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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하워드 진, 윤길순 옮김, 당대, 2005) #
1. 마르크스는 왜 돌아왔는가?!
“관료주의적인 당국의 실수로 마르크스가” 영국 “런던의 소호가 아니라 뉴욕에 있는 소호로 돌아왔다.”(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뿐이다.) 마르크스는 왜 돌아왔을까? 돌아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까? 그는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의 명예는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표현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20세기 말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권 공산주의가 무너졌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현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한다면서 실제로는 경찰국가를 세워서 억압적인 통치 체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로 대변되는 사이비 사회주의이며, 자신이 이론이 왜곡된 사회주의였다. 그런데 붕괴된 현실 사회주의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 마르크스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마르크스는 ‘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선언만으로 이러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
“고백하건대, 나는 자본주의가 용케 살아남는 재간이 있다는 것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 병든 체제를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마약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고요. 전쟁이 산업을 계속 유지시키고, 사람들을 애국심에 불타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을 잊게 하리라는 것도.”
그러나 마르크스가 반성을 한다고 해서 이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시 저 하늘나라에 돌아가서도 항상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그가 늘 원하던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체로서의 공산주의’를 건설해 나가지 않는다면 마르크스는 이러한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2. 자본주의의 해체
그렇다면 어떻게 자본주의를 해체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에게도 뚜렷한 방법이 없듯이 마르크스 역시도 그러한 것 같다. 그는 우리가 떨쳐 일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엉덩이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내 말이 너무 래디컬하게 들리세요? 그러나 명심하세요. 래디컬하다는 것은 바로 문제의 뿌리를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위대한 창조주로서의 노동자 계급임을, 현실을 변혁함으로써 역사를 진보시키는 주체임을 자각할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가능성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점점 더 현실은 척박해지며, 우리의 생존을 점점 더 자본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다. 비빌 언덕이 하나도 없다. 비빌 언덕이 있어야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일어설 수 있을 텐데, 그 비빌 언덕이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바라던 공산주의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래서 뉴욕에 온 마르크스는 답답하다. 떠날 시간이 다 됐다. 떨쳐 일어서야 한다는 선문답만을 남기고 떠날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노동자 계급은 남성 노동자로 상징되어 왔다. 그런데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러한 남성 노동자, 즉 노동자 계급은 정말로 역사 진보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다면 어떻게 될 수 있을까? 현재의 자본주의 구조 하에서 여성은 자본과 임금 노동자인 남성 노동자에게 이중적인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 노동계급--> 자본이라는 먹이사슬 체제처럼 구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최소한의 신체적이고 기계적인 생활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자본은 이 노동자가 기계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노동자 역시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데, 이렇게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인간 ‘생산’ 노동에 대해서는 단 한 푼의 임금도 지불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인간으로서의 자기 생산 내부에는 정치경제학적으로 부불노동(임금으로 지불되지 않은 노동)의 착취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착취를 안고서 노동자 계급은 절대로 역사 진보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여성이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될 때만이 노동자 계급은 역사 진보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면 마르크스가 노동자 계급 생산과정의 정치경제학을 짚고 넘어갔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부인인 예니의 엄청난 희생과 돌봄에 의해 자신이 생산되었음을, 그리고 예니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음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아이와 함께 런던으로 옮겨와 살았는데, 런던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예니가 또 임신을 했어요. 이따금 나는 예니가 늘 누군가 아파 드러누워 있는 춥고 습기 찬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길러야 하는 처지를 내 탓이라고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다 예니는 천연두에 걸렸지요. …… 나는 여러분이 예니를 알았으면 해요. 예니가 나를 위해 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지요.”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생산 과정 내에 내재해 있는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대 자본 투쟁은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물적 조건 확보를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3. 프롤레타리아 독재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물적 조건 확보를 위한 투쟁은 바로 다름 아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투쟁은 노동자 계급이 계급을 해체해 가는 투쟁인데, 이는 노동자 자신의 생산 과정 내에 자리잡고 있는 지배-피지배의 계급성을 해체해 나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의 당파성, 보편성은 노동자 계급 자신 속에 감추어진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폭로하고 해체할 때만이 현실화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자 계급 내의 가부장적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토대>라고 할 수 있겠고, 자본-노동 사이의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상부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토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노동-자본 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접수해야 한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은 마르크스의 말대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공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동시에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현실적으로 억압적인 국가 권력 또는 1당 독재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스탈린주의로 대변되는 ‘경찰국가’, ‘공포정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분노한다.
