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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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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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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갱소장 비디오테이프 목록 v1.0(19)
    미갱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예술은 모방을 기초로 한다.
무언가를 자꾸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창의력 또한 자연의 모방으로부터 시작한다.

상상력의 발현.
회화작품을 읽어내는건 보는 자의 몫이다.
자신의 세계안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읽어내는 것,
비평가의 몫은 오직 주관적 해독의 텍스트로 승화해내는 것이다.

영화<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는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물론 기초적 사실안에서 상상력의 살을 붙였다는 것이 더 맞겠지만 사실이기보다는 허구의 것을 사실과 교묘하게 접목시킨 내용의 결과물이다.

두가지를 느낀다.
하나는 “예술가에게 사회성은 없다”이고 두번째 17세기 여성의 삶, 그건 곧 착취의 삶이었다는 것이었다.

 

미술가에게는 후원자가 있었다.
후원자에게는 예술을 보는 안목과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내게 하는 힘을 지녔다.
후원자는 예술가의 생사여탈까지 잡고 있는 권력자이자, 아름다운 예술을 비평 할줄 아는 평론가이기도 한 것이다.
예술가에게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건 허락되기 어렵다.
우리가 아는 많은 근대 예술품들은 그 시대 후원자들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장식을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이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는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현실과 예술의 경계는 예단하기 어려운 영역임에는 틀림없다.
현대에 와서 예술품은 투자가치의 도구로 전락한 듯하다.
예술의 가치는 돈으로 매겨지면서 등급화되었다,
예술의 상업화가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호사가들에 의해 만들어졌음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겠지만 생존을 위해서 예술가들에게는 예술의 상업화란 풀어야 할 숙제인 것이다. 

 

>>베르메르.

예술가는 순수하게 예술에만 전념해야 하겠지만 그의 삶은 비겁하기만 하다.
그림을 그려 가족을 먹여 살리는 책임감 강한 가장이기도 하겠지만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할수 있는건 침묵하는 것 뿐인 비겁한 남자이기도 하다.

<진주귀고리 소녀>를 쓴 작가가 그려낸 예술가의 모습일 뿐인가?

흐흠...글쎄.... 


17세기 여성의 삶
10대후반의 곱디고운 그녀의 살결, 하지만 찌든 그릇을 세척하고, 질펀한 바닥을 긁어내고, 추운겨울 딱딱하게 얼어버린 빨래를 걷어내느라 손가락사이 때는 빠질 겨를이 없다.

육체의 젊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빛나기만 하다.
그녀의 젊음을 탐하기 위해 남자들은 젊거나 늙었거나 하나같이 정신을 못 차린다.
잠시나마의 편안한 육신을 위해서라면 후원자의 맘을 훔칠수도 있을 것이다.
잠시나마…젊은 시절 잠시 말이다.
돈많은 권력자는 새로운 젊은 육체를 탐하기 위해 혈안이 되고 1회용품으로서의 기능을 다하면 버림받는 건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예술을 보는 눈은 지녔지만 그 기술을 개발가능하지는 않다.
베르메르는 보조적 차원에서 그리트를 이용하지만 결코 자신의 예술을 전수하거나 그녀의 능력을 이끌어주려 하지는 않는다.
예술은 남자만의 것이므로…?
가족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므로 또 다른 경쟁자를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럴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여성으로서만 탐닉하기를 바랬겠지….

 

“예술과 사랑의 비밀이 누설된다”는 둥, “가을을 여는 매혹적인 로맨스” 라는 둥의 영화카피가 거슬린다.
“정신적 불륜”이라고 한마디로 규정한 지희의 말에 100%동감한다.
좀더 엄밀하게 정리하면 “비겁한 예술가의 정신적 불륜”이겠지…ㅋㅋ

베르메르의 집을 나와 조용히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의 나머지 삶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난 절대로 그 영화가 매혹적인 로맨스로만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때 아름다웠지만 자신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살이 피둥피둥 찌고 삶에 무게가 느껴지는 표정의 고깃집마누라가 되어 한평생 그냥그냥 살아갈 뿐이겠지.

