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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12일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지자, 남한 정치권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전했다.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없었다. 되레 보수진영은 고무된 표정을 지었다. 대중투쟁의 격화로 일국의 정권이 붕괴되었지만 보수진영에서 우려하는 목소리를 찾기란 어려웠다. “이집트 국민이 하나 된 힘으로 이뤄낸 과정은 감동”(한나라당), “민주화 시민혁명의 거센 물결은 중동을 거쳐 전 세계로 파급될 것”(자유선진당)이라는 논평이 앞 다퉈 나왔다.
하지만 아랍의 민주화 투쟁이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치자 미묘한 입장 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장 중국과 국경을 맞댄 북한이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수천, 수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아랍의 민주화를 말하면서 지척에 있는 북한의 민주화를 떠올리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그건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을 대하는 해법은 제각각 달랐다. 지난 3월2일 민주당 손학규의 공개적인 입장 표명은 정치권의 동상이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정치권의 동상이몽
이날 손학규는 작심한 듯 보수진영을 직접 겨냥했다. “사유화한 공권력으로 시민을 유린하던 바로 그 세력이 중동의 민주화 물결을 빙자해 북한의 민주주의를 거론한다면 이는 낡은 이념의 질곡”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어 “동포의 불행, 형제의 비극을 정치적 기회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아랍권에서 불고 있는 민주화 시위가 북한에 대해선 적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 대신 손학규는 북한을 향해 “점진적이고 평화로운 개혁, 개방의 길”을 요구하는 수준에서 입장을 정리했다.
보수진영은 즉각 반발했다. 자유선진당은 당일 논평에서 “손 대표의 말은 늑대(김정일 부자)와 토끼(북한 주민)를 한우리에 집어넣고, 토끼의 행복을 위해서 늑대의 신경을 거스르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일갈했다. 동아일보는 3월3일자 사설에서 “자유를 향한 갈망이 낡은 것인가”하는 반문과 함께 “입만 떼면 ‘진보’ 운운하면서 그 장엄한 역사의 진보가 북녘 땅에서 이뤄지기를 바라는데 대해 ‘낡은’이란 낙인을 찍는 손 대표가 바로 수구(守舊)”라며 손학규를 정면에서 비판했다.
아랍의 민주화 시위를 계기로 보수진영은 민주화의 전도사로 행세하고 있다. 종신집권이나 권력세습을 꾀한 아랍권의 독재정권을 향해 보수진영은 매의 눈을 하고 연일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자유와 인권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교과서적인 말은 보수진영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물론 이명박 정권 들어 제도적·형식적 민주주의조차 뒷걸음질 친 남한 사회의 현주소는 당연히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아랍권의 독재정권이 무너졌듯 북한의 김정일 정권도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붕괴론에 대한 보수진영의 기대는 아랍 세계의 지각변동 이후 한껏 부풀어 올랐다. 이러한 주관적 기대는 대북전단의 살포로 구체화 됐다. 지난 2월 이후 자유북한운동연합의 주도로 20여개 보수단체와 한나라당 일부 의원은 파주 임진각에서 대북전단 보내기를 재개했다. 보수진영은 소셜 미디어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인 북한에 아랍권의 소식을 담은 전단지를 풍선에라도 매달아 보내야 한다며 정당화 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 정권에 맞선 민주주의 운동과 인권 운동이 보수진영의 전유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랍권처럼 북한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보수진영을 제외하곤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개혁 성향의 자유주의 진영은 북한 민주화 운동에 대해 한사코 반대하고 있다. 북한의 권력층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북한의 국가권력은 향후 한반도 질서를 놓고 때론 마찰을 빚을 순 있어도 결국은 협상 테이블에서 얼굴을 맞대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회피의 이중잣대
자유주의 진영은 북한 민주화에 앞서 현실론을 제기한다. 북한과 아랍권의 독재국가를 단순 비교할 순 없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주요하게 세 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북한 정권 자체가 주민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지만 외부의 제재와 고립정책 또한 통제정책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 ▲북한 주민들이 민주주의 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채 아직도 주체사상과 같은 국가통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다는 것 ▲북한의 뒤에는 중국이라는 커다란 변수가 있다는 것 등이다.
