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그뒤
분류없음 2015/02/28 05:33오스카 시상식이 끝난 뒤 며칠 동안 SNS에서 오가는 내용을 보며 착잡했던 기분을 오늘은 조금 정리해봐야겠다. 대체 무엇 때문에 속이 시끄러웠나.
1.
가장 시끄러웠던 것은 보이후드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페트리샤 아켓 (Patricia Arquette) 의 수상 소감,
"To every woman who gave birth to every taxpayer and citizen of this nation, we have fought for everybody else's equal rights", "It's our time to have wage equality once and for all, and equal rights for women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아이를 낳아 기르는 모든 여성들, 세금을 내고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지금껏 한사람 한사람 모든 이들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싸워왔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미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이 임금차별없이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쟁취하여] 살아갈 수 있는 그 권리를 누리도록 합시다."
상을 받고 내려간 페트리샤 아켓은 무대 뒤에서,
"It's time for all the women in America and all the men who love women and all the gay people and all the people of colour that we’ve fought for, to fight for us now," 1
"이제 미국의 모든 여성들, 그 여성들을 사랑하는 모든 미국의 남성들, 모든 성소수자들, 유색인종들이 모두 다같이 우리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때입니다."
둘째는 첫째만큼 시끄럽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시끄러웠다.
감독상을 수상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숀펜이 버드맨의 감독 알레한드로 이냐리뚜 (Alejandro Inarritu)를 호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Who gave this son of a bitch his green card?"
"누가 이런 망할 놈에게 영주권을 줬을까?"
2.
두 가지 전혀 다른, 그러나 매우 깊은 연관을 지닌 사건을 접한 뒤로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첫째, 숀펜의 저 말은 다분히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말이다. 알레한드로 이냐리뚜 감독은 '라티노'다. 미국 사회에서 라티노는 가장 많은 수의 이민자-이주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이른바 "불법체류자" 가운데 이들 인구가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이들의 많은 수가 차별과 저임금 착취 노동에 시달린다. 위키에 있는 미국-멕시코 국경은 그 사진을 봐도 차이를 알 수 있다. 멕시코 측 국경 지대는 "삶이 지속되는 곳"이라면 미국 측 국경 지대는 "삶이 중단된 곳"이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illegal crossing) 것을 차단하기 위해 미국의 국경 지대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민자인 알레한드로 이냐리뚜 감독을 직접 지칭해 '망할 놈'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그런 망할 놈에게 누가 '영주권'을 줬냐고 우스꽝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발화자가 숀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공한 백인 중년 남성, 가시적인 신체장애가 없고, 사회의 룰과 보수적인 성향에 콧방귀끼는 것을 밥먹듯이 하는 술먹듯이 하는 숀펜의 성향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저 말을 웃어넘긴다. '재미있는 농담'이 성립한다. 따라서 숀펜의 저 말은 '실수'가 아닌 것으로 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숀펜은 미디어에서 SNS에서 상대적으로 덜 까였다. 성공한 백인 중년 남성의 저 괴상한 말이 '익스큐스'를 받은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런 말을 저런 자리에서 하지도 않지만, 만약 그랬다가는 사돈의 팔촌까지 탈탈 털렸을 것이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질질 짜면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을 것이다.
숀펜의 저 말이 나온 직후 많은 라티노들이 "우리 커뮤니티에 대한 모욕"이라며 들고 일어섰다. 적지 않은 사람들도 숀펜을 비난했다. 하지만 또 일부 사람들은 숀펜의 하이블랙-고급진 유머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분노에 찬 일부 라티노들과 숀펜을 비난한 사람들을 되려 깎아내렸다.
개인적으로 숀펜의 저 말은 용납할 수 없는 말이다. 숀펜의 화려한 리버럴 지향을 이해하고 그를 일정 부분 지지하기는 해도 그의 지향과 성향이 '익스큐스'의 원인으로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개인이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에는 "별 문제 없겠지"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랴"는 기대심리가 있기 마련이다. 이 정도 뇌물은 주고 받아도 문제 없겠지, 저 여자의 짧은 치마가 남성을 유인하려는 거라고 대놓고 말해도 나만 그런 게 아니니 괜찮을거야. 개인의 행동은 많은 부분 그 개인이 속한 커뮤니티의 분위기를 방증한다. 물론 숀펜이 이런 것까지 생각했을 위인은 아니다. 그는 누가 아무리 뭐하고 해도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3.
둘째, 페트리샤 아켓은 (숀펜에 비해) 과도하게 욕을 먹었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머리가 나쁘다거나, 꼴페미라든가, 인종차별주의자라든가, 중산층(리버벌)페미니즘의 한계라든가 등등. 그런 비판(들)은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그냥 그러려니 한다. 늘! 언제나! 생물학적인 여성이 저지르는 실수 (혹은 여성이 얻는 찬사)는 그의 젠더와 섹스 때문에 더더욱 과장되어 부풀려지고 더 많이 회자된다. 그것은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남성이 저지르는 실수는 그 남성의 남성성, 젠더적 성성을 경유해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낼 필요가 없다. 이 사회에서 남성성이 표준인 까닭이다.
페트리샤 아켓의 발언이 거북스러운 것은 "To every woman who gave birth~," 부분이다. 그리고 " ~ ~, to fight for us now" 부분이다.
