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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04
    못 생긴 건 누구의 죄냐! (5)
    곰탱이
  2. 2009/02/03
    그냥 좋아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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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9/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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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9/01/07
    벨 훅스, [계급에 대하여 말하지 않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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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9/01/04
    유물론적 페미니즘(08년 여이연여름강좌) 3-2.
    곰탱이

오늘..시를 읽는 여유...

몇 년만에 시집 한 권을 편안하게 읽었다...

나의 아이들에게는 항상 여유를 가지고 생활하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여유 하나 가지지 못하고,

늘 조급하고 안달하는 마음으로 살았는지도 모른다.

시 한편 제대로 읽을 만한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햇살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산보도 못나가고(안 나가는 건지 못나가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

감옥 독방 같은 곳에 처박혀서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잠시 책을 들추어보면 벌써 도서관이 끝났다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러면서 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 불안함이 늘 유령처럼 주의를 배회했다.

아마도 야구 심판을 하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물론 심판 보는 게 재미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뭘 잘 모르는 생초짜 심판이 겪는 마음 고생이 크지 않을까 한다).

야구 심판을 하면서 내가 엄청나게 소심하고 겁이 많은 인간인 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성격이 초조함과 불안을 더 부채질했을 것이다.

 

어제 야구 심판을 보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심판 보는 일에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왜 여기에다 목을 매야 할까...

지금까지 해 오던 일에 목을 매지 않기 위해서 택했던 일이 야구 심판이었는데 말이다^^...

적당히 들락날락하면서 살아야지 싶었다.

 

그래서 수업 끝나고 오후 내내 시집을 읽었다.

이시영 시집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도서관 열람실에 내려가서 눈에 띄던 시집이 바로 이 시집이었다.

역시 마음에 드는 시인이다.

시인에게 고맙다.

 

읽은 시 중에 한 편을 적어본다.

 

<풀꾼>

 

어렸을 적 방아다리에 꼴 베러 나갔다가 꼴은 못 베고

손가락만 베어 선혈이 뚝뚝 듣는 왼손 검지손가락을 콩

잎으로 감싸쥐고 뛰어오는데 아버지처럼 젊은 들이 우렁

우렁한 목소리로 다가서며 말했다. "괜찮다 아가 우지 마

라! 괜찮다 아가 우지 마라!" 그 뒤로 나는 들에서 제일

훌륭한 풀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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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심판 일지 5.

# 2011. 4. 3. 일요일 #

 

- 강동 광나루 경기장 (총5게임 : 08 : 00 ~ 18 : 30) (날씨 맑음)

* 제1경기 (에이티원 : 풀베이스 - 박순우 심판)

* 제2경기 (풀베이스 : 암사 엔젤스 - 이재유 심판)

* 제3경기 (로만 헌터스 : 에프원F1 - 박순우 심판)

* 제4경기 (에프원F1 : 강동 고인돌 - 이재유 심판)

* 제5경기 (클럽 와이엔지 : 애니 히트 - 박순우 심판)

 

- 5게임 모두 1심제 경기였다.

 

- 업스트럭션 상황

경기 도중 주자 2루 상황에서 중견수 쪽 외야 안타가 나왔고, 이때 2루 주자가 3루로 달려가고 있었다. 수비 측은 3루로 달려가고 있는 주자를 잡기 위해 3루로 공을 던졌는데, 그 공을 3루수가 잡지 못해 빠져 버렸다. 이때 3루수는 그 공을 잡기 위해 다이빙 케치를 했지만 공이 빠졌고 2루 주자가 3루를 돌아 홈으로 달려가는 길목에 넘어져 있던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3루를 돌아 홈으로 달려가던 주자의 진로를 부득이하게 3루수가 방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업스트럭션 A항을 판정하였고 주자를 홈으로 진루시켜 득점하도록 하였다.

 

- 스트라이크, 볼 판정 상황

투수는 사이드 암 스타일의 투수였는데, 이 투수가 투수판의 왼쪽 끝(투수의 입장에서 볼 때)을 물고 던지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투수의 공이 전반적으로 왼쪽(투수의 입장에서 볼 때)으로 빠져 나가는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포수 역시 자꾸 조금씩 왼쪽(투수의 입장에서 볼 때)으로 옮겨 앉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꾸 포수가 왼쪽으로 옮겨 앉게 될 경우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이 별로 없는 상황인데도 포수는 계속 스트라이크를 잡아주지 않는다는 불만을 제기하였다. 물론 포수가 홈플레이트 정 중앙에 앉아서 포구했을 경우에는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수 있는 경우이지만 홈플레이트 왼쪽으로 옮겨 앉게 되면 볼 판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게임이 끝난 후 왜 스트라이크가 될 수 없는지를 포수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때서야 포수가 이해하면서 수긍하였다.

 

- 경기장 사정

경기장 그라운드 상태는 별로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경기장에는 리그를 운영하는 운영자가 아무도 없었다. 심판이 모든 상황을 체크하고 운영해야만 하는 운영자의 역할도 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보니 경기 외적인 모든 문제 상황도 심판이 감당해야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이것이 또한 역으로 경기의 상황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그래서 심판이 자꾸 바뀌게 되면 경기장 상황을 잘 모르게 되어 많음 문제가 발생할 위험이 아주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판 구성진이 자주 바뀌는 것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심판 구성진은 어느 정도 고정적으로 배치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얼굴을 자주 보고 그리하여 각 팀의 감독 및 선수들과 소통에 불편함이 없게 된다면 경기 운영이 훨씬 더 매끄럽게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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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심판 일지 4.

# 2011. 3. 27. 일요일 #

- 부천 복사골 경기장 (총5게임 : 07 : 00 ~ 19 : 00) (날씨 구름 많고 바람 불어 쌀쌀했음)

- 5번째 게임 심판(루심) 투입 (야구팀 - 스카이 : 다드패밀리)

(참고로 1째 게임은 다크 드래곤 : 트위스터 ; 2째 게임은 메이저 야구단 : 브라더스 ; 3째 게임은 시나브로 : 한국가스공사) ; 4째 게임은 야만인 : 동부세미콘스)

 

- 심판 내용 평가 1 (본인)

* 내야를 살짝 벗어난 플라이 타구를 내야수가 잡았을 때 아웃 시그널을 하였다. 플라이 타구를 내야수가 처리할 경우 주심이 아웃 시그널을 한다는 것을 깜빡하였다.