내가 너무 현실적 상상력에 빠져있는 걸까?

 

또 다른 재미
회화전공자로서 또 다른 재미는 17세기 회화의 도구인 물감을 만드는 장면들, 캔버스의 모양 등이었다.
최근엔 빨리 마르면서 물에 섞어쓰나 효과는 유화의 질감을 내는 아크릴로 회화물감이 대체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인공 유화물감이 아닌 자연물에서 추출해낸 물감으로 회화작업을 하는 것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자연은 모든 칼라의 혼합체이다.

베르메르가 창밖을 가르키며 그리트에게 묻는다.

"무슨 색깔이지?"

"회색? 노랑, 파랑....구름이 저런색도 지니고 있네요.."

사물은 고유색을 지니고 있지만 빛에 의해 다양한 색깔을 띄게 된다.

인상파화가들이 빛이 많은 야외에서 그림그리기를 즐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화가들이 시행착오를 되풀이한 끝에 15세기에 이르러 반 에이크형제를 비롯한 플랑드르의 화가들에 의해 유화 기법이 체계화되었다.
반 에이크의 유화기법은 다음과 같다.

치밀한 나무결의 떡갈나무 판자를 기초재료로 하여 천연탄산칼슘을 동물성 아교(토끼 등의 皮膠)로 녹인 도료로 바탕칠을 한다. 반들반들하게 연마(硏磨)한 바탕 위에 수성 그림물감(달걀템페라)을 이용하여 가는 붓으로 정교하게 구도를 그린다. 건성유의 도막(塗膜)을 전면에 입히고 바탕을 비흡수성으로 만든다. 흰색을 섞은 고유색으로 각 색면을 칠한다. 흰색의 양을 줄이고 유색안료를 약간 많게 해서 제 2 층을 칠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투명한 그림물감의 짙음과 옅음을 바꾸면서 살을 붙여 나간다. 제작은 밝은 부분에서 어두운 부분으로 진행하고 그림물감은 불투명한 효과를 가지는 그림물감층 위에 차례로 투명도를 높인 그림물감층을 덧칠해간다. 그림물감층 전체의 두께는 밝은 부분일수록 얇고 그림자 부분은 두꺼워진다. 인물의 살결 부분에서는 엷은 분홍색이나 갈색의 투명도가 높은 그림물감층을 통해 희게 빛나는 바탕이 비쳐 보이는 효과를 이용하기 때문에 흰색 그림물감은 하이라이트로 약간만 사용한다.

영화속에서도 베르메르가 그리트에게 초벌단계의 인물유화작업과정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7세기에는 플랑드르의 P.P. 루벤스, 에스파냐의 D.R. 벨라스케스, 네덜란드의 H.R. 렘브란트 등 3사람에 의해 각각 독특한 기법이 완성되었다. 루벤스는 바탕을 희게 칠하고 수지를 섞은 아마인유를 사용한 엷은 칠 그림물감이라는 반 에이크 이후의 전통적인 플랑드르기법에 티치아노풍의 임파스토기법을 결합시켰다. 또한 항상 휘발성 정유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벨라스케스는 가볍고 재빠른 붓의 터치에 의한 임파스토 표현효과를 추구해, 18세기 F.J. 고야를 비롯하여 19세기 E. 마네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렘브란트는 이른바 보디컬러, 즉 체질(體質)을 많이 포함한 부피가 있는 그림물감을 사용하여 어두운 배경 속에서 빛을 집중해 인물이 부각되는 독특한 명암표현에 역점을 두었다. 17세기에 엷은 칠이나 두꺼운 임파스토, 투명한 글레이즈나 보디컬러 등, 유화기법상의 가능성은 모두 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바탕재료로서의 판자는 최상급 재료로 만들어야 했으므로 값이 비싸고, 큰 화면에 사용할 만한 판자를 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습도로 인해 변형될 우려가 많았다. 이에 비해 마포는 천을 잇대고 기워 크게 할 수도 있고 값이 싸며 운반하기에도 편리했다. 티치아노는 나무틀에 펼친 마포를 바탕재료로 이용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현대의 캔버스는 틀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천을 덧씌워 못 같은것으로 고정하여 습도로 인한 천의 변형을 최소하는 방법을 개발해낸다. 천중에는 습도로 인한 변형이 가장 적은 것이 마포로 대학시절 비싼 천은 돈이 없어 사용하지도 못했던 기억이 있다. 