“이 얼간이들은 공산주의를 뭘로 알지요? 동료 혁명가를 살해하는 암살자가 통치하는 체제가 공산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바보 얼간이 같은 놈들!”
“그리고 저들이 공산주의의 목표를 알기나 할까요? 개인의 자유!”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그 사회의 계급과 계급 갈등 대신에, 우리는 각 개인의 발전이 모든 사람의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를 갖게 될 것이다. 알겠어요? 연합체!”
이러한 사태를 아마도 아나키즘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쿠닌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부정하면서 “민중이 옛 질서를 무너뜨리고 바로 자유롭게 살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자유를 잃게 돼”라고 말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예니는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의 생각에 모순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 지적을 통해 마르크스는 반성한다.
“바쿠닌의 머리에는 무정부주의라는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낭만적이고 공상적인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나는 바쿠닌을 인터내셔널에서 쫓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예니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왜 혁명가 집단은 여섯만 모이면 항상 누구를 제명하지 못해 안달이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론적으로는 여성해방론자이면서 실제로는 여성 문제를 등한시한다고 비난했지요. 그러면서 이러더군요. 당신과 엥겔스는 남녀평등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실제로는 남녀평등을 실천하지 않아.”
이러한 마르크스의 반성이 반성으로만 끝이 날까, 아니면 현실의 삶 속에서 현실화될 수 있을까?
4. 코뮤니즘(공산주의)의 가능성-코뮌의 가능성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코뮤니즘을 완성해 나가는 운동 과정이며, 동시에 코뮤니즘 그 자체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은 결국 그람시가 말하고 있는 진지전에 다름 아니며, 노동자 계급의 보편성이라는 진지를 확보해 나가는 투쟁이다.
칸트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투쟁은 인간이 자신의 선의지(이 의지는 인간의 자유의지로서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인 입법의 원리에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같은 정언명령으로 나타난다)를 현실화시켜 나가는 투쟁이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결국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유의지가 실현되는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선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은 노동자 자신 내부에 있는 지배-피지배라는 계급성을 해체하는 투쟁이며,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보편성, 즉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인류애의 보편성을 실현하는 투쟁이다.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은 가타리가 말하는 소수자-되기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자이며, 따라서 소수자-되기 투쟁은 결국 노동자 계급의 보편성을 실현하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타리는 소수자-되기 투쟁의 기초에는 여성-되기 투쟁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생산과정 속에 가부장제에 기초한 여성 억압과 착취의 기제를 가지고 있다. 노동자 계급이 소수자이기 위해서는 이 가부장적 억압의 기제를 해체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노동자 계급의 보편성을 실현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이제 다시 저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이세상에 내려와서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돌아가면서 그저 박제화된 마르크스이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의 마르크스이길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면서 돌아가지 않았을까?
“나는 여성주의-마르크스주의자이다!”
이것이 현실화될 때 그는 진실로 그가 사랑하는 예니의 동반자가 될 것이며, 그의 반성은 반성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권력관계에 대한 초기 노트들
여성이 자본주의 가부장제 속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자. 우리는 이러한 물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여성의 억압을 위해서는 우리사회에 현존하는 권력 구조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자본주의 계급 구조이며, 가부장제 내에서의 남자와 여자 세계의 위계질서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수한 형태로 일어나고 있지만 전(前)자본주의 사회의 노예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노동의 인종 분업이다. 위계적이며, 억압적이고, 착취가 일어나는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 가부장제는 성과 계급 억압과 더불어 인정 억압을 필요로 한다. 여성들은 서로 억압을 공유한다; 그러나 (47쪽) 성적 억압으로서 여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가부장제 역사가 계급과 인종에 따라 항상 인간을 구별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계급과 인종 출신에 따라 구별된다. 분명히, 아메리카 노예 사회의 흑인 여성은 가부장제의 억압을 경험하였지만, 이러한 경험은 이 여성을 속박하고 있는 다른 권력 구조에 의해서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다. 노동자로서 이 여성은 여자의 어떠한 “연약함”도 결코 인정받지 못하였고, 여성으로서 “강간당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노예로서 인간 이하의 지위를 견뎌냈다. 성이나 계급을 보는 대신에, 또는 인종이나 계급을 보는 대신에, 또는 성이나 인종을 보는 것 대신에, 우리는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 관계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에 주목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억압당하는지를 비로소 배울 수 있는데, 그 과정은 우리의 억압을 변화시키는 과정의 첫 번째 단계이다.