* 너무 긴장한 탓인지 주심께서 계속 인필드 플라이 사인을 보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사인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 1루를 넘어서는 파울 타구가 나왔는데, 루심인 내가 파울 타구를 주으려고 했다. 빨리 파울 타구를 처리해서 게임을 진행하려는 생각에 그랬던 것인데, 아무래도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 그래서인지 명확한 오심 판정이 나왔다. 3루 쪽에 평범한 내야 땅볼로 1루 쪽에 송구가 들어왔는데, 타이밍 상으로는 명확한 아웃이었다. 그런데 1루수의 발이 1루에서 떨어졌고 1루수가 타자주자를 태그 아웃시키려는 상황이 나왔다. 상황을 끝까지 주시하다가 이거 분명히 세입이다 생각하고 판정을 내리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아웃 시그널과 함께 콜을 해버렸다. 주심께서 잘 마무리하셔서 큰 탈없이 넘어갔지만, 순간적인 정신 놓음이 너무 큰 문제를 발생시켰다. 아주 큰 경험을 했다. 주심을 보신 심판님께 감사드린다.

 

- 심판 내용 평가 2.

* 투수가 와인드업 동작을 취할 때 한순간 멈추었다가 투구를 한다. 그게 변함없이 이루어지면 상관없는데, 어느 순간 바뀌거나 섞어 쓰는 동작을 하게 되면 경고를 주거나 보크를 선언해야 한다.

* 주자 1, 3루일 경우 투수가 3루 견제하려다 다시 1루로 견제하기 위해 송구하는 과정에서 계속 보크 상황이 나왔다. 즉 셑업 자세에서는 멈춤 동작이 없이 투구를 하는데, 1, 3루에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와인드업 동작을 취하면서 정지 동작을 하였다. 이때는 투구를 해야 하는데, 견제 송구를 하였다. 이 송구 동작이 나온 자체가 보크라는 것이다.

* 주자 1, 3루일 경우 루심의 위치는 견제, 피처 보크를 잘볼 수 있는 위치에 서야 한다. 결국 2루수 쪽에 서든 유격수 쪽에 서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 무사 또는 1사에 1루 주자가 있을 때 제3스트라이크가 선언된 투구를 포수가 잡지 못하였을 때는 낫 아웃 상태가 아니라 타자 아웃의 상태이다. 그런데도 타자 낫 아웃 상태인 줄 알고 열심히 1루로 뛰었지만, 이미 주심이 아웃을 선언한 상태였다.

* 교체가 발표되지 않은 선수가 타석에 들어와 이미 타격을 끝냈는데, 상대 편에서 이에 대한 어필이 들어왔다. 이때는 이미 발표되지 않은 선수에 대해 플레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규 플레이로 인정되어 계속 경기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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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심판 일지 3

# 2011. 3. 26. 토요일 #

- 파주 야구파크 리그 구장 (총4게임 : 08 : 00 ~ 16 : 00) (날씨 맑음)

- 3번째 게임 1~2회 2이닝 심판(루심) 투입 (야구팀 - S-lines : 허스키스)

(참고로 1째 게임은 제일 블루삭스 : ABK english ; 2째 게임은 건일 자이언츠 : GPS ; 4째 게임은 The 가야지 : 야구지기)

 

- 심판 내용 평가 1 (본인)

* 콜업 소리와 외야 타구의 아웃 시그널이 좀 빠르다.

* 2루 주자의 3루 도루와 3루 주자에 대한 투수 견제 시 좀 더 좋은 시각을 확보하기 위하여 좀 더 워킹 영역 안쪽으로 움직여서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

 

- 심판 내용 평가 2

* 루심은 투수 셑업 동작과 상관없이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좋다.

* 투수판 뒤의 워킹 영역으로 움직여서 전체 경기 흐름을 파악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 심판 내용 평가 3

* 주자가 2, 3루 사이에서 런다운에 걸려서 다시 2루로 돌아갈 때, 2루 쪽으로 자꾸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태그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각을 확보하기 위한 위치를 잡아야 한다.

 

- 심판 내용 평가 4

* 주자가 3루에서 오버 슬라이딩하면서 뒹구는 것을 3루 코치가 손으로 잡아주었다. 이때 주자 아웃을 시켜야 했는데 주자 아웃을 시키지 않았다.

* 루심이 내야에 위치해 있을 때 외야 안타가 났을 경우, 주자의 촉루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데 잘 파악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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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심판 일지 2

# 2011. 3. 12. 토요일 #

- 파주 야구파크 리그 구장 (총 3게임 : 10 : 00 ~ 16 : 00시)

- 3번째 게임 1회 1이닝 심판(루심) 투입 (야구팀 - 시그네틱스 : ABK)

(참고로 1째 게임은 GPS : 제일 블루삭스 ; 2째 게임은 S-Lines : 건일 자이언츠)

- 경기장 특성

* 논밭에 새로 지어진 경기장이라고 하는데, 일단 기초 공사만 되어 있어서 구장 사정이 별로 좋지 못한 듯하다.

* 특히 운동장 바로 주변이 상당히 질었다. 그러다가 정오, 오후가 되면서 땅이 다소 마르기 시작했다.

* 운동장에 잔잔한 돌들이 많고 땅이 잘 고르지 않아서 땅이 마르면 불규칙 바운드가 잘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심판 내용 평가 1 (본인)

* 가끔 공을 등져서 공을 시선에서 놓쳤다.

* 3월 6일 때보다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인디게이터 쪽으로 시선이 분산되고 있다.

* 주자 2루시 주자와의 거리가 짧게 위치한다. 좀 더 주자와의 간격을 벌리면 좋겠다.

* 1루 주자만 있고 그 주자가 2루로 도루하는 것을 판정하기 위해 2루 쪽으로 몸을 돌리는 방향이 공이 날아오는 오는 것을 볼 수 있는 방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방향 쪽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날아오는 공을 주시하면서 몸을 돌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 심판 내용 평가 2(다른 심판들 ; 1째 경기로부터 투입되는 순으로 정리, 사람이 다를 때마다 한 줄을 떼도록 하겠다)

* 주심의 인필드플라이 신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다.

* 루상에 주자가 없을 경우 (주심이 바라볼 때) 중견수와 좌익수 사이의 외야 플라이 판정은 주심 판정인데, 루심이 판정했다.

* 루상에 주자가 없을 경우 외야 플라이가 센터 쪽에 떨어졌는데, 주심 판정 영역인지 루심 판정 영역인지가 애매할 경우에는 주심을 살짝 바라보면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 센터로 빠지는 타구일 때 루심이 투수판 뒤쪽의 워킹 영역으로 들어와서 모든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데, 타구를 쫓아나가는 경향이 가끔 있다.

* 주심이 파울 선언할 때 루심도 뒤쫓아서 파울 모션만 취해 주면 좋을 듯한데, 가만히 서 있는 것 같다(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 나처럼 자꾸 인디게이터에 신경 써서 보느라 경기 상황과 흐름을 놓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들었다. 주심을 항상 주시하는 습관을 기르면 좋겠다.