영화는 또 하나의 예술 장르

17세기 베르메르와 동시대 화가인 렘브란트의 작품이 연상되는 영화의 한 장면.

피터 웨버 감독의 전작(프리다)에서도 그렇듯이 화면 하나하나가 한편의 회화를 보는 듯한

미장센과 촬영기법은 감독의 탁월한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 원작 <진주 귀고리 소녀>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

 

명쾌한 문체와 절제의 정서로

“베르메르와 그리트의 섹스신은 없어야 해요.” 할리우드의 악명 높은 취향에 지레 겁먹고 있던 트레이시 슈발리에(1962∼) 는, <진주 귀고리 소녀>의 영화 판권 계약 테이블에서 대뜸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원작에 담긴 절제의 정서를 이해한다고 말한 영국의 제작사 아처 스트리트 필름과 1999년 계약을 맺었다. 후일담에 의하면 슈발리에는 그리트 역에는 스칼렛 요한슨보다 훨씬 작고 마르고 눈에 띄지 않는 소녀를, 베르메르 역에는 앨런 릭맨을 상상했다고 한다. 미국 워싱턴 DC에서 자란 슈발리에는 학부를 마친 뒤 영국으로 이주했고, 1993년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영문학 창작 석사 과정을 마치고 처녀작 <버진 블루>를 1997년 출간했다. 슈발리에는 1998년 초, 19살 시절부터 방에 붙여놓았던 베르메르의 그림 안에 잠재된 무한한 이야기를 불현듯 발견했다. “베르메르가 내가 할 일을 다 해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그녀는 회고한다. <진주 귀고리 소녀>는 전세계적으로 200만부가 팔렸다. 10대 여주인공, 어두운 사랑, 가족에 대한 책임과 예술의 아우라 등이 흥미진진하게 어우러진 이 소설에서 평자들은 베르메르의 그림처럼 정확하고 명쾌한 문체와 통찰력을 높이 샀다. 슈발리에는 이후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 직후를 살아간 여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추락하는 천사>, 중세 태피스트리를 둘러싼 예술가와 여인들의 다중시점 드라마 <여인과 일각수>를 내놓았다. 현재 슈발리에는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작품을 2007년 출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보듯 트레이시 슈발리에 소설은 영화로 변환하기 좋다. 풍부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고 캐릭터와 스토리라인은 선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의 역사소설은 프로이트 이전 시대를 산 극중 인물의 배경을 고려해, 심리분석을 늘어놓는 대신 주변 환경에 대한 인물의 반응과 행동을 건조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영화에 어울린다. <진주 귀고리 소녀>는 베르메르가 모범적인 가장이었다고 확신을 갖고 추정하는 애호가와 연구자들의 큰 반발을 사기도 했는데, <타임스>에 2003년 10월 사이먼 젠킨스가 기고한 글 <베르메르, 당신은 모함당했다>가 대표적이다.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2004년 3월 베르메르 작품 36점을 모두 직접 감상해 평생의 숙원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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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

하나. 쪽팔리면 그때부터 학교생활 쫑이야.

시커먼 교복을 입은 학생들 사이로 교장의 차가 지나간다. 걸음을 멈추고 일제히 “경례!”를 외치며 젊은 시절을 보내는 1978년도 강남의 말죽거리 고등학생들…

폭력을 이길 수 있는 건 또 다른 폭력뿐.

폭력을 쓰지 않으면 쪽 팔린다. 쪽팔리면 그때부터 학창시절은 쫑난다.

말 않듣는 학생을 향해 선생님은 많은 학생들 앞에서 머리를 치며 “니들 같은 놈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되는거야!”라고 외친다.

흐흠…폭력쓰는 선생님 입에서 쏟아지는 대사치고는 너무나 아이러니 하다.

교장은 선생님의 뒤통수를 학생 뒤통수 날리듯 가볍게 내리친다.