여성이 관계하고 있는 어떠한 과정도 여성이 구현하고 있으며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는 사회의 여러 관계들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결코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아이를 출산하는 행위는 비록 결혼과 가족 관계를 반영하고 있을지라도 오로지 모성의 행위로만 여겨진다. 다른 한편 이와 아주 유사한 행위가 간통과 같은 불륜으로 여겨질 때, 그 아이는 “서자” 또는 “사생아”가 된다. “어머니”라는 말은 여러 다른 관계들이 포함된 경우에 “미혼모”에서와 같은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이 말은 행위 속에 어떠한 관계들이 구현되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와 유사하게, 일련의 관계들 속에서 성적 사랑과 부부관계의 기쁨으로 정의되는 것은 다른 관계들 속에서는 매춘행위, 또 다른 관계들 속에서는 강간이 된다.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의 집에서 일하는 것, 또는 남성에 의해 고용되어 일하는 것은 가사노동으로 여겨져서 임금을 받게 되지만, 바로 그녀의 집에서 아내 또는 어머니로서 일하는 것은 사랑의 수고(a labor of love)로 여겨져 사회에 의해 임금을 받는 노동(work)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그리하여 직접 임금을 위한 일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의 여러 사회적 관계들은 여성이 어떤 상황 속에서 행하는 특별한 행위를 규정한다. 이러한 관계들 밖에서 “여성은” 하나의 추상(an abstraction)이 된다(도외시된다). 어떠한 상황을 형성하는 권력 관계들과 그 상황을 규정하고 지키며 유지하는 이데올로기 밖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결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들을 설명하는 가운데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왜냐하면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사회적 관계들이 (48쪽) 자유주의, 남성우월주의 그리고 인종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필요한 어떤 특수한 상황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 2011. 11.5. 토요일 #
- 염광고 구장(총2게임: 13:30~17:20, 1심 경기) (날씨 맑고 화창)
* 제1경기(07:30~09:20) (주심: 본인)
* 제2경기(09:30~11:20) (주심: 본인)
- 별 다른 특이사항이 없었다.
- 리그 운영자께서 정확하고 원활한 심판 판정을 했다고 선수들이 칭찬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선수들과 리그 운영자께 감사드린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물음을 발전시키기
여성 억압 이론이 좋은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왜 그리고 어떻게 억압 받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은 『정신분석과 페미니즘』(Psychoanalysis and Feminism)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내가 보기에 “그것이 왜 일어났느냐” 그리고 “역사적으로 언제”라는 이 두 질문은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질문들을 대체해서 물어보아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지금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처음 질문으로 삼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왜 일어났는가?” 하는 질문이 정말로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비록 우리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이 지금 왜 일어나고 있는가를 설명해 줄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 그것이 왜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러한 것을 넘어서서 지금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를 완전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성적 위계와 억압이 왜 유지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왜 그리고 어떻게는 서로 연관된 질문들이다. 둘을 분리시켜서 어느 한 쪽을 택한다면 대답의 일부분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와 관련된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현존하는 권력 배치를 규정하는 직접적인 관계, 즉 억압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왜와 관련된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44쪽) 이런 동일한 관계를 살펴볼 수도 있지만, 또한 실제적인 강제력으로서 가부장제 역사의 현존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두 질문은 필수적이다. 이 둘은 남성 우위의 특수한 측면들과, 그렇지만 여전히 (특수한 측면들의 이면에 있는-옮긴이 삽입) 보편적인 측면들을 상호 연관시킴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밝혀준다.
