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권력을 견제하고 있는가
정치의 위기도 깊다.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는 제도에 그치지 않는다. 권력을 감시하고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 권력기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제도적 형식이 존재한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이 자신에게 유리한 목소리만 듣고 비판을 불편해하며 시민을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민주주의의 내면은 빈약해진다.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권력 자체보다 권력이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누구든 권력을 가지면 실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할 수 있는가이다. 대통령도, 국회도, 정당도, 지방정부도 시민의 비판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정당 역시 선거 때만 시민을 찾는 조직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민의 삶을 듣고 정책으로 응답하며 내부의 잘못을 스스로 고칠 수 있어야 한다. 정당이 권력을 얻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순간 시민은 수단이 되고 정치는 권력 획득의 기술로 전락한다.
언론의 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민주사회에서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고 시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조회수와 구독자, 광고와 정치적 영향력이 중요한 기준이 되면서 자극적인 갈등과 분노가 뉴스의 중심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회가 양극화될수록 언론은 더 차분하고 깊어져야 한다.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고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걸러내며 권력자와 시민 모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언론이 진영의 확성기가 되는 순간 시민은 사실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게 된다.
적대와 고립을 넘어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또 하나의 심각한 위기는 혐오와 적대의 확산이다. 세대와 성별, 지역과 계층, 정치적 성향에 따라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언어가 넘쳐난다. 상대방의 말을 듣기 전에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먼저 확인한다. 민주주의에서 의견의 차이는 자연스럽다. 문제는 차이를 적대감으로 바꾸는 것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틀린 사람으로 규정하고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는 토론의 공간을 잃는다.
공동체의 해체도 심각하다. 도시화와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람들은 연결되어 있지만 외롭다. 수많은 사람과 온라인으로 접촉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사람은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고독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공동체가 약해질수록 고독은 사회적 문제가 된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돌봄이 가족에게만 맡겨져서도 안 되고 시장의 상품으로만 취급되어서도 안 된다. 국가와 지역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돌봄의 구조가 필요하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폭염과 집중호우, 산불과 가뭄, 생태계의 변화는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왔다. 그런데도 경제성장을 이유로 자연을 무한히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강하다. 자연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다. 강을 콘크리트로 덮고 산을 깎고 숲을 없애면서 그 결과가 인간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생태계가 무너지면 결국 인간의 삶도 무너진다.
성장의 방향과 국가의 책임을 다시 묻다
성장의 개념도 다시 물어야 한다. 국내총생산이 증가하고 건물이 높아지고 소비가 늘어난다고 해서 인간의 삶이 반드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지, 아이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성장하는지, 노인들이 얼마나 존엄하게 늙어가는지, 노동자가 얼마나 인간답게 일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종교 역시 이 위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종교가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조직과 재산, 권위와 영향력을 지키는 데 몰두한다면 존재 이유를 잃게 된다. 교회와 사찰을 비롯한 종교 공동체가 사회의 약자와 고통받는 사람들의 곁에 서지 못한다면 신앙의 언어는 공허해진다. 종교의 본래 자리는 권력의 곁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의 곁이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 해고된 노동자, 차별받는 사람, 돌봄에서 소외된 사람, 전쟁과 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종교의 사회적 책임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위기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첫째, 사람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경제성장이나 정당의 승리, 정부의 성과보다 인간의 존엄을 우선해야 한다.
둘째,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결과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출발선이 지나치게 벌어지지 않도록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민주주의를 생활 속으로 확장해야 한다. 선거 때 투표하는 것만 민주주의가 아니다. 직장과 학교, 지역사회와 가정에서도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권력을 견제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넷째, 경쟁보다 협력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경쟁이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지만 경쟁만으로 사회를 운영할 수는 없다. 인간의 삶에는 돌봄과 연대, 신뢰와 배려가 필요하다.
다섯째, 자연을 성장의 희생물로 삼지 말아야 한다. 기후위기 시대의 경제는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경제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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