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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혁명 세대’, 새로운 희망을 쏘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아랍권에서 타오른 민주화의 불길이 몇 달째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 12월17일 튀니지에서 분신한 한 청년의 비극적인 죽음은 이후 아랍을 뒤흔든 민주화 투쟁의 불씨가 되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억눌려온 불만과 분노는 일거에 폭발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거리로 몰려 나와 ‘빵과 자유’를 외쳤다. 이들은 국가권력의 탄압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동안 아랍권의 권위주의 정권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다. 1970년대 남유럽,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 그리고 동유럽에 불어 닥친 민주화의 도미노를 모두 비켜갔던 까닭이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철권통치는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왕정국가들도 안심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아랍 지역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식의 통념은 여지없이 깨졌다. 아랍의 민주화 투쟁에 대해 남한에서는 보수와 진보 모두 반기는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그러나 아랍발(發) 민주화 열풍이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치자, 중국은 물론 중국과 국경을 맞댄 북한을 두고 이들의 동상이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보진영은 아랍권에서 불고 있는 민주화 투쟁을 지지하다가도 북한을 상대로 해서는 되레 자제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아랍의 민주화 물결은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리비아와 바레인에서는 민주화 시위가 격화됨에 따라, 외국의 군대마저 개입해 그 양상은 한층 더 복잡해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난 연말부터 계속되고 있는 민주화 투쟁이 세계사적 사건으로 발돋움했다는 것이며, 어떠한 반동적 시도에도 민주화의 성과를 완전히 되돌리기 힘들만큼 아랍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투쟁의 경험을 각인해 놓았다는 것이다. |
아무도 몰랐다. 자유와 해방을 향한 에너지가 들불처럼 타오를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튀니지에 이어 아랍의 대표적 친미국가인 이집트마저 정권이 무너지자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무바라크 구하기’에 나섰던 이스라엘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아랍 전역에서 철옹성 같이 군림하던 독재자들은 앞날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북아프리카의 맹주를 자처한 리비아의 카다피도 집권 42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권위에 굴복했던 역사는 뒤집히고 있다. 튀니지를 시작으로 촉발된 민주화 시위는 과거 서구 열강들이 재단해 놓은 국경선을 뛰어넘었다. 권력에 대한 도전은 공공연히 벌어졌다. 거리로 나온 수많은 사람들은 독재자들의 개혁조치에 흔들리지 않았다. 정권퇴진과 민주주의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다. 그 중심엔 이른바 ‘혁명 세대’가 있었다. 아랍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혁명 세대는 아랍 민주화 투쟁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혁명 세대’의 등장
모로코 |
57% |
시리아 |
65% |
알제리 |
58% |
사우디 |
60% |
튀니지 |
52% |
이라크 |
68% |
리비아 |
58% |
이란 |
58% |
이집트 |
61% |
예멘 |
74% |
<아랍권 29세 이하 인구비율(2010년 유엔 인구통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아랍 지역에서는 모종의 ‘사회 협약’이 존재했다. 1952년 이집트의 나세르가 아랍민족주의를 설파하며 집권한 이후, 아랍 세계에서는 국가가 노동자·서민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주는 대신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암묵적인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협약에 기초해 아랍 각국의 독재체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견고하게 권력을 유지해 왔다. 이집트 현대사에서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 등 단 세 명의 통치자만 있었다는 사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90년대 들어 사회협약은 깨지기 시작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경제자유화를 추진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물론 경제성장률만 놓고 보자면 경제적 번영은 계속되었다. 튀니지는 지난 2000~2008년 연평균 4~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이집트도 지난 2005∼2008년 연평균 7%의 경제성장률을 구가했다. 리비아 또한 미국과의 관계개선 이후 경제제재 조치에서 벗어나며 오일머니를 두둑하게 챙겨오고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경제성장 이면에는 심각한 불평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공부문 일자리가 대폭 축소되었고, 생활필수품에 대한 보조금 혜택 및 가격통제가 폐지되었다. 아랍권의 실업률은 세계 최고 수준인 10%를 웃돌며, 청년실업률은 무려 30%를 넘나든다. 2008년에 이어 작년 하반기부터 다시 고개를 든 물가급등은 사회 양극화의 위기를 더욱 가중시켰다. 아랍 전역에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29세 이하 청년층의 반발은 이러한 사회 현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아랍권의 베이비붐 세대격인 이들 청년층이 이제껏 경험한 정치체제는 권위주의 정권뿐이었다. 과거 같았으면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은 이슬람주의 세력으로 수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층은 이미 자유의 공간에 익숙해져 있었다. 부모 세대보다 교육의 기회가 더 많았던 청년층은 디지털 문화에 대한 접근성 또한 높았다.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린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청년층은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그들만의 의사소통 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 결과 이번 투쟁 과정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은 주도적인 역할은커녕 시위에 쫓아다니기도 바빴다. 또한 이집트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수십만의 기독교인과 무슬림교도가 함께 투쟁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놀라움이었다. 아랍권은 종교적인 영향력이 강해 세속적 성격의 대중운동이 발생하기 힘들다는 세간의 평가를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종교를 뛰어넘어 청년층이 주도한 민주화 투쟁은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대중투쟁이었다.