폭력은 교육되어지는 거라는 감독의 암시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권력은 곧 폭력을 통해 쟁취된다는 암시다. 

폭력으로 교육되어진 남성들이 만들어가는 이 나라.

폭력의 역사는 남성들의 역사다.

남자들만의 학교. 그들에게 질서는 폭력으로 시작하여 폭력으로 끝난다.

잼나는 건 회사에서 남자사원들에게서 느낀건데 공적인건 물론이고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서열을 은연중에 정한다는 것이었다. 딱히 물리적 폭력을 쓴건 아니지만 그건 다분히 인간적 관계에서조차 폭력적 방법이 그들만의 소통방식인 것같아 씁쓸했다.

공유하며 소통하는 것에 익숙한 여성들의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다.

  

두울. 남성다움의 상징. 브루스 리.

쌍절권을 휘드르며 얼굴근육은 약간 오버하며 “아뵤~~”를 외치는 그는 지금보면 권상우에 비해 가슴근육도 볼품없는 약간 촌스런 남성상일 뿐이다.

하지만 그 시절 남성들을 매료시키는 캐릭터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걸까?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1대 다수와의 싸움에도 굴하지 않으며 멋진 발차기와 쌍절권을 휘두르며 나쁜놈들을 향해 강한 기압소리를 내지르는 그는 분명 70~80년대 강한 남성적 아이콘의 대표주자로 손색없다. 

남성적 강함을 드러내면서도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정의를 향한 강한 의지, 그러면서도 여성에게는 한없이 순수한 순진남.

이런 모습들은 지적이며 부드러움의 현대 남성상과는 차별점을 가지는 분명 다른 의미의 남성상이다.

공감하며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있고, 기타한곡 정도는 튕길 줄 알며, 비오는 날 자신은 비를 맞더래도 여친에게 우산을 양보할 줄 알며, 불의를 보면 폭력으로 응대하지 않고 현명하게 피해갈 줄 아는 남자…그런 남자가 난 더 좋다.

나쁜 남자가 매력적이기는 해도 관계맺기가 어렵다면 곤란하지 않을는지?

난 오래오래 남자랑 대화하고 싶다.

 >>사족

이소령의 쌍절권으로 불의를? 평정하는 권상우의 모습이 너무너무 시원해보였던건 나도 모르게 폭력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권상우가 쌍절권을 휘두르며 5~8명을 혼자서 다 무찌르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했던 속이 뻥 뚤렸다. 햐~~~ 시원했다.

남자들이 물리적 힘을 키우려는 이유가 이건가 보다.

문대성이 발차기 하나로 금메달을 손에 쥐고있을 때 그가 그렇게 남자답고 멋있어보였다면…흐흐흐흐….

 

. 70~80년대 문화

어코스틱 기타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하나정도는 튕길 수 있어야 유행에 뒤쳐지지 않을 것 같은 시절, 원나잇 티켓으로 하늘을 찌르는 디스코를 추고, 버스안내양 언니가 어렵게 어렵게 손님을 다태운뒤 “오라이~”를 위치던 그 시절…

그 시절은 그래도 낭만이 있어보인다.

왜일까?

지나간 과거는 모두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인가?

 

. 잉여인간

“대학을 가지 않으면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이 뭔지 알아. 인간 떨거지 되는거야..”

 

대학은 나왔으니 잉여인간은 면제된 듯하지만 난 여전히 잉여인간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평균인의 반대말은 곧 잉여인간인가보다.

 

다섯. 교육

“인간이 되야지.

서울대 연고대 나오면 뭐하나 고등학교 졸업해도 잘된사람 많다. 인간이 되야지…”

 

모 이런 말 하는 영화속 선생님의 대사를 신뢰할 수 없다. 그건 뉘앙스가 빈정댐때문이다.

자고로 공부잘해야 대접받고 상위 몇등안에 들어야 사람처럼 응대해주는 선생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존재하신다.

입시경쟁만으로도 모잘라 학교마다 서열을 매기자는 움직임이 보수적 교육계와 언론에서 일고 있다는데..