그 결과 현재 북한에서 체제 붕괴의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1990년대 소련의 몰락과 김일성의 사망 이후 보수진영이 지난 20년 동안 되풀이해온 북한붕괴론은 신념에 따른 ‘대북정책의 종교화’라고 일축한다. 물론 이 같은 주장은 보수진영의 ‘기대’와 달리 적어도 북한의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현실론만 붙잡고 있다면 “독재에 항거해 민주화를 이룬 튀니지와 이집트는 현실이 아니고 꿈인가”(자유선진당)라는 보수진영의 반박에 맞대응할 수 없게 된다.
자유주의 진영이 북한 민주화 운동에 대해 회피를 고집하는 것은 ‘합리적 대북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의 급변사태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2월 24일자 사설에서 “북한이 아랍처럼 경착륙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비용이 너무 크다. 정부는 북한의 연착륙을 모색해야 한다”며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자유주의 진영은 그래서 북한을 개혁과 개방으로 이끄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과 함께 북한의 지배 권력을 현실적인 협상의 주체로 용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의 경착륙 사태는 보수진영도 내심 우려하는 사안이다. 조선일보는 3월 10일자 칼럼에서 “중동 민주화 바람, 김정일의 죽음과 김정은 세습, 배급이 줄어든 인민군의 이탈, 장마당으로 우르르 몰려나온 주민들 혹은 궁정 쿠데타 등으로 급변사태를 기대한다면 잠깐 기분은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뒤에는 기나긴 현실의 악몽이 기다릴 게 틀림없다”고 지적했다. 자유주의 진영 못지않게 계산기를 두들기면서 북한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보수진영의 주장이 강경한 어조와는 달리 사실은 이데올로기적인 공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한다. 남한 내에서 우익적 색채를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제스처인 셈이다. 다시 말해 격동하는 아랍권을 배경으로 ‘북한 민주화’라는 말을 던져놓음으로써, 북한의 억압적 체제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반사이익을 얻어 보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실제로 이명박 정권은 최근 남북관계 경색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권력층과 자본투자, 정상회담 등을 놓고 이면접촉을 계속하고 있다.
결국 보수진영이든 자유주의 진영이든 지금의 북한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는 바라지 않고 있다. 다만 자유주의 진영의 경우 노골적으로 북한 지배층과의 협상을 통한 점진적인 시장자본주의화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으로 포장한 자유주의 진영이 북한 민주주의 운동에 침묵한다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회피는 비단 자유주의 진영뿐 아니라 진보진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냉대와 음모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아랍의 민주화 투쟁에 대해 곧장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민주화 투쟁이 리비아 사태로 확산되자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더니, 보수진영의 북한 민주화 공세에 대해선 지금껏 묵묵부답인 채로 남아 있다. 오히려 민주노동당은 오는 6월 당 대회에서 기존 강령에 있는 ‘북한 사회주의 경직성 극복’이라는 문구를 삭제하겠다고 공언해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당 내에서 아예 차단하려 하고 있다.
진보진영의 인사들 역시 북한 민주화라는 쟁점을 냉대하면서도 리비아 사태에 대해서는 한술 더 떠 음모론까지 제기했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리비아의 무장반란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미국의 리비아 무력침공 계략에 말려드는 치명적 실책으로 된다”고 말했고, 전태일 노동대학 김승호 대표도 “누가 이렇게 무기를 밀수하고 무장봉기를 주도했는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세력이 리비아 구국민족전선”이라며 친미 망명자 집단을 배후로 지목했다.