* 투수가 1루 주자를 견제하기 위해 1루로 견제구를 던질 때, 적정한 1루 판정을 위해서 태그 위치를 잘 볼 수 있는 각도를 잡음과 동시에 가까이서 잘 볼 수 있도록 1루 쪽으로 두세 걸음 전진해 가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 센터 쪽으로 안타가 났을 때 공만 보고 주자의 상황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워킹 영역으로 들어와서 전체 상황을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 (2루 주자만 있을 경우) 2루 주자가 3루로 도루할 때 정확한 판정을 위해서 잘 볼 수 있는 각도를 만들 수 있는 3루 쪽으로 몇 발짝 전진 이동해야 하는데 제자리에 서서 아웃 판정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 계속 오른 손으로 모자를 만지는데, 이 동작이 아웃 판정 동작과 비슷해서 오해를 살 여지가 있어 보였다.

* 인디게이터를 계속 만지고 보고 있는 것 같았다.

* 주자가 처음 나갔을 때 잡았던 루심의 위치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의 방향과 주자의 상왕에 따라 적절하게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모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투수판 뒤쪽의 워킹 영역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 (마찬가지로) 투수가 1루 주자를 견제하기 위해 1루로 견제구를 던질 때, 적정한 1루 판정을 위해서 태그 위치를 잘 볼 수 있는 각도를 잡음과 동시에 가까이서 잘 볼 수 있도록 1루 쪽으로 두세 걸음 전진해 가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 내야 플라이 때 아웃 판정은 주심이 하는 것인데, 루심이 하였다.

 

* (마찬가지로) 주심이 파울 선언할 때 루심도 뒤쫓아서 파울 모션만 취해 주면 좋을 듯한데, 가만히 서 있는 것 같다(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 1루 주자 도루 시 판정을 잘 할 수 있게끔 각이 잘 나오는 쪽으로 활발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 주자 1, 3루에서 내야 땅볼이 나왔을 때 3루 주자를 신경 쓰다가 1루 주자와 타자 주자를 놓칠 뻔한 것처럼 보였다.

* 주자 2루 상황에서 2,3루 사이의 안타가 나왔을 때 2루 주자의 3루 진루에만 신경 쓴 나머지 타자주자의 1루 공과를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 너무 긴장한 탓에 투수가 셑업하기 전까지는 편하게 서 있다가 셑업할 때 룩 자세(look 자세 ; 루에서 공과 주자의 상황을 주시하는 준비 자세)를 취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 주자가 있을 경우 타구가 나올 때 투수 뒤쪽 워킹 영역으로 쭉 빠져 나오면서 모든 상황들을 체크, 파악해야 하는데, 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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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심핀 일지 1

이 날 처음으로 심판으로 사회인 야구 게임 루심을 보았다. 사회인 야구는 심판 시스템이 1심제(주심이 혼자 다 보는 시스템) 또는 2심제(주심과 루심 둘이서 보는 시스템)로 이루어진다. 온전히 1경기 모두를 보는 실전 경기에 오을 처음으로 투입됐다. 심판을 본 소감 또는 평가 내용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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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 3. 6. 일요일 #

 

- 부천 복사골 경기장 (총 6게임 : 07 : 00 ~ 19 : 00시)

- 2번째 게임 심판(루심) 투입 (야구팀 - 재규어 : 야비스)

- 경기장 규모 : 홈 플레이트로부터

* 좌측 펜스 93m * 중앙 펜스 105m * 우측 펜스 103m

- 경기장 특성

* 투 베이스가 많이 주어질 수 있는 외야 구멍들이 많다. 특히 중앙 펜스와 우측 펜스 사이에 커다란 문 같은 것이 나 있다.

* 2루가 홈 플레이트와의 일직선 방향에서 3루 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으면서 동시에 외야 쪽으로 좀 밀려나가 있어서 루심이 주자가 있을 상황 시 위치 잡기가 좀 많이 힘들다.

* 모든 구장이 해동이 되면서 바닥이 많이 진데, 이 구장은 타 구장에 비해 그리 많이 질지 않다. 그런데도 지속적으로 심판 신발 바닥의 흙을 털어내야 내야 한다.

- 게임 팀의 특성

* 재규어와 야비스 팀의 수준은 사회인 야구치고는 보통 수준에서 약간 떨어진다.

* 1, 2회에는 양 팀 모두 6점의 대량 득점을 서로 내다가 3회 이후부터는 3점대 정도의 안정된 플레이를 펼쳤다.

 

- 심판 내용 평가 (2심제 : 심판 둘이서 경기를 운영해가는 심판 시스템)

** (루심에게 기본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 경기 매 순간순간마다 적절한 위치를 찾아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경기의 모든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고 다음 상황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을 통해 나의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 초반에는 공의 흐름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해서 우왕좌왕했다. 공에서 눈을 떼지 말고 주의 깊게 공의 움직임과 그에 따른 경기 상황을 살펴야 한다.

** 심판 판정 콜업(아웃, 세이프 같은 판정 소리)이 약간 빠르다. 반 박자 정도 늦추는 것이 필요하다.

** 콜업 때 손동작이 약간 어정쩡하다.

** 내야에서 일어나는 파울 또는 플라이 아웃 때 주심이 콜을 해야 하는 데 루심인 내가 해 버렸다.

** 주자가 없는 상황일 때 1루 쪽 파울 라인 선과 중견수 사이의 외야 안타가 났을 경우 주심이 1,2,3루를 책임지는 동안 만일을 대비해 홈 쪽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타자 주자에 신경을 쓰느라 타자 주자를 달고 2루로 가는 잘못을 했다.

** 루심이 내야로 들어갔을 경우 좌익수 쪽과 3루 파울 라인 사이, 그리고 우익수 쪽과 1루 파울 라인 사이의 외야 타구는 주심이 맡아서 콜을 해야 하는데 콜을 해 버렸다. 루심은 중견수와 우익수 좌익수 사이 영역의 외야 타구에만 콜 또는 동작을 취해야 한다.

** 인디게이터(주심 밑 루심이 스트라이크, 볼, 아웃 수를 세기 위해 왼손에 들고 다니는 조그마한 기계)에 신경 쓰느라 인플레이 상황인데도 순간적으로 경기 상황을 놓치는 잘못을 하였다.

** (루심이 내야로 들어갔을 때의 위치 선정) 루심이 내야로 들어갔을 때(주자가 루에 나가 있을 때 루심은 투수와 2루 사이 타자와 포수 모두를 잘 볼 수 있는 적정한 곳에 위치한다. 주자가 없을 경우 투수, 포수, 타자, 주심을 모두 잘 볼 수 있게끔 1루 뒤쪽 파울 라인 적절한 곳에 위치한다) 투수 위치 약간 바로 뒤에 워킹 영역이 있다. 그런데 내야 땅볼이나 외야 타구 모두의 경우에 이 워킹 영역으로 물러나서 경기의 모든 상황을 한눈에 파악해서 적절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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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전통의 단절(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 1757 - 1827) ▼

- “미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접근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예는 고야보다 열한 살 아래인 영국의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블레이크였다.” 그는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에 사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카데미의 관학적 미술을 경멸했다.” (488쪽)

- “도판 321(<태고 적부터 ‘계신’ 이>, p.491)은 《유럽, 예언서》라는 자작 시집에 곁들인 삽화 가운데 하나이다.” (488쪽)