한국사회에서 공교육은 제역할을 하고 있는건가?

 

권상우가 마지막 학교에서 던진 말

"대학민국 학교! 다 *까라 그래!"

 

흐흠....

 

>>사족

권상우 넘 멋찌다!!

그에게는 육체에서 보여지는 강한 남성상과 쿨한 유머를 내뱉는 여유로움,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는 미소년의 남성상. 두가지 매력을 동시에 풍긴다.

물론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주는 남성적 육체와는 다른, 아담한 근육의 아름다운 선이 느껴지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같은 육체를 지녔다.

 

이미지 연구가 필요한 캐릭터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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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영화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감독:박기복

추천의 변:
나는 전사이고 싶지 않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의 독점이 유력해지면서 우리는
실업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현실을 살고,일자리를
가진자들의 심리도 언제든지 해고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불안한 고용사회, 무한경쟁이라는 미명아래 이어지는 척박한
토양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하루살이 전사인 것이다.

전투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부와 권력을,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철저하고 날카로운 부메랑이 그들의 목을 노리고 있다.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의 이탈자이다.

그들은 소외된 소수이며, 버림받은 -가족이든 타인으로부터든-
객체이다.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현실속 자신의 생활에 만족해하기도,
체념해하기도 한다.

"...점점 꿈을 잃어간다..."

정상인의 생활을 하지 않는 그들에게 삶이란 낙관적이지도,
핑크빛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그저 하루하루 끼니떼우기 바쁜
일상일 뿐이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머리속 깊숙히 박혀있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부랑인의 한마디는 내가 얼마나 이 사회에 잘 적응된
전사이고자 했는가를 인식시켜준다.

난 전사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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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ove is river



 

청춘의 반항과 아웃사이더적인 삐딱함.

그에게서 풍기는 매력이 한껏 드러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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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의 재료로 만든 기막힌 비빔밥, <화씨 9/11>

최소의 재료로 만든 기막힌 비빔밥, <화씨 9/11>

다큐멘터리 <화씨 9/11>은 어떻게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잡았나?

<화씨 9/11>은 극영화가 아니다. 마이클 무어 역시 영화감독은 아니다. <화씨 9/11>은 부시 대통령의 가계와 아랍 석유자본의 유착관계를 폭로한 다큐멘터리다. 마이클 무어의 직업도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은 사회적 표현을 업으로 하는 직업군에서 극영화 감독과 고전적인 저널리스트의 중간에 위치한다. 사실을 전달하는 점에서는 기자에 가깝지만 사실을 내러티브로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영화감독에 가깝다. 이 중간자적 위치는 얼핏 ‘사실로 이어지는 내러티브’라는 이상적인 표현양식을 다큐멘터리에 기대해도 좋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행히도 다큐멘터리는 한번도 지배적인 표현양식으로 등극한 적이 없다. 편집증적 숙련을 겨루는 현대분업사회에서 두 가지 상이한 미덕을 절충한 것은 시장경쟁에서 열성 결합으로 판정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의 부담 때문에 극영화처럼 화끈한 상상력을 펼치기 힘들며, 구성의 부담 때문에 파편적 사실을 다루는 고전적인 저널리즘에 비해서는 사실 전달의 효율이 떨어진다. 그러니 어쩌면 다큐멘터리가 표현의 자유 시장에서 배척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가능하다. 다큐멘터리가 시장에서 배척받는다는 것은 영리한 자본이 계산해본 결과 ‘영양가 없음’으로 판정났다는 것을 말한다. 대중적 소구의 결여라는 경제적 절망은 한편으로 자본의 영향에서 가장 자유롭다는 정치적 희망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요즘처럼 소수의 이익을 반영하는 자본의 힘으로 서사의 논리가 규정되는 시대에 다큐멘터리의 표현양식은 정치적 실천의 수단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될 수 있다. 문제는 생산비용은 높고 소비의 소구력은 낮은 이 표현양식을 갖고 어떻게 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정치의 재현’이라는 마케팅 혹은 선전의 방법론이 문제의 핵심이다.