일부 사회주의자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국노동자정치협회>는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을 여전히 “아랍 세계의 대표적인 반제정권”으로 지칭하며 “리비아의 반정부 시위가 리비아 동부 벵가지를 거점으로 발생한 것은 미 제국주의와 유럽 제국주의가 직간접으로 배후에서 개입한 것으로 의구심을 갖도록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음모론까지 내비치며 이제는 빈껍데기만 남은 ‘반제국주의’의 상징 카다피를 여전히 옹호한 것이다.
물론 리비아의 반정부 시위대가 투쟁 과정에서 과거 왕정의 상징인 삼색기를 내걸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뿐이 아니다. 반카다피 진영의 임시정부 총리 지브릴은 미국적 시각을 가진 개혁주의자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의회기구격인 과도국민위원회 위원장 잘릴은 서방의 군사적 개입을 줄곧 주장해왔다. 카다피 체제에서 소외된 상당수 부족들도 과도정부에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이유로 반정부 시위대 전부를 친서방 계열의 꼭두각시라거나 반민주주의자, 왕정주의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반카다피 진영에 서서 민주화 투쟁에 나선 리비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카다피 없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으며, 그 꿈을 위해 카다피의 무자비한 학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무장하며 저항의 주체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초 서방세계의 수수방관 속에서 카다피는 전세를 역전시켜 3월17일 밤에는 시위대의 구심점인 벵가지를 향해 최후통첩까지 선언했다. 그러나 벵가지의 시민들은 백기투항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량학살이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오히려 음모론은 카다피가 시위대 탄압을 정당화 하는 구실로 삼았으며, 3월 20일 서방의 군사개입 이후에는 스스로를 ‘반제투사’로 치장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이 같은 음모론은 중국, 쿠바, 베네수엘라 등의 나라들에 의해 지지받고 있다. 중국의 관영매체 <신화통신>은 미국의 배후조종설을 내놓으며 자국으로의 민주화 시위 확산을 경계했다. 쿠바의 카스트로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친미·반미의 구도를 내세워 카다피를 옹호하며 시위대를 불신의 눈길로 바라봤다. 지난 2003년 카다피의 핵 포기 선언으로 리비아가 이미 친미국가로 돌아섰음에도 말이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민주적 권리가 제한된 장기집권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아랍의 민주화 열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들이다. 리비아 사태의 세계적 파장은 ‘현실 사회주의’ 또는 ‘21세기 사회주의’가 얼마나 기만적인지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하지만 남한의 진보진영과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서민의 위에 군림하는 이들 국가 체제를 아직도 ‘진보’로 덧씌운 채 침묵하거나 오히려 진실마저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과 투쟁
진보진영은 물론 일부 사회주의자들까지 리비아 사태와 북한의 민주화에 대해 대중의 상식과 어긋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다. 이들은 기업의 국유화와 계획경제의 도입을 사회주의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의 본질은 생산수단의 전사회적 소유로의 전환에서 이를 누가 실제로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다. 북한을 비롯해 중국, 쿠바, 베네수엘라 등의 나라에서 생산수단은 여전히 사회의 일부 세력들, 즉 국가관료와 군부세력이 결합된 지배 엘리트들이 움켜쥐고 있으며 임금노동제 또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북한은 군사관료가 사회적 통제권을 쥐고 있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일 뿐이며, 이 말은 북한의 국가권력이 남한의 국가권력과 마찬가지로 타도의 대상임을 뜻한다. 따라서 북한 민주화 운동 역시 보수진영의 주장과는 다르게 제기되어야 한다. 현재 보수진영은 북한의 고립을 요구하며 북한의 노동자들과 주민들에게 과거 1980년대 말 폴란드 등 동구권과 같이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기거나 서구식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이와는 달리 북한 사회가 민주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의 노동자들과 주민들이 고립에서 벗어나 남한뿐 아니라 전 세계 노동자들과 교류하고 연대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을 찾아야 한다. 사실 국가권력에 통제되지 않는 전면적인 교류확산이야말로 북한 지배층이 가장 우려하는 것이다. 북한의 지배층이 아닌 이러한 교류와 연대에 기초해 북한 체제가 왜 가짜 사회주의인지, 대중 스스로 새로운 권력의 중심에 서는 투쟁의 방향은 무엇인지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아랍의 민주화는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특히 리비아에선 서방의 군사개입마저 이루어졌다. 아랍의 민주화 투쟁이 새로운 국면, 즉 국제분쟁으로 비화한 것이다. 카다피가 여전히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서방의 군사개입을 놓고 전 세계적으로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를 필두로 서방세계가 공습에 나선 이유는 명확하다. 안정적인 석유수급과 지역적 패권을 분명히 하려는 조치인 것이다. 인도주의적 개입이란 공연한 명분일 뿐이다.