- “블레이크가 그린 것은 깊은 바다 앞에서 컴퍼스를 세우고 있는 하나님의 이런 장엄한 환상이다, 이 천지창조의 그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어딘가 미켈란젤로의 숭배자였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손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모습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으로 되어 갔다.” (490쪽)

- “사실상 블레이크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신화를 창조했으며 환상 속의 형상은 엄격하게 말해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블레이크의 상상 속의 한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유리즌(Urizen : 이성을 상징-역주)이라 불렀다.” (490쪽)

- “비록 블레이크가 유리즌을 세계의 창조자로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는 세계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의 창조자도 사악한 영혼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이 환상을 기분 나쁜 악몽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컴퍼스는 마치 어둡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의 번갯불처럼 보인다.” (490쪽)

- “블레이크는 환상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현실세계를 그리길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눈에만 의존했다.” (490쪽)

- “중세의 미술가들처럼 그는 정확한 묘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꿈속의 형상 하나하나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단순한 정확성의 문제는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 전통의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였다.” (490쪽)

 

▲ J. M. W. 터너( J. M. W. Tuner : 1775 - 1851) ▼

-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된 화가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때까지 풍경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왔다. 특히 시골의 집이나 정원, 또는 멋진 경치를 그려 생계를 꾸려왔던 화가들은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말엽 낭만주의 정신을 통해 다소 바뀌었으며 위대한 화가들은 풍경화를 새로운 권위로 끌어올리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490쪽)

- “여기서도 전통은 한편으로 도움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애물이 되었다. 같은 세대에 속하는 두 명의 영국화가가 서로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490쪽)

- “그 중 하나는 터너이고 다른 한 사람은 존 컨스터블이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 사이의 대조를 연상시키는 무엇이 있다.” (490쪽)

- “그 역시 레이놀즈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클로드 로랭의 유명한 풍경화(p.396, 도판 255,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를 능가하지는 못해도 같은 수준에는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그가 지닌 일생의 야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과 스케치를 국가에 기증하면서 그 중 한 작품(도판 322,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p.492)를 항상 클로드 로랭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해 줄 것을 명백한 조건으로 내세웠다.” (492쪽)

- “클로드의 그림이 지닌 미를 단순함과 고요한, 그의 환상세계가 지니는 명료함과 구체성, 그리고 어떠한 요란한 색채도 없다는 점에 있었다. 터너 또한 빛으로 가득하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환상세계를 그렸지만 그것은 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동적인 세계였으며 단순한 조화의 세계가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세계였다.” (492쪽) (밑줄 친 부분은 낭만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그의 최고의 걸작들은 사실상 우리에게 웅다한 자연의 가장 낭만적이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도판 323(<눈보라 속의 증기선>, p.493)은 터너의 작품 중 가장 대담한 것 가운데 하나로서 눈보라 속의 증기선을 그린 것이다. 이 소용돌이치는 구도를 데 블리헤르의 바다 풍경(p.418, 도판 271, <해풍에 흔들리는 네덜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들>)과 비교해보면 터너의 접근방식이 얼마나 대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492쪽)

-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데 블리헤르”의 “그림을 보고 이러한 배들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터너의 그림을 보고 19세기의 증기선을 다시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시커먼 선체ㅘ 돛대에서 펄럭이는 깃발, 사나운 바다의 위협적인 돌풍과 대결하는 투쟁의 인상뿐이다. 마치 휘몰아치는 바람과 파도의 충격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세세한 부분은 살펴볼 겨를이 없다.” (492-4쪽)

- “낭만주의 시를 읽거나 낭만주의 음악을 들을 때에 우리가 상상하게 되는 것은 영혼을 뒤흔들고 마음을 압도하는 이러한 폭풍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터너에게 있어서 자연은 항상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고 표현한다.” (494쪽)

 

▲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 1776 - 1837) ▼

- "컨스터블의 생각은 터너와는 매우 달랐다. 터너가 경쟁하고 능가하기를 원했던 전통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단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494쪽)

- “그는 클로드 로랭의 눈이 아니라 그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그리려고 했다. 그는 게인즈버러가 그만둔 것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p.470, 도판 307, <시골풍경>). 그러나 게인즈버러조차도 여전히 전통적인 기준에서 보아 ‘한 폭의 그림 같다(picturesque)’고 생각될 만한 소재들을 선택했으며 여전히 자연을 목가적인 장면들을 위한 아늑한 무대로 보았다. 컨스터블에게는 이러한 모든 생각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진실만을 원했다.” (494-5쪽)

- “컨스터블은 대담한 혁신으로 사람들에게 추격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눈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496쪽)

- “그의 습작(도판 324, <나무줄기의 습작>, p.494)들은 흔히 완성된 그의 작품들보다 훨씬 대담하다. 그러한 아직 일반 대중이 순간적인 인상의 기록을 전시할 만한 가치 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완성된 작품들은 처음 전시되었을 때 큰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496쪽)

- “도판 325(<건초마차>, p.495)는 1824년 파리에서 공개되어 컨스터블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다.” (496쪽)

- 컨스터블은 “실제의 자연보다 더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가식적인 포즈나 허세가 전혀 없는” 태도를 “성실”하게 견지하려고 했다. (496-7쪽)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 1774 - 1840) ▼

- “전통과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터너나 컨스터블의 작품에서 구체화된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붓과 물감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감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할 수 있었다. 또 자기 앞에 놓여진 소재들을 성실하게 묘사하여 끈질기고 정직하게 그것을 탐구하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497쪽)

- “유럽의 낭만주의 화가 가운데는 터너와 동시대 사람인 프리드리히 같은 위대한 미술가들이 있었다.” (497쪽)

-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통하여 우리가 보다 친숙하게 알고 있는 당시의 낭만적 서정시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가 그린 황량한 산의 모습(도판 326, <살레지아 산의 풍경>, p.496)은 그 발상에 있어서 시와 가까운 중국 산수화(p.153, 도판 98, <우산도>)의 정신을 상기시키기까지 한다.” (4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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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1

24장.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 전통 단절의 역사적 배경 : 프랑스 대혁명(1789년) ▼

- 르네상스, 근대(“역사책에서 근대는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으로 시작된다.”) 이후,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미술은 중세 때처럼 “유한계급의 생활 속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475쪽)

- 또한 “이러한 미술의 목적이란 원하고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 간에도 여러 유파가 존재하여 ‘미’란 무엇인가, 카라바조와 네덜란드 화가들과 게인즈버러 등이 명성을 얻었던 것처럼 자연을 능숙하게 모방하는 것인가, 혹은 라파엘로와 카라치, 레니, 레이놀즈와 같이 자연을 ‘이상화’할 수 있는 미술가들의 능력이 진정한 미를 좌지우지하는가 하는 여러 문제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475쪽)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쟁자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이상주의자’들도 미술가란 자연을 연구해야 하고 나체화로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으며 ‘자연주의자’라고 할지라도 고대의 고전적인 작품들이 결코 능가할 수 없는 최고의 미를 지니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475쪽)