<화씨 9/11>, 다큐멘터리의 정치적 실천과 상업적 소구에 대한 역할 모델

<화씨 9/11>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은 논픽션 다큐멘터리이지만 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고, 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마이클 무어라는 인물의 탁월한 재능과 전략 때문이다. 그의 전략은 저널리즘의 논리학에 영화의 수사학을 포개놓음으로써 사실의 재료 맛과 내러티브의 요리 솜씨를 잘 절충해놓는 것이다. 이 글은 <화씨 9/11>을 통해 영화와 고전적 언론이 양분하고 있는 지형에서 다큐멘터리의 정치적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까닭과 그 실천의 방법에 관한 것이다.

마이클 무어는 저널리스트이다. 그중에서도 20세기 초 미국 언론에서 두드러졌던 추문 폭로가(muckraker)와 비슷하다. 추문 폭로가는 언론이 기업화되면서 정착된 일상적 뉴스 생산 공정에서는 진실 보도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독립적으로 취재를 하던 일종의 프리랜서이다. 이들 대부분은 미국의 대자본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언론이 보도해야 할 사회적 진실을 자본의 악행에 대한 폭로로 생각했다. 하지만, 기업화된 언론 조직 안에서는 진실보도가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 까닭은, 첫째는 언론자본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폭로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고, 둘째는 날마다 안정되게 뉴스를 생산하기 위해 관공서 중심의 출입처를 주요 취재원으로 삼는 시스템에서는 진실의 폭로에 소요되는 시간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 생각한 것이 조직에서 독립해 독자적으로 취재하고 기고하는 작업 방식이었다. 하지만 한때 맹활약을 했던 추문 폭로가는 언론 조직에 흡수되거나 개인의 사생활을 공격하는 스캔들 폭로가로 변질됐다. 이들이 실패한 가장 큰 요인은 사회구조적 비리에 대한 폭로가 기회비용이 크기 때문에 생계의 수단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 언론의 뉴스 생산 시스템은 더욱 숨가쁘게 일상화됐다. 기자가 고정된 일상적 취재 업무에서 추문의 폭로를 위해 시간을 따로 할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의 매개 과정은 더 복잡해졌으며 자본이 행사하는 영향력은 은밀하고 정교해졌다. 언론이 전하는 파편적 사실로는 복잡하게 매개되는 요즘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추문 폭로가가 진정으로 필요한 시점은 요즘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이 일을 독자적으로 한단 말인가? 무수한 노력과 기술과 열정을 요구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가난과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협박일 게 분명한데.

이 위험부담을 영화라는 미디어는 덜 수 있다. 픽션으로 방어벽을 쌓으면서 어떠한 사회적 폭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픽션이라는 성격이 방어벽이 되는 대가로 폭로의 메시지조차 픽션으로 수용될 소지가 있다. ‘달라스’라는 드라마의 수용 과정을 연구한 이안 앵은 논픽션을 수용하는 관객은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는 수용 기제를 동원해 선택적으로 받아들임을 밝혔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현실 폭로는 그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아도 사실이 아니라는 전제 자체로 절반은 줄어들 공산이 크다.

또 한 가지 영화의 현실 폭로가 갖는 의미작용 과정의 문제는 배우의 육체성이 드리우는 기호학적 과잉이다. 영화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든 궁극적으로 배우라는 인물의 연기를 거친다. 그런데 배우는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라 인물 자체가 패티쉬의 대상이다. 배우는 이쁘거나 몸매가 좋거나 분위기가 있거나 차분하거나 그도 아니면 개성이 있거나, 하여간 뭔가 한가락한다. 말하자면, 강한 육체성의 기표들이다. 이들의 육체성을 매개로 어떤 역할을 맡기면 그 역할은 이들의 육체성과 연관되어서 관객에게 각인된다. 시인 열명을 모아놓고 보면 시인처럼 생긴 사람 별로 없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정말 시인처럼 안 생겼다”는 말이 흔히 쓰인다. 미디어가 제시한 시인의 상투적인 아우라를 관객이 꾸준히 받아들여서 시인의 판단 준거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디어의 상투형이 쉽사리 현실 판단의 준거로 적용되는 것은, 배우라는 우월한 육체성과 시인이라는 우수한 감수성을 하나로 상상하는 것이 욕망의 보편적 행태이기 때문이다. 곧, 사실은 별도로 존재하는 두 가지 탐나는 추구 대상을 한 대상에 존재했으면 하는 인간 욕망의 효율 추구 심리를 미디어가 시선을 잡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합은 조화가 아니라 욕망의 M&A, 즉 탐욕이다. 조화는 이질적인 것들은 이질적인 대로 공존하는 상태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합병을 통해 도드라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수한 자질이 아니라 화면 가득 전시되는 배우의 강한 육체성이다. 그래서 미디어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생산하는 것은 강한 육체성을 갈망하는 결여이다. 이 결여는 욕망의 대상을 강한 육체성으로 고착시키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육체성에 널리 퍼져 있는 인간정신에 대한 통찰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하나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영화미디어의 표현양식은 무수한 소통의 장애물을 대팻밥으로 남긴다.

