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층의 악당>을 볼 예정이신 분은
이 글이 영화적 재미 & 깊이를 반감시킬 수 있으니 보신 후에 읽어주세요...^^
일단 저는 이 영화에 대만족입니다.
영화 <이층의 악당>을 봤다.
단순히 코메디 영화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역시 한석규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영화의 기본적인 서사는
엄청 비싼 도자기(찻잔)가 숨겨진 김혜수의 집에
유물을 비싼 값에 밀거래하는 한석규가
그 도자기(찻잔)를 찾기 위해 소설가로 가장하여 세를 들면서 벌이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이 스토리만으로도 충분히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달콤, 살벌한 여인>들의 최강희처럼 웃음을 가장한 근심, 걱정이 있었다.
우리에게 달콤한 재미를 던져 주지만 사실 그 안에는 씁쓸한 근심과 걱정과 고민이 들어 있던 것이다.
극중 인물들은 모두 각자만의 고민을 가지고 있다.
밀거래꾼에서 벗어나고 싶은 한석규,
아버지의 비자금을 날려버린 재벌 2세,
키가 작아 무시 당하는 송실장,
아직은 젊다고 생각하지만 할머니 취급을 당하는 옆집 부인,
예쁜 얼굴이 너무나도 필요한 김혜수의 딸과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싶은 김혜수까지...
영화 중간중간 이들의 고민이 얼핏얼핏 드러난다.
자신의 입으로, 혹은 상대의 모욕적인 언사로 말이다.
그리하여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해결해보려 하지만
그 고민은 끝까지 풀어지지 않는다.
찻잔을 차지하려 아무리 애를 써도,
조폭을 동원해 패고 훔치고 쫓아도,
키높이 구두를 신고 유치원 앞에서 키를 재어봐도,
야시시한 속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포즈를 잡아봐도,
그렇게 원하던 성형 수술을 받아도,
마지막으로 우울증을 벗어나려해도...
영화의 후반부 김혜수와 한석규의 고민이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한석규는 찻잔을 판 돈을 받게 될 것이고, 김혜수는 우울증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들의 고민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다만 다른 형태로 서로에게 전이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둘은 다시 같이 살게 된다.
결국 고민이 돌고도는 셈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근심, 걱정, 고민이 있다.
다들 그것을 해결하려고 해보지만 사실 그것들은
속시원히 없어지지 않고 매번 모습을 달리하며 우리 주위를 맴돈다.
멀리 쫓아내고 싶지만 늘 우리의 이층에 머물고 있는 악당처럼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라 말하는 한석규에게
김혜수의 딸은 인생은 다 그런거라며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라 답한다.
그렇다.
그렇게 우리는 고민을 안고, 근심을 지고, 걱정을 품고 사는 것이다.
(굉장히 인상 깊은 장면이었는데, 그 딸이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손아람의 <소수의견>을 읽었다.
오랫만에 접하는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인터넷의 책소개를 보고 구입해 놓고서는 한동안 표지만 쳐다봤다.
법정재판을 다룬 내용이었기에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큰맘 먹고 집어 들었다. 마치 원양어선에 타는 선원이 기분이 들었다.
막상 첫 파도를 넘기고 보니 원양어선이 아니라 롤러코스터였다.
사람 마음을 들고 놓는 아찔한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스토리 속에 감춰진 작가의 칼날이
놀이동산의 플라스틱 장난감 같이 무디고 가볍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진실'에 대한 작가의 '소수의견'은 매우 묵직했다.
내용 중에 의미 있던 구절을 적어본다.
<그때는 대한민국의 수만 개 법규 중 단 하나도 땅에 누운 자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시대가 바뀐 거예요. 이제 소수의견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가 된 겁니다.>
<소수의견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 달이 해가 되는 때. 늙은 나무의 그늘로부터 새싹이 돋아나는 때.>
<국가는...실체가 없는 적이요. 적의 이미지만 있고 실체는 없을 때 증오는 발산되기 마련이지.>
<시간은 논리를 뒤엎는 위력이 있다.>
<이들은 단지 한 세기 전의 사고방식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의 지지정당이 자신들의 이권을 대볂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판단할 능력도 안 되는 사람들.
자기 아들이, 또 자기 손자가 희생되지 않는 한 현존하는 세계의 실제 모습을 회의해 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을 사람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들 역시 피해자였다.>
<그 고민은 길 위에 있지 않았다. 길에 접어든 순간부터 갈 길을 정해져 있었다.>
<정의의 진짜 적은 불의가 아니라 무지와 무능이다.>
요즘 내 생활을 보면 창조는 제로에 가깝고 소비만 가득하다.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쓸데도 없는 스마트폰 정보나 모으고 있거나,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유머들만 뒤적거리고 있다.
반면에 창조적 활동은 수업 준비가 유일하다. (다행히 밥값은 하고 있다.)
그밖의 활동 즉, 사진찍기, 글쓰기, 노래하기 등은 거의 없다.
창조는 쉼에서 나온다는 지론을 가진 나이지만,
쉬어도 너무 쉬었다.
이렇게 계속 쉬다가는(rest) 정말로 쉬어(rot) 버리겠다.
지난 주일부터 어제까지 마음상태가 흑색에 가까웠다.
흥이 나질 않고 만사가 짜증났다.
너무 쉬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못 쉬어서 그런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새로움을 빚어내는 일 없이 '여기'와 '지금'을 낭비해서 생긴 병인 듯하다.
어제는 거의 일주일만에 수영을 했고, 오늘은 촉촉해진 천변을 한 시간 넘게 거닐었다.
움직이고 나니 몸도 많이 좋아졌다.
움직이면서 발산적 사고를 하고 나니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다시 행동하고, 다시 꿈꿔야겠다.
한겨레 신문 <이달의 사진> 당선
2010년 9월 16일
기사 링크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0073.html
http://photovil.hani.co.kr/board/view.html?board_id=pv_study2&uid=297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