- “18세기 말에 이르러 공통된 기반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이성의 시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미술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475-6쪽)

 

▲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 ▼

- “첫 번째 변화는 이른바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였다.” (476쪽)

- “전에는 한 시대의 양식이란 그저 어떤 일이 행해지는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바람직한 효과를 얻는 데 가장 올바르고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채택할 뿐이었다. 이성의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양식에 대해서 의식하기 시작했다.” (476쪽)

- “그러한 의식은” “‘왜 꼭 팔라디오 양식이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이 바로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다.” (476쪽)

- 이러한 물음을 화제로 삼은 사람들 중 “가장 톡특한 인물은 초대 영국 수상의 아들인 호레이스 월폴이었다.” 그는 “스트로베리 힐의 별장을 고성(古城)처럼 고딕 양식으로 결정”했다(도판 311, <런던 트위크넘의 스트로베리 힐>, p.476). (476쪽)

- 이러한 고딕 양식의 선택은 “벽지 무늬를 선택하듯이 건물의 양식을 선택하도록 만든 자의식의 첫 번째 징후였다.” (477쪽)

 

▲ 존 숀(John Soane : 1752 - 1837) ▼

- 첫 번째 변화에 뒤이어 두 번째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 올바른 양식인가” 하는 것이었다. (477쪽)

- “건축가들은 올바른 양식을 먼저 찾아야만 하였다. 이제 월폴의 ‘고딕 복고’와 견줄 만한 ‘그리스 복고’가 일어났고 이는 ‘섭정 시대(1810-20)’에 절정을 이루었다.” (477-8쪽)

- “도판 312(존 패프워스, <첼튼엄(Cheltenham)의 도셋 하우스>, p.477)는 순수한 이오니아 식 그리스 신전(p.110, 도판 60)을 모방하여 지은 첼튼엄 온천의 한 집이다.” (478쪽)

- “도판 313(<시골 별장의 구상도>, p.478)은 파르테논 신전(p.83, 도판 50)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도리아 식을 건축의 한 예를 보여준다.” (478쪽)

 

▲ 신고전주의의 득세 ▼

-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을 적용한다는 이러한 건축 개념은 그 힘과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던 이성의 옹호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건국공로자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 1743 - 1826) 같은 사람이 자신의 저택 몬티첼로(도판 314, <버지니아의 몬티첼로 저택>, p.479)를 이러한 확실한 신고전주의(neo-classical) 양식으로 설계했고 각종 관공서가 있는 워싱턴 시가 ‘그리스 복고(Greek Revival)’ 양식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479-80쪽)

- “프랑스에서도 대혁명이 일어난 후에 이 양식의 승리가 확고해졌다. 바로크와 로코코 건축가나 장식가들의 화려하고 낙천적인 전통은 이제 흘러가버린 과거지사가 되어버렸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을 옹호하는 척하면서 유럽에서 패권을 잡게 되자,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제정 양식이 되었다.” (480쪽)

- “유럽 대륙에서도 고딕 양식의 부활을 이러한 순수한 그리스 양식의 새로운 부활과 나란히 존재하였다. 이것은 특히 이성의 힘이 세상을 개조하는 데 실망하고 이른바 ‘신앙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주장하던 낭만주의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480쪽)

- “전통의 사슬이 단절되었다는 사실이 그림과 조각에서는 건축처럼 즉각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훨씬 더 커다란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480쪽)

- 그런 의의 중 하나는 아카데미(Academy)의 설립이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자기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과)학자들과 맞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처음으로 아카데미라 불렀다. 이러한 아카데미가 점차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기능을 맡게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480쪽)

- 이 아카데미에서의 미술 교육은 그 이전까지 길드에서 도제를 교육시키는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근대 학교의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18세기의 아카데미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480쪽)

- 그런데 여기에서 대단히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그 당시 현재의 화가들이 그림이 팔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카데미는 그림을 팔기 위한 전시회를 계획하였다. 이제 그림은 시장에서 팔려야 하는 상품이 되었다. 그런데 그림의 이러한 상품화 때문에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주제, 즉 멜로드라마의 주제 같은 것도 그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화가들 사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져 왔으며, 이에 따라 아카데미적인 미술을 경멸하고 불신하는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 이러한 흐름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도처에서 새로운 주제의 종류를 찾아”내도록 했다. “미술가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사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에 호소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그들의 주제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481쪽)

-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전의 미술가들은 주제에 있어서” “성경에서 따온 주제들이나 성자의 전설을 묘사”하는 주제 또는 “고대 그리스 신화라든가 용맹과 자기희생이 있는 로마의 영웅 설화, 또는 의인화를 통해 일반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우의적 주제 등 몇 가지 선택된 주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481쪽)

 

▲ 존 싱글톤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 : 1737 - 1815) ▼

- “유럽 미술이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이렇게 이탈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왔던 미술가들, 즉 영국에서 활약했던 미국의 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분명히 이들은 구세계서 신성시되어온 관습에 구속감을 느꼈으며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코플리는 “이러한 부류의 전형적인 화가였다.” (481쪽)

- “도판 315(<1641년에 다섯 명의 탄핵된 의원들의 인도를 요구하는 찰스1세>, p.483)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1785년 처음 일반에게 공개되어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 주제는 그야말로 특이한 것이었다.” (481-2쪽)

- “코플리는 찰스1세가 영국 하원에 대해 탁핵된 5명의 체포를 요구했을 때, 하원 의장이 왕의 권위에 도전하여 그들을 내주기를 거부했던 사건을 그리도록 제안 받았다.”(482쪽)

- “그의 의도는 마치 목격자의 눈에 비친 것처럼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 장면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코플리는 “엄밀하게” 역사적인 “시대 고증을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482쪽)

- “프랑스 대혁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이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영웅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등장시켰다. 코플리가 영국의 역사 속에서 그 주제를 구한 것은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482쪽)

 

▲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 1748 - 1825) ▼

- “프랑스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새로 태어난 그리스와 로마 시민으로 자처하기를 좋아했으며, 그들의 그림들은 건축 못지않게 로마 풍의 장려함이라고 불리는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는 다비드였다.” (482쪽)

- “그는 혁명 정부가 내세우는 ‘공식화가’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마라(Mara)가 광신적인 반혁명파의 젊은 여자에 의해 목욕탕에서 피살되었을 때 다비드는 그를 대의명분을 위해 죽은 순교자의 모습으로 그렸다(도판 316, <암살 당한 마라>, p.484).” (485쪽)

-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을 연구하여, 신체의 근육과 힘줄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외관을 그리는 것을 배웠다. 또한 중점적인 효과에 꼭 필요하지 않은 모든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단순성을 목표로 삼는 것을 고전기의 미술로부터 배웠다. 이 그림 속에는 잡다한 색채도 없고 복잡한 단축법도 없다. 코플리의 커다란 전시 효과적 작품에 비교해 볼 때 다비드의 그림은 엄숙하게 보인다.” (485쪽)

