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둑한배짱
분류없음 2016/05/05 01:24
서비스유저 (service users), 클라이언트 가운데 한 분이 갑자기 분노를 표출하고 적절지 않은 언사를 하는 바람에 긴장감이 조성됐다. 이 분은 캐나다에서 태어난 백인, 외모로 보건대 전형적인 서-북유럽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는 듯. 즉, 부모나 조부모 등 조상들이 서-북유럽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사람이라는 말이다. 간간히 대화를 나눠본 결과 조상 가운데 원주민 (First Nations) 혈통은 전혀 없다. 엄밀히 따지면 이 양반도 이민자의 후손. 몇 년 전에 하우징 어플리케이션을 냈는데 어찌어찌한 이유로 어플리케이션이 펜딩됐다. 아무리 기다리는 기간이 오래 걸린다해도 벌써 아파트를 받아서 입주했어도 서너 번은 했을 기간. 이유를 물어보니 황당한 대답을 한다.
"빌어먹을 시리안 리퓨지들이랑 무슬림들이 내 조국에 들어와서 아파트를 다 빼앗아 갔어. 개후레자식 같은 이민자들이 내 조국에 와서 일자리를 다 훔쳐가고 있다고. 이건 정당한 일이 아니야."
응?
이유를 샅샅이 찾아보니 하우징 신청서를 낸 뒤에 업데이트를 하지 않았다. 원래 본인만 할 수 있는 이 업데이트를 본인이 하기 어려우면 케이스워커들이 대신 할 수 있도록 동의서를 제출하고 해당 케이스워커와 한 달에 한 번, 적어도 분기에 한 번만이라도 팔로우업을 하면 되는데 그걸 안했다. 공공하우징회사에서는 신청자가 일정 기간 업데이트를 하지 않을 경우 신청서를 펜딩하거나 더 뒤의 웨이팅리스트로 보낸다. 신청자가 그 사이 다른 아파트를 얻었을 수도 있고, 공공하우징 서비스를 원치 않을 수도 있고 (변심했을 수도 있고) 혹은 심지어 사망했을 수도 있고 등등의 이유 때문이다. 최소한 분기별 일 회 업데이트가 필요한 까닭이다. 이유를 설명하니 자신은 몰랐단다. 그리고 홈리스로 사는데 어떻게 그걸 일일이 확인하고 업데이트하냐며 되려 성을 낸다. 한 달에 한 번 장애보조금은 받고 있잖아. 그 체크는 어떻게 수령하고 있었어? 어떻게 했는지, 아니면 누가 도와줬는지 말해줄 수 있니? 그건 꽃개 네가 알 바 아니야, 라며 소리를 지르고 자리를 뜬다. 뒤돌아서 가는 길에 혼잣말로 이민자들 확 다 뒈져버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분노를 시전하시곤 사라졌다.
이런 양반들을 일컫는 오래된 슬랭으로 화이트트레쉬 (white trashes) 가 있다. 면전에서 이 말을 하면 곤란하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는 단어. 대체 이 사람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국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을 거다. 추측컨대 남자, 중년 이상의 연령, 저임금노동자 혹은 실업자, 홈리스 등의 반피티/룸펜 피티 그룹 가운데 이런 부류들이 많을 것 같다. 최근엔 젊은 남성들 가운데 여성혐오-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넓게 퍼진 억울력자들.
실제로 이들로 하여금 압박감을 느끼게 하는 원인을 함께 파헤치고 그것에 함께 맞서자고 하기까지 지난한 시간과 노력이 든다. 가령 저 백인 클라이언트에게 한없이 부족한 공공하우징 공급 정책을 뜯어고칠 수 있도록 정부를 압박하자고 한들 이이에게 그 말이 통할 리가 없다. 당장 트럼프 같은 인물이 캐나다에도 필요하다고 하는 저런 사람을 보면 "정내미"부터 떨어진다.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거다.
이명박귾혜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외국인노동자들과 불법체류자들을 추방해야 내국인 일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목놓아부르짖는 이들에게 노동시장정책의 불합리성과 "쉬운 해고"가 목적하는 바를 설명한들 동의를 얻어낼 순 없을 거다. 아마 대번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 것이다.
말을 해도 말을 못알아들으니 말을 할 수가 없네, 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런데, 그런 목불인견 (目不忍見) 의 상황을 알고도 하는 일이 나의 일이다. 배짱을 좀 더 두둑하게, 좀 더 여유를 가져가겠다. 야구와 마찬가지로 나의 일의 가장 큰 적은 일희일비 (一喜一悲) 인 것을.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