이 기호학적 과잉의 성격을 규정하는 ‘강한 육체성’은 그 자체가 남루한 육체성에 대한 계급적 차별을 강화하는 일종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상업영화에서 배우의 사용은 재현의 방법론이 정치적으로 타당한가라는 문제, ‘재현의 정치’와 늘 맞닥뜨린다. 이런 점에서 추문 폭로가가 추구한 사회고발을 매끈한 상업영화가 감행했다면, ‘정치의 재현’은 충실하지만 ‘재현의 정치’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최소의 재료로 극대의 효과를 끌어내는 무어식 다큐멘터리

마이클 무어는 이 모든 문제를 적당히 피하고 섞어서 최소한의 재료로 기막힌 비빔밥을 만들어냈다. <화씨 9.11>은 부시 대통령과 중동 석유자본의 유착 관계를 그리면서 애꿎게 희생되는 미국의 가난하고 못배운 젊은이들을 희생자로 내세우면서 그 인과관계를 강조한다. 이 점은 추문 폭로가들이 추구한 ‘자본의 구조적 악행에 대한 고발’에 충실한 설정이다. 그는 이 험난한 폭로를 극영화로 꾸미지 않고 직설적인 사실로 말한다. 그가 과거의 추문 폭로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영상의 가능성을 백프로 활용했다는 것.

그는 영상의 시장 잠재력과 관객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다큐멘터리가 요구하는 사항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시장에서 다큐멘터리가 극영화처럼 유통될 만한 흥미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부시에 대한 공격처럼 센세이셔널한 소재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소재는 취재가 어렵다. 그는 부시 관련 대목의 상당 부분을 기존의 다양한 미디어가 취재한 영상 자료를 기발한 풍자적 해설로 재구성하는 식으로 취재의 부담을 던다. 영상매체가 화면과 내레이션의 결합으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점에 착안해 묵은 자료로 아주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마디로 <화씨 9.11>은 추문 폭로가의 이상을 저널리즘의 상업뉴스 감각과 영상의 수사학을 통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실현했다.

이런 스타일의 다큐멘터리에 대해서는 두 가지 비판을 할 수 있다. 첫째는 부시라는 저명한 인물을 가지고 독자의 시선을 잡으려는 환유의 전략, 혹은 선정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또 하나는 영상 자료의 재편집과 나레이션의 결합 관계에 나타나는 과도한 주관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비판은 저널리즘 행위가 객관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엘리트적 믿음에 근거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저널리즘 행위는 궁극적으로는 사실 확인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을 인정한다면 무어의 수사학은 자신의 의견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무구한 효율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나는 고전적인 언론의 객관주의와 다큐멘터리의 미학을 근거로 무어의 수사학을 비판하는 그 지점에 역설적으로 다큐멘터리가 정치적 실천의 전략으로 삼을 만한 아이디어가 있다고 본다. 무어는 취재의 노고를 줄이면서 영상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충족시키는, 정치적 실천의 도구로 유용한 다큐멘터리 미학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한국의 사회고발 다큐멘터리는 가해자에 대한 폭로보다 피해자에 대한 휴머니즘적 접근을 선호한다. 이건 한국인이 무어보다 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공격이 훨씬 명징한 논리적 근거를 필요로 하고, 그러려면 취재가 몇 배나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적 실천의 효과는 가해자에 대한 공격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무어적 수사학을 구사하는 공격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이 진정으로 많이 나와야 할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 아닌가 싶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 commat@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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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갱소장 비디오테이프 목록 v1.0