 

▲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 1746 - 1828)의 <발코니의 사람들>(도판 317, p.486) ▼

- “고야는 엘 그레코(p.372, 도판 238, <요한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와 벨라스케스(p.407, 도판 264,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를 배출한 스페인 회화의 훌륭한 전통을 몸에 익히고 있었으며 도판 307의 <발코니의 사람들>(p.486)에서 보듯 그는 다비드와는 달리 고전주의적인 장려함을 위해서 이러한 지식을 거부하지 않았다.” (485쪽)

- “18세기의 베네치아의 위대한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p.442, 도판 288)가 사용한 얼굴 광채와 같은 표현이 고야의 그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고야의 인물은 다른 세계에 속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듯이 쳐다보고 있는 두 여인과 배경의 어둠 속에 서 있는 다소 불길한 두 명의 정부는 호가스의 세계에 더 가깝다.” (485쪽)

▲ 프란시스코 고야의 <스페인 국왕>(도판 318, p.487) ▼

- “그에게 스페인 궁중에서의 지위를 확보해준 초상화(도판 318)들은 얼핏 보면 반 다이크(p.404, 도판 261)나 레이놀즈 류의 어용 초상화들처럼 보인다. 그가 마술을 부리듯 비단과 황금의 반짝임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티치아노와 벨라스케스를 연상시키지만 사실 고야는 그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485쪽)

- “옛 거장들은 권력에 아첨했지만 고야는 그것을 버리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는 그들의 초상화에서 허영과 추악함, 탐욕과 공허함을 낱낱이 드러냈다(도판 319, <도판 318의 세부>, p.488). 자기 후원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던 궁정 화가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485쪽)

 

▲ 프란시스코 고야의 <거인>(도판 320, p.489) ▼

- “렘브란트처럼 그도 수많은 에칭을 제작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부식된 선뿐만 아니라 그늘진 부분까지도 나타낼 수 있는 에쿼틴트(aquatint)라는 기법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485쪽)

- “고야의 판화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성경의 주제이든 역사적 주제이든 또는 풍속적인 주제이든 간에 이미 알려진 주제는 일절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판화들은 대개 마녀라든가 기괴한 요괴들의 환상이 주제이다.” (485-8쪽)

- “어떤 것들은 고야 자신이 스페인에서 직접 목격했던 부패하고 반동적이며 잔인하고 억압적인 폭력에 대한 고발로서 제작한 것이며 또 어떤 것들은 그저 고야 자신의 악몽을 형상화한 듯하다.” (488쪽)

- “도판 320은 그의 꿈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악몽으로, 한 거인이 세계의 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 “이것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이 가져온 가장 뚜렷한 결과”였다. “이제 미술가들은 지금까지 오직 시인들만이 누렸던 개인적 환상의 세계를 종이 위에 펼쳐 놓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상품에서 가치가 사용가치로부터 독립한 현상과 비견될 수 있다 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사물로부터 이미지의 독립과 비견될 수 있겠다. 다른 한편 이로부터 심미주의 --> 예술 지상주의로 나아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4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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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이성의 시대(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2

▲ 조수아 레이놀즈 경(Sir Joshua Reynolds : 1723 - 92) ▼

- 호가스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서야 비로소 18세기 영국의 상류사회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림을 그린 영국의 화가 조수아 레이놀즈 경이 탄생했다.” (464쪽)

- “그는 미술가들의 유일한 희망은 과거 거장들의 장점이라고 불리는 것들, 이를테면 라파엘로의 소묘, 티치아노의 채색 등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모방하는 것이라는 카라치(pp.390-1쪽)의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464쪽)

- “그의 강연들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주제의 탐구를 권하는 말로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레이놀즈는 거창하고 감동적인 것만이 ‘위대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화가라면 대상을 세밀하고 예쁘게 묘사해서 인류를 즐겁게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그의 신념의 위대함으로 사람들을 개선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 이것은 레이놀즈가 제3회 강연(영국 왕립 미술원의 초대 원장으로서의 강연들 중 하나)에서 한 말이다.” (464쪽)

-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 초상화나 풍경화의 경우처럼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손으로 묘사하는 작업은 어딘가 비천한 감이 없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회화란 단순한 손재주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즉 레니의 <오로라(새벽의 여신)>(p.394, 도판 253)이나 푸생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p.395, 도판 254)와 같은 주제를 그리는 데에는 해박한 학식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465쪽)

 

▲ 레이놀즈의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도판 304, p.466) ▼

- “그는” “상류사회가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종류의 미술은 초상화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465쪽)

- “이미 반 다이크가 귀족 사회의 초상화의 전형(典型)을 확립해 놓았으며 후세의 인기 있는 초상화가들은 모두 이 전형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레이놀즈는 반 다이크 이후의 초상화가들 중 누구 못지않게 모델을 돋보이게 미화할 수 있었으나 그는 모델의 성격과 사회저인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의 초상화에 무엇인가 특별히 흥미가 있는 것을 덧붙이기를 좋아했다.” (465쪽)

- “도판 304는 존슨 박사(Samuel Johnson : 1709 - 1784 ; 18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시인·비평가) 그룹의 한 지식인이며 이탈리아 출신의 학자로서 영어-이탈리아 어 사전을 편찬하고 후에 레이놀즈의 《강연집》을 이탈리아 어로 번역한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이다.” (465쪽)

 

▲ 레이놀즈의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도판 305, p.467) ▼

- “어린이의 초상화를 그려야 할 때에도 레이놀즈는 배경을 신중하게 선택함으로써 그 그림을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도판 305는 그가 그린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의 초상화이다.” (465쪽)

- “우리는 벨라스케스도 또한 강아지와 함께 있는 어린이의 초상화를 그렸음을 기억한다(p.410, 도판 267). 그러나 벨라스케스가 자신의 눈으로 본 질감과 색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레이놀즈는 우리에게 소녀가 애완용 강아지에게 기울이고 있는 애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465-7쪽)

- “그는 이 귀여운 아이의 성격을 표현하고 그 성격의 우아함과 매력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주려고 하였다.” (467-8쪽)

 

▲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 1727 - 88)의 <하버필드 양의 초상>(도판 306, p.469) ▼

- 레이놀즈의 “호적수였으며 그보다 불과 네 살 아래였던” 게인즈버러가 “그린 비슷한 또래의 소녀 초상화”가 바로 이 그림인데, “작은 숙녀가 망토의 끈을 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468쪽)

- “그녀의 행동에는 감동적이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애완용 강아지를 안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레이놀즈의 창안처럼 게인즈버러의 그 단순한 행동(산책을 가기 위해 막 옷을 입고 있는 행동)을 매우 온화하고 예쁘게 만들었다. 게인즈버러는 레이놀즈에 비해 ‘창안’에 훨씬 관심을 덜 가지고 있었다.” (468쪽)