페트리샤 아켓은 "To every woman who gave birth"라고 운을 떼면서 여성의 생득적 능력인 '출산'에 초점을 맞췄다. 이 세상에 여성과 남성, 오로지 두 개의 젠더-섹스만 존재한다고 할 때 상대 성(性)인 남성에게는 이 능력이 없다. 이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남성(중심의 이 구조와 세상)은 스스로-태생적으로 결여한 이 능력을 상대 성(性)인 여성을 통제함으로서 전유할 수 있었다. 남성들이 독점했던 노동시장에 여성들이 쏟아져 나오고 또 남성들만 참여하던 투표권을 여성들이 얻자 이 통제는 벽에 부딪혔다. 자, 이제 그들이, 이 사회가 통제를 지속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성만이 지닌 그 생득적 능력을 고결하고 참되고 가치있고 인류를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의무로 만들었다. 통제가 원활할 때에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거니까 마땅히 강조할 이유도 없었고, "아침에 애낳고 오후에 김매고 와서 저녁에 시부모남편 밥상 차린다"는 말까지 했다. 화장실에서 똥누는 일처럼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출산이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 것으로 되자, 여성 스스로 여성의 몸을 결정할 수 있게 되자 되려 그 출산이 "여성이 수행하는 고결하고 엄숙하며 신성한 의무로" 된 이 아이러니를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심지어 "남자는 군대를, 여자는 출산을" 웃지못할 캐치프레이즈가 횡행할 때도 있었더랬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무와 권리의 항을 그릇되게 이어붙인다. 의무를 다해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어불성설의 논리를 마치 "정상"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권리는, 특히 이것이 보편인권에 관한 것일 때에는 권리 그것은 그 자체로 평등한 것이어야 하며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 반면 의무는 다르다. 만약 부자와 거지에게 동일한 액수의 세금을 내도록 한다면 이 의무 행위가 '올바르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의무는 사회적 맥락, 가치, 개개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구현하는 바가 다르다. 가령 우리나라 헌법 제39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 헌법 제39조에서 말하는 법률은 병역법으로 따로 다룬다. 병역법에 의해 두드러진 신체-정신적인 차이를 지닌 젊은 남성은 -그가 아무리 GP 근무를 하고 싶어도- 실제로 복무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군대를 운영하는 국가, 사회가 그 개인이 지닌 차이를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미 의무를 다한 것으로 간주하여 국가가 그들을 "정상집단"에서 분리한 것이다. 말이 좋아 "너에게 의무를 면제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이미 의무를 다한 것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이른바 "군면제"인 이들이 헌법 제39조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는, 의무를 다하였다.
여성이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남성과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출산을 하고 있거나 세금을 내고 있거나 따위의 이유가 아니다. 페트리샤 아켓이 이것을 모를 리 없을텐데 그녀는 이렇게 얘기해야 사람들이 끄덕끄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몰랐다면 정말 그녀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겠지만 그것은 내 판단 밖의 영역이므로 패스!
4.
나는 출생하면서 부여받은 생물-해부학적 젠더와 나고 자라면서 나를 규정하는 젠더가 일치하는 시스피메일 (cis-female), 여성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출산의 능력은 있다. 그러나 직접 출산할 의사도 계획도 없다. 만의 하나 성령으로 잉태하는 일이 있어도 임신중단 결정을 내릴 생각이다. 그렇다면 나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니 권리의 일정 부분을 제한받아도 되는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나의 젠더아이텐터티와 출산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세금을 내고 있다. 물건을 살 때마다 붙는 간접세 (Indirect Tax: GST, HST, PST)는 물론이고 직접세 (Direct Tax: Income Tax, EI, CPP) 도 꼬박꼬박 잘 내고 있다. 간접세를 안 내자니 물건을 살 수 없고, 회사에서 월급날마다 뜯어가는 탓에 직접세도 잘 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나는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의 세금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알 권리와 이렇게저렇게 운용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고 나보다 세금을 적게 내지만 사회적 혜택을 나보다 더 많이 받는 사람을 줄이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것은 법에서 규정할 시민의 권리와 전혀 다른 영역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세금을 내는 문제"와 "사회복지혜택의 대상을 규정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영역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 나라에 노동비자로 머물고 있다. 투표권이 없고 사회복지혜택을 받을 수 없다. 비자 기간이 만료하면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 안그러면 '불법체류자'가 된다. 그러면 나는 시민들이 주장하는 권리를 요구할 수 없나? 그렇지 않다. 권리가 주어지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나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특히 동일임금-동일노동, 남과 여에 임금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사안을 나는 당연히 주장할 수 있고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럼 '불법체류자'들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주장하면 안되나?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도 인간이 누릴 기본권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들에게 "체류비자가 없는 문제"와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는 권리"는 전혀 상충하지 않는다. 둘은 전혀 다른 영역의 문제다.
5.
안 그래도 페트리샤 아켓과 숀펜 때문에 속이 시끄럽던 찰나에 아래와 같은 페티션 (청원서) 이 돌고 있다. 페트리샤 아켓의 스피치에 버금가는 말이다. 우리는 이만저만하니까 가치가 있어요. 한참을 생각하다가 페티션에 서명을 했다. 청원서를 내고 요구를 천명하는 것 그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https://www.change.org/p/citizenship-and-immigration-canada-candidates-on-open-work-permits-and-working-in-canada-need-more-visibility-in-express-entry-syst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