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 얘기하는거야? 좋았던 때가 어땠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
(한창 대화를 함)
- 그런데 너 내가 몇 살로 보여? 혹시...
= 응. 너 스물 한 살 정도로 보이는데? 아니야?
- 그렇구나. 이거 정말 고마운데? 너도 너 나이를 알려줬으니까 나도 내 나이를 알려줄께.
사실대로 몇 살인지 알려줬더니 깜짝 놀란다.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뭐 사과할 것까지야.
- 몇 년 전에 다닌 대학에선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봐 꼬마 (Hey kid)" 라고 부르기도 했어. 아직도 지하철에선 종종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 별로 기분은 안 좋은데 뭐 어쩌겠어.
=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런데 너 정말 어리게 보여.
- 응 알았어. 괜찮아. 그리고 솔직히 나이가 뭐가 중요하니. 뭘 하겠다는 그 의지가 중요한 거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내가 만약 그 클라이언트의 나이라면 (스물여섯) 돌도 씹어먹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슬프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어쨌든 그 사람은 대화를 나눈 뒤 기분이 한결 괜찮아진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영화 곡성
화요일 특선 요금 ($7.90) 으로 한국 영화 "곡성 (The Wailing, 2016)" 을 봤다. 요즘 한국에서는 영화관람료가 얼마인지 잘 모르겠지만 같이 간 파트너께서 $7.90 이상이라고 하시는 것으로 보아 대략 만 원 안팎인 것 같다. 조조할인은 아직도 있겠지.
영화는 누가복음 24장의 한 구절로 시작한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나 그의 실존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잔소리하는 내용.
"Why are you troubled, and why do doubts rise in your minds? Look at my hands and my feet. It is I myself! Touch me and see; a ghost does not have flesh and bones, as you see I have."
- Luke 24:38-39 (NIV)
"느네 왜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하고들 지랄이냐. 내 손이랑 발을 봐라. 나다 나! 영 못 믿겠으면 만져봐. 귀신은 살과 뼈가 없지만 보다시피 나는 이렇게 있다고."
- 누가복음 24:38-39 (꽃개버전)
영화는 그냥 딱 현재 한국사회를 보여주는 것 같다. 공권력은 유명무실하고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추측과 루머가 횡행하고 이에 따른 사적 응징이 버젓이 판을 친다. 사람 여럿이 죽어나가는 동안 행정권력, 경찰력, 언론 등 자기 일을 해야 할 공적 역할자들 (authorities) 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공적 권력과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는지 (혹은 죽어가는지) 아주 잘 보여준다. 지옥이 따로 없다. 다만 간간이 독버섯을 섭취한 환각 상태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는 방송뉴스 화면을 보여주는데 뭔 일만 생기면 개인(들)의 일탈로 원인을 돌리는 이 나라 정부와 똑닮았다. "독버섯=일탈". 게다가 무능력하기 그지없는 남주께서는 마지막까지 혼잣말을 한다. 아빠가 다 해결할께 (Dad will). 이 말도 안되는 무능력한 무정부적 정부의 수장이신 유사가부장께서 다 해결해주실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도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을 그냥 듣고만 있어야 하는 현실. 아ㅡ 제발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아주세요.
시작과 끝이 상당히 일관됐다. 누가복음의 저 구절이 다시 끝무렵에 반복된다는 말씀.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이성적으로 따지면 영화에서 주는 실마리로서는 독버섯밖에는 원인이 없는데 대체 원인이 뭘까요" 라고 물었더니 "원인이 무엇이다는 것조차 열어놓고 만든 영화같아요. 나홍진 감독이 전작들에 비해서 많이 열어놓은 것 같네요." 라고 말씀하시는 나의 짝꿍.
덧
- "아가씨"는 정말정말 보고싶은데 이 도시에서 개봉할지 그건 잘 모르겠다. 아직은.
- 한국인 유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혼자 영화관을 많이 찾았다. 한결같이 성시경 안경을 쓰고 있어서 눈에 확 띄었고 혼자서도 영화를 보러오는 남학생들이 많은 것 같아 보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