새로운 가능성
아랍의 민주화 투쟁은 권위주의 체제의 종식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난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시민혁명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바야흐로 21세기임에도 아랍의 독재체제에서는 시민적 권리는 고사하고 오로지 국가권력의 억압적 통제만이 난무했다. ‘현대’와 ‘전근대’의 공존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리비아에선 카다피에 의해 무려 42년간 철권통치가 행해졌고, 이집트의 경우 선거란 무바라크를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랍 전역에서 불고 있는 민주화의 봄은 과거 권력에 맞서는 싸움인 동시에 미래 투쟁을 보여주는 싸움이기도 했다. 특히 이집트에서 소셜 미디어의 위력은 대단했다. 디지털 매체로 무장한 청년층은 정권의 우민화 수단인 TV, 라디오, 신문 등을 무력화하며, 시위에서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트위터에서만 단번에 9만 명 이상이 시위 참가에 동의했고, 가상의 연대는 실물의 투쟁을 뒷받침했다. 고립감을 떨쳐낸 시위대는 국가권력의 탄압에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소셜 미디어의 활약상은 대중투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트윗과 리트윗만으로 투쟁이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트윗과 리트윗이 투쟁을 빠르게 퍼트렸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소셜 미디어와 대중투쟁의 결합은 그래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미래적인 현실이었다. 전 세계가 아랍권의 민주화 투쟁에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의 변방 아랍권 국가에서 치솟은 근대적인 시민혁명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현대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무기로 삼고 있었다.
단결과 연대로 고조된 투쟁의 활력은 과거 혁명에서 등장한 자발적인 대중투쟁기구를 다시 불러내기도 했다. 튀니지에서는 벤 알리의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민병대에 맞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일부 지역에서 주민평의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며 지금까지 접근이 금지됐던 장소들을 점거하면서 공권력을 대신해 스스로 치안유지 활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청년들은 서로 토론하고 정보를 교환하며 결정을 내리는 민주주의를 새롭게 경험했다.
아랍 곳곳에서 전면에 나선 혁명 세대의 저항은 이처럼 광범위한 파급력과 활기찬 역동성을 발휘했다. 그것은 특정한 정치 지도자의 주도나 계획 없이 폭발한 까닭에 역설적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난 수십 년 동안 대중을 통제한 독재정권에 의해 분명 곧바로 진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항거는 같은 이유로 약점 또한 드러냈다. 독재자의 축출이 시민혁명의 승리로 여겨졌지만 시민혁명이 곧바로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굽이치는 저항의 물결
튀니지와 이집트에선 벤 알리와 무바라크가 권좌에서 물러났음에도 기존의 국가기구는 파괴되지 않았다. 과도정부는 과거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장악되었고, 군대·경찰·정보기관과 같은 권력기관은 해체되지 않았다. 그동안 국가에 종속된 튀니지의 노동총연맹(UGTT)과 이집트의 노동조합연맹(ETUF)은 과도정부를 지지하고 나섰다. 장차 기득권 세력으로 편입될 것이 뻔한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야권세력들은 현 질서를 유지한 채 선거를 통한 권력획득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
미국이 안심할 정도로 낡은 체제는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투쟁의 물결까지 잠잠해진 것은 아니었다. 지난 2월27일 튀니지의 간누치가 총리직을 사임한 데 이어 3월3일엔 이집트의 샤피크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과도정부의 미적거리는 민주화 작업에 실망한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와 광장을 가득 메웠다. 통치자만 바뀌었을 뿐 국가기관의 통제와 감시, 높은 실업률, 경제적 빈곤 등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탓이다.
민주화 투쟁의 여파는 거리의 함성으로 그치지 않았다. 민주화 열기에 자극받은 공공, 민간부문의 노동자들도 저항에 동참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이며 임금인상 및 노동조건의 개선뿐 아니라 권위주의 정권의 청산을 함께 요구했다. 지난 1월30일 이집트에서는 국가와 결탁한 노동조합연맹(ETUF)에 맞서 독립노동조합연맹(EFTU)이 결성되어 민주노조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노동자 투쟁은 청년층이 주도한 저항의 물결에서 그것이 지닌 사회적 영향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벤 알리, 무바라크 정권이 시위가 격화된 지 한 달여 만에 무너졌다면, 아랍권의 다른 국가에서는 민주화 시위의 장기화를 맞고 있다. 바레인, 예멘, 시리아 등지에선 시위대에 대한 무력탄압이 자행되고 있어 아랍의 민주화 투쟁이 역류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낳고 있다. 특히 리비아에선 카다피의 대공세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자 서방세계의 군사개입까지 이뤄지고 있다. 민주화 투쟁이 내전 양상에서 국제전으로 한층 복잡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관건은 반카다피 진영에서 스스로 무장한 사람들이 투쟁의 무기를 내려놓지 않은 채 앞으로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데 있다.
아랍의 혁명 세대는 세계사적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출구를 찾는 노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론 기존의 권력이 새로운 권력으로 대체되지 못하고, 정치적 지향성의 문제도 아직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혁명 세대는 민주적 의사소통과 집단적 행동이라는 실천의 경험을 얻었다. 아랍의 민주화 투쟁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역시나 그 미래는 이들의 손에 달려 있다.
김성렬(tjdfuf@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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