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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과 정호승. 그리고 진보와 지적활동. 그리고 소박성

 

정호승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의 천안함 침몰에 대한 특별기고를 읽으면서 파시즘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정호승의 파쇼발언은 엉뚱한 사고가 아니라 그의 시에서 나타난 사상 그리고 이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

정호승의 시 한편으로 그의 세계관을 촘촘히 엮어내어 그것을 그의 파쇼발언으로까지 몰아가는 것은 어쩌면 억지로 보일 수도 있겠다. 

논자 자신도 현단계에서는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즉 정호승의 시를 사유하고, 사유된 사상을 만인이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게 이념으로 다듬어 논 수준에 와 있지 않다. 그래서 이하의 글은 정호승과 그의 시를 사유하는 과정에서의 중간보고라는 성격을 갖는다고 전제하고 말문을 열어본다.

우선 정호승의 시인으로서의 성실성을 살펴보자.  <작가세계> 2009년 가을호에서 '나는 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오마이뉴스에서 인용)이라는 데서 정호승은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따르고 있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럼 소크라테스가 한 행위에서 소크라테스의 자세란 어떤 것이지 한번 살펴보자. 플라톤의 대화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관심을 갖는 것은 순수한 학문도 아니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기술적인 지식도 아니다. 여기까지는 정호승도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소크라테스가 진정 관심을 가졌던 부분, 즉 자기자신을 명확하게 알아보는 것은 멀리하고 있다. 소박해서 그런지 아니면 지적활동을 하기 싫어서 그런지, 아니면 정호승의 소박이 바로 지적활동을 거부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자기자신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요구한 것은 반드시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면서 (logon dounai kai dexasthai/플라톤, 국가 제7권, 531e) 자기 말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호승의 특별기고는 그가 소크라테스 정신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시인이고 소크라테스적인 정신의 저편에 서있는 시인임을 보여준다.

<경향>과의 인터뷰나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정호승은 ‘알기 쉬운 말로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 같다. 소박한 백합꽃과 같은 인상을 주는 시인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소박성에는 거짓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소박성은 아마 앙겔루스 실레지우스의 장미일 것이다.

“장미는 <왜>라는 질문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다. 꽃을 피워도 다른 이유없이 꽃을 피운다. 장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누군가가 자기를 보나 걱정하지 않는다.”(Die Rose ist ohne Warum./Sie blühet, weil sie blühet./Sie achtet nicht ihrer selbst,/fragt nicht, ob man sie siehet.)

그러나 정호승의 소박성은 이런 소박성이 아니다. 누군가가 봐주기를 원하는 소박성이다. 아니 이런 소박성을 알아보는 “나”가 시의 중심에 서있다. 그래서 정호승의 시는 소박하지 않고 추상적인 자기 안으로 반성해 들어간 낭만주의적 운동의 산물이다. 마치 베르테르가 동생들에게 빵 썰어주는 로테를 바라보면서 복잡한 세상은 멀리하고 자신에 도취되는 행위의 산물이다.

진보가 지향하는 소박성이 이런 것일까? 진보가 지향하는 소박성은 구체적인 결핍과 요구가 그대로 관철되는 것이다. 모든 해방이 이루어진 상황에서만 가능한 소박성이다. 이것을 베르톨드 브레히트는 이렇게 노래한다.

 

행복한 사건

 

아이가 달려온다.

엄마, 앞치마 묶어줘!

앞치마가 묶여진다.

 

Glücklicher Vorgang

 

Das Kind kommt gelaufen

Mutter, binde mir die Schürze!

Die Schürze wird gebun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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