- “이 두 사람(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의 관계는 라파엘로의 방법을 부활시키려 했던 유식한 안니발레 카라치(p.390)와 자연 이외는 어떤 스승도 인정하지 않았던 혁신적인 카라바조(p.392)를 연상시킨다.” (468쪽)

- “게인즈버러는 ‘지성적인’ 체할 의향이 전혀 없었으며 단지 그의 뛰어난 붓놀림과 날카로운 관찰력을 과시할 수 있는 솔직하고 틀에 박히지 않는 초상화를 그리길 원했다.” (468쪽)

- “그의 빠르고 성급한 붓질은 우리에게 프랑스 할스(p.417, 도판 270)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의 많은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두운 색조의 섬세함과 세련된 붓질은 오히려 바토의 그림(p.454, 도판 298)을 상기시킨다.” (468쪽)

 

▲ 게인즈버러의 <시골 풍경>(도판 307, p.470) ▼

- “레이놀즈가 고대사에 나오는 야심적인 신화의 장면이나 일화들을 그릴 시간과 여유를 갈망한 반면에, 게인즈버러는 그의 경쟁자가 경멸했던 바로 그런 주제, 즉 풍경화를 그리고 싶어 했다.” (469쪽)

- 게인즈버러의 “대부분의 풍경화는” 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린 습작(도판 307)으로 남아 있다. 이 그림들에서 그는 영국 시골의 나무들과 언덕들을 아름다운 풍경이 되도록 짜 맞추어서 그 당시가 풍경 정원이 유행하던 시대였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왜냐하면 게인즈버러의 습작들은 자연을 직접 묘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그림들은 어떤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반영시키기 위한 풍경 ‘구성 작품’들이었다.” (469-70쪽)

 

▲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 Siméon Chardin : 1699 - 1779) ▼

- “18세기 영국의 제도와 영국인의 취향은 이성의 법칙을 갈망했던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찬미하는 모델이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미술이 신처럼 군림한 통치자들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470쪽) (미술의 상품화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 “우리는 프랑스에서도 역시 베르사유 궁전의 중후하고 장엄한 바로크 양식이 18세기 초에 오면 바토의 로코코 미술 작품(p.454, 도판 298)과 같은 보다 섬세하고 친근한 감각 효과에 밀려 우행에서 벗어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귀족풍의 몽상적인 세계는 퇴조하기 시작했다.” (470쪽)

- “화가들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 제일 위대한 화가는 샤르댕으로 그는 호가스보다 두 살 아래인 화가였다.” (470쪽)

- “도판 308(<감사기도>, p.471)은 그의 매력적인 그림 중의 하나로서 한 여인이 식탁 위에 저녁을 차리면서 두 아이들에게 감사기도를 드리라고 말하는 소박한 장면을 보여준다.” (470쪽) (이는 근대에서의 남녀 성별분업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샤르댕은 이러한 서민 생활의 평온한 광경을 좋아했다.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詩情)을 느껴 화폭에 담은 면에서 그는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p.432, 도판 281)와 유사하다.” (470쪽)

- “그의 색채는 고요하고 은근하다. 그리고 바토의 번쩍거리는 그림과 비교할 때 그의 작품은 광채를 잃은 것 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원칙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거기에서 신중하게 구사된 색조의 미묘한 농담의 변화와 꾸밈없어 보이는 화면 구성의 솜씨를 발견하게 된다.” (470쪽)

 

▲ 징 앙투안 우동(Jean-Antoine Houdon : 1741 - 1828) ▼

- “영국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권려의 겉치레보다는 서민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초상 미술에 도움을 주었다. 아마도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 미술가로는” “조각가인 우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472쪽)

- “그의 훌륭한 흉상들을 백여 년 전에 베르니니가 시작했던 전통(p.438, 도판 284)을 이어받고 있다. 도판 309는 우동이 제작한 흉상 <볼테르 상>(p.472)인데, 우리는 이 위대한 이성의 옹호자의 얼굴에서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 있는 지성과 또한 위인의 깊은 동정심을 ‘읽을 수’ 있다.” (472쪽)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 1732 - 1806) ▼

- “영국에서 게인즈버러의 스케치에 염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자연의 ‘그림 같이 아름다운(picturesque)’ 측면에 대란 취향은 마침내 18세기의 프랑스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472쪽)

- “도판 310(<티볼리에 있는 에스테 별장의 넓은 정원>, p.473)은 프라고나르의 소묘인데 그는 게인즈버러의 세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 또한 상류사회의 테마를 그리는 바토의 전통을 따르는 매력적인 화가였다.” (4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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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이성의 시대(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1

23장. 이성의 시대 (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 영국 경험론의 특징 ▼

- 이 시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자리 잡고 있던 철학적 이론 경향은 베이컨으로부터 시작하는 영국 경험론과 이 경험론에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기계적 유물론이다.

- 영국의 경험론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의 감각 또는 지각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감각 대상 또는 지각 대상이 우리에게 감각적인 정보 데이터를 보내 주면 우리가 그 감각 데이터를 받아들여서(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을 <경험>이라고 한다) 그 감각 대상에 대한 관념(idea)을 비로소 가지게 되며, 이 관념이 대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참다운 앎> 또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철학이론이다.

- 그런데 이 영국 경험론은 우리의 일상 경험으로 볼 때 대단히 의심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경험론에서 말하는 진리 또는 참다운 앎이 그렇지 않은 것일 수 있는 경험적 반박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범죄자의 목격자가 2명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한 목격자는 그 범인의 얼굴이 장동건처럼 생겼다고 하고, 다른 목격자는 그 범인의 얼굴이 배철수처럼 생겼다고 진술했다. 그럼 범인의 얼굴에 대한 진술은 누가 맞는 것인가?

- 이러한 불일치는 우리의 관념(장동건, 또는 배철수)의 원인인 감각적 경험 대상(범인 자체)을 부정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 대상은 한결 같아야 하는데(그래야만 그 대상에 대한 앎, 사실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각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장동건이었다가 배철수였다가)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남는 것은 우리의 지각 또는 그 지각에 의한 관념뿐이며, 이러한 지각 또는 관념에 따라 감각 대상인 사물이 존재할 수밖에, 즉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이렇게 해서 영국 경험론은 두 가지 형태로 갈라지는 모습을 띠게 된다. 첫 번째는 우리의 감각 대상에 의해서 우리의 지각 또는 관념이 형성된다는 견해로서 감각 대상(즉 객관)이 더 우선적이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우리의 지각 또는 관념에 따라 우리의 감각 대상이 존재한다는 견해로서 우리의 지각 또는 관념이 더 우선적이라는 주장이다. 첫 번째를 주장하는 철학자는 로크라는 철학자이고 두 번째를 주장하는 철학자는 버클리라는 철학자이다.