<극영화>
1. 2019 블레이드 러너
2. 4월 이야기
3. 400번의 구타
4. 8월의 크리스마스
5. 가위손
6. 간장선생
7. 거미여인의 키스
8. 결혼피로연
9. 고양이와 개의 진실
10. 굿 윌 헌팅
11. 길버트 그레이프
12. 그녀를 보기만해도 알 수 있는 것
13.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14. 내 책상 위의 천사
15. 네 멋대로 해라
16.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17. 노마진 앤 마릴린
18. 뉴욕 스토리
19. 데드맨
20. 도플갱어
21. 동사서독
22.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23. 디바
24. 러브레터
25. 런어웨이 브라이드
26. 레드
27. 레옹
28. 리버 피닉스의 콜 잇 러브
29. 리버 피닉스 KGB의 아들
30. 리플리
31. 매트릭스1, 2(리로디드)
32. 메멘토
33. 메이드 인 홍콩
34. 미나
35. 미션 투 마스
36.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37.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38. 볼륨을 높여라
39. 부에나비스타 쇼셜클럽
40. 블루
41. 비디오 드롬
42. 비정성시 (상하)
43. 비포 더 레인
44. 비포 선라이즈
45. 브리짓 존스의 일기
46. 섹스 거짓말 비디오 테이프
47. 쎄븐
48. 스네이크 아이
49. 스니커즈
50. 스모크
51. 슬레이어
52. 식스센스
53. 슬리피 할로우
54. 아름다운 청춘
55. 아메리칸 뷰티
56. 아비정전
57. 아이다호
58. 아이즈 와이드 샷
59. 알파빌
60. 야곱의 사다리
61.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62. 에어리언 2, 3
63. 와호장룡
64. 완령옥 (상하)
65. 올란도
66. 저수지의 개들
67. 전망 좋은 방
68. 정글피버
69. 존 말코비치되기
70. 좋은 친구들 (상하)
71.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72. 죽은 시인의 사회 (상하)
73. 중경삼림
74. 쥴 앤 짐
75. 증오
76. 첨밀밀
77. 카케무사 (상하)
78. 크라잉게임
79. 크레쉬
80. 택시 드라이버
81. 텔마와 루이스
82. 트레인스포팅
83. 파고
84. 파니핑크
85. 파인딩 포레스트
86. 퍼펙트 월드
87. 펄프픽션
88. 피아니스트를 쏴라
89. 프랑스여인
90. 플레이어
91. 하얀궁전
92. 한나와 그 자매들
93. 화양연화
94. 화이트스콜
95.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96. 해피 투게더
97. 허공에의 질주
98.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99. X파일(극장판)
100. 반지의 제왕1,2
101. 바닐라 스카이
102. 폴락
103. 쉘위댄스
104. 아이다호(무삭제판)
105. 인사이더1,2
106. 도그빌


<애니메이션>
1. 에반게리온
2. 토이스토리 2
3. 나무를 심은 사람
4. 웰레스와 그로밋
5. 프리데릭 벡 베스트 콜렉션
6. 호빵맨 (상하)


<다큐멘터리>
1. 호주제 폐지 (평등가족으로 가는 길)
2. 낙선
3. 나는 행복하다
4. 동강은 흐른다
5. 꼭 한걸음씩
6. 한사람
7. 친구
8. 인간의 시간_미술:강미경
9. 4월9일_미술:강미경
10. 해고자
11. 세발까마귀
12. 또 하나의 세상
13. 기차길 옆 공부방
14. 보이지 않는 창살
15.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16. 명멸하는 불빛
17. 떠나는 농민들, 아기낙타
18. 22일간의 고백
19. 상계동 올림픽
20. 일어서는 사람들
21. 송환
22.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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