카다피도 서방의 의도를 잘 알고 있다. ‘반제투사’ 카다피는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자마자 리비아 내 외국인 재산은 안전하게 보호될 것이라 선언하며, 리비아의 유전이 서방에 열려 있음을 누차 강조했다. 공습 직후엔 미국과 사태수습을 위한 비밀협상에 들어갔다. 카다피의 적극적인 행보에 서방세계도 싫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 서방세계는 당장이야 무력대응이라는 강경카드를 내밀고 있지만 공습이 장기화되면 언제든 카다피와 이면합의로 이권만 챙기고 발을 뺄 수 있다. 리비아 서부는 트리폴리 중심의 카다피 진영, 리비아 동부는 벵가지 중심의 반카다피 진영으로 ‘동서분할론’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카다피의 총공세로 대량학살의 공포감에 휩싸였던 시위대는 절박한 심정에서 서방의 군사개입을 일단 반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한의 <다함께>와 <사회진보연대>와 같은 정치단체들은 시위대의 구체적 현실은 고려하지 않은 채, ‘반제국주의’라는 잣대로 ‘서방의 군사개입에 반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카다피의 무력탄압과 학살위협이 현존하는 한, 그러한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수밖에 없다. 기사회생한 시위대에게 ‘서방의 군사개입 반대’와 ‘리비아의 민주주의는 리비아의 손에’라는 구호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다.
카다피마저 악용하고 있는 ‘반제국주의’는 당면한 국면에서 대립의 축을 ‘카다피 vs 서방세계’로 한정시키고 있다.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시위대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처음부터 외국의 개입을 바라지 않았던 시위대는 반카다피 투쟁에서 서방의 개입이 제한적이어야 하며, 주도권까지 서방에 내줄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상군 투입에 반대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총도 쏠 줄 몰랐던 리비아의 시민들은 결국에는 자력으로 카다피와 싸우길 바라고 있으며, 서방의 군대가 시위대의 열망을 통제하려는 것에 경계하고 있다.
시위대의 이 같은 입장은 전적으로 지지받아야 한다. 지금 요구되는 것은 서방의 군사개입에 대한 찬성, 반대의 대립 구도가 아니라 민주화 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시위대를 향한 전폭적인 지지다. 해방된 지역에서 민주적 통제를 경험한 리비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반카다피 투쟁 속에서 스스로의 무장력과 조직력 그리고 투쟁의식을 더욱 굳건히 하는 것이 현 국면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중투쟁의 활력이 뒷받침될 때 리비아의 사람들은 카다피와의 제휴나 서방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정부수립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적인 연대가 절실한 상황에서 시위대에 대한 이러한 지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왜곡되거나 회피되어선 안 된다. 설령 북한을 이유로 든다 해도 마찬가지다. 보수진영의 허구적인 언사와는 달리 북한 사회에서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열망이 대중투쟁으로 움터올 때 북한 체제도 결코 예외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년 연말부터 시작된 아랍발(發) 민주화 투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오로지 이러한 투쟁으로부터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도 실현될 수 있다. 세계사적인 사건은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김성렬(tjdfuf@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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