- 이 두 철학자에 비유될 수 있는 영국의 두 회화 예술가가 있다. 로크에 비유될 수 있는 회화가는 게인즈버러라고 할 수 있고, 버클리에 비유될 수 있는 회화가는 레이놀즈라고 할 수 있겠다.

- 이러한 영국 경험론이 18세기 영국 미술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 : 1632 - 1723) ▼

- “그가 지은 세인트 폴 대성당(도판 299,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p.458)을 불과 20여 년 전에 로마의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교회(p.436, 도판 282, <전성기 바로크 양식의 로마 교회 : 산타 아그네스 성당>)와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457쪽)

- 유사점 : “렌의 성당은 보로미니의 교회당보다 규모가 훨씬 크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중앙의 둥근 지붕과 양쪽의 탑들과 고대 신전의 정면을 연상시키는 정면 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로미니의 바로크식 탑과 렌의 탑 사이에는 확실히 유사성이 있으며 특히 2층의 경우가 그렇다.” (457쪽)

- 차이점 : “이 두 정면 현관들이 주는 전반적인 인상은 대단히 다르다. 세인트 폴 성당은 곡선적인 곳이 없어서 운동감을 암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인함과 안정감을 준다. 건물에 당당함과 고귀함을 주기 위해서 사용된 쌍으로 나란히 선 원주들은 로마의 바로크 양식보다는 오히려 베르사유 궁전의 정면(p.448, 도판 291)을 연상시킨다.” (457쪽)

- “세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장식에는” 바로크와 같은 “괴상한 것이나 환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그의 모든 형태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모델들을 엄격하게 따르고 있다. 건물의 각 형태와 부분은 그것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하지 않은 그 자체로 보여질 수 있다. 보로미니나 멜크 수도원을 지은 건축가의 자유분방함에 비하면 렌은 우리들에게 은근하고 침착한 인상을 준다.” (457쪽)

 

▲ 렌 경의 <런던의 세인트 스티븐 월브룩 교회>(도판 300, p.459) ▼

- “신교와 가톨릭 교회 건축의 대조는 렌이 설계한” “월브룩 교회(도판 300)와 같은 건물의 내부를 살펴보면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교회”의 “목적은” “천국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도들의 생각들을 집중시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457쪽)

 

▲ 벌링턴(Burlington : 1695 - 1753)과 윌리엄 켄트(William Kent : 1685 - 1748) ▼

- “교회들이 그랬듯이 성(城)들도 동일한 경향을 따랐다. 영국의 어떠한 왕도 베르사유와 같은 궁전을 짓는 데 필요한 엄청난 자금을 모을 수 없었고 영국의 귀족들 또한 사치와 방종의 면에서 독일의 제후들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 “18세기 영국의 이상(理想)은 성이 아니라 교외의 저택이었다.” (459쪽)

- 이러한 교외 저택의 선호는 중세 봉건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부르주아 가족 형태인 근대 핵가족 문화, 더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생산과 그 생산에 따른 이윤 창출이라는 목적, 즉 효율성에 부합하려는 경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교외의 저택들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보통 바로크 양식의 지나친 호사스러움을 배격했다. 그들의 야심은 그들이 ‘고상한 취향’이라고 생각한 규칙을 하나도 위반하지 않고 고전 건축의 실제적인 또는 그렇다고 주장하는 법칙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따르려는 것이었다.” (459쪽)

- “도판 301(<런던 치직 저택>, p.460)은” “팔라디오 식 별장인 치직(Chiswick) 저택이다.” “이 건물은 정말로 팔라디오의 로톤다 별장(p.363, 도판 232)과 대단히 유사하다.” (459-60쪽)

- “당당한 현관은 코린트 식 기둥 양식(p.108)을 지닌 고대 신전의 정면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p.73). 건물의 벽은 단순하고 평범하여 곡선이나 나선형이 없고 지붕 위를 장식하는 조각상도 없으며 그로테스크한 장식도 없다.” (460쪽)

- “그 이유는” 영국의 “고전주의”와 경험론에 기인하고 있다. (460쪽)

 

▲ 도판 302(<윌트셔(Wiltshire) 주 스타우어헤드의 정원>, p.461) ▼

- “영국의 전반적인 기질은 바로크 식 장식에 나타난 공상의 비약에 반대했고 또 감정을 압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예술에도 반대했다.” “베르사유 궁의 정원 양식 같이” “실제 건물 이외의 주변 지역까지 확장된 형식적인 느낌을 주는 정원은 불합리하고 인공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460쪽)

-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정원이나 공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반영해야 하며 화가의 눈을 매혹시키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모아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켄트 같은 사람은 팔라디오 식 별장의 이상적인 주변 경관으로서 영국의 ‘풍경 정원(landscape garden)’을 고안해냈다.” (460쪽)

- “경치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서도” 영국인들은 “남유럽의 한 화가에게 자연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대체로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460-1쪽)

- “18세기 중엽에 조성된” 이 도판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로랭과 팔과디오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배경에 있는 ‘신전’은 팔라디오의 로톤다 별장(p.363, 도판 232 : 이것은 본래 로마의 판테온을 본떠 지은 것이다)을 연상시키는 한편 연못과 다리, 로마의 건물을 연상케 하는 전체적인 경관은” “ 영국 풍경의 아름다움이 클로드 로랭의 회화(p.396, 도판 255)에서 영향 받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461쪽)

 

▲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 1697-1764) ▼

- 호가스는 “사람들이 ‘그림의 효용이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청교도적인 전통이나 성장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라도 예술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에게 착한 인의 보상과 악한 일의 대가를 가르칠 만큼 교훈적인 내용을 그릴 것을 계획했다.” (462쪽)

- “그는 방탕과 나태로부터 범죄와 죽음에 이르는 <탕아의 편력(A Rake’s Progress)>이나 소년이 고양이를 놀리는 일에서부터 어른들의 잔인한 살인에까지 이르는 <잔혹의 네 단계(Four Stages Gruelty)>를 보여주려고 했다.” (462쪽)

- “그가 이러한 교화적(敎化的)인 이야기와 경고의 사례들을 어찌나 잘 그렸던지 이 일련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 다 그 그림이 의미하는 모든 사람들과 교훈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462쪽)

-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의 대가들과 그들이 회화적인 효과를 내는 데 사용한 방법을 세심하게 연구”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익살스런 에피소드로 그림을 채우고 또 인간의 유형을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데 탁월했던 얀 스텐(p.428, 도판 278)과 같은 네덜란드의 대가들을 잘 알고 있었다.” (462쪽)

- “그는 또 당시의 이탈리아 화가들과 구아르디(p.444, 도판 290) 풍의 베네치아 화가들의 수법도 알고 있었다. 구아르디로부터 그는 붓을 두세 번 힘차게 휘두름으로써 한 인물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462쪽)

- “도판 303(<베들럼의 탕아>, p.463)은 <탕아의 편력>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빈털터리가 된 탕아가 베들럼 정신 병원에서 광란하는 미치광이로 인생을 끝맺는다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4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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