여성 억압에 관한 어떻게 그리고 왜라는 물음은 페미니즘 이론 속에서 통합되지 못했다. 급진 페미니즘은 권력 과정이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묻기보다는 여성이 왜 억압 받고 있는가를 물었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은 여성의 재생산 기능이 본래적으로 여성 억압의 중심이라고 대답했다. “권력의 성적 불균형은 생물학에 기초하고 있다.” 여성은 재생산자들로서, 하나의 성 계급으로서 존재한다. 여성이 어떻게 억압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은 거의 확실하게 (왜 억압 받고 있는가와-옮긴이 삽입) 구별되는 것이 아닌데, 이를 처음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사람이 티 그레이스 애킨슨(Ti Grace Atkinson)이다. 애킨슨의 개념에 따르면, 성 계급은 정치적 구조물(political construct)이 된다. 여성은 재생산이라는 생물학적 사실 때문에 억압 받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재생산 “능력”(capacity)을 하나의 기능으로서 규정하는 암성에 의해 억압 받는다. “사실 아이를 낳는 것은 여성의 기능이 아니다. 아이를 낳는 기능은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의 기능이다.” 사회가 바로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과 더불어 그녀의 목적을 상실시킨다. 성 계급은 생물학적 억압이 아니라, 바로 문화적인 억압이다. 억압의 요인(the agent)은 인간의 성을 문화적 정치적으로 “헤테로 섹슈얼리티”로 정의하는 것이다. 가족과 결혼 제도, 그리고 헤테로 섹슈얼리티를 강제하고 보호하는 법적 문화적 시스템은 여성을 정치적으로 억압하는 토대이다.
급진 페미니즘이 여성이 현재 왜 억압 받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이러한 억압이 현재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고 있지만, 급진 페미니즘은 거의 대개 역사를 한 부분으로서, 즉 가부장적 역사로서 바라본다. 이러한 역사 파악은 여성의 관점에서 역사를 (가부장제 하나로-옮긴이) 통일시킴으로써 급진 페미니즘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지만, 우리는 다른 역사 시기에서 가부장제의 가부장적 형태들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구체적인 역사가 아니라 추상적인 역사에 머무르게 된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는 봉건시대와 자본주의 시대에서 유사한 형태들을 나타났기도 했지만 다른 형태들로도 나타났다. 여성 억압의 형태는 이 두 시대 모두에 걸쳐 있지만 서로 구별된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 블로흐(Marc Bloch)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45쪽) "그 시대(봉건 시대)가 모계 쪽의 삼촌과 그 조카 사이의 관계들에 부여했던 감정의 중요성은 여성 쪽의 유대 관계가 거의 부계 친족의 유대 관계만큼이나 중요하게 보았던 시스템의 한 표현 형태일 뿐이다. 이러한 것의 한 증거로는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로 잘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아버지 또는 어머니 쪽의 이름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것에 대해 고정된 규칙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며 따라서 가족은 세대가 바뀌면 이름이 바뀌는 것처럼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로흐에 따르면, 봉건적 관계들에서 초점을 맞춰야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아주 불안정한 상태였다. 자본주의의 발전, 그리고 그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경제 관계 형태들과 더불어 가족은 점점 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안정성의 근원지로서 규정되었다. 가족은 초기 경쟁 자본주의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였지만, 그 반면에 봉건적 관계 자체는 불안정한 가족 질서의 불안정성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이 두 과정을 설명해야만 한다. 하나는 계급과 관련하여 정의된 역사, 즉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으로 명명되는 역사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시기에 의해 구조화되면서도 이런 시기를 구조화시키는 가부장제 역사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임(motherhood), 가사(housewifery), 그리고 가족은 여러 역사적 순간에서의 가부장제 표현 형태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전(前)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르게 규정되고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순간들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지속되는 실재(reality), 즉 특수한 형태로 이해되지 않는 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형태가 되지 않는 실재의 부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실재는 하나의 추상이 되며 나아가서 하나의 왜곡된 일반화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물론 이것은 가부장제가 서로 구별되는 계급 역사를 관통해 나가면서 현존하고 있다는 관점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가 특수한 순간에 특수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가부장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으며, 이 가부장제는 결코 그 보편적인 현존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보편적인 것은 특수한 것을 밝혀주며 특수한 것은 보편적인 것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모든 사회적 변화가 이전 사회의 찌꺼기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가부장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배워야만 한다. 오늘날의 권력 기반은 자본주의가 성적 위계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하는 특수한 억압을 통해, 그러나 동시에 (46쪽) 부분적으로 전(前)자본주의 가부장제, 더 특별하게는 봉건적 가부장제로부터 비롯된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관계들을 통해 현존한다. 가부장제 관계들을 이해하는 어떤 경우에라도 그 관계들을 그 특수한 역사적 틀 속에서 다루어야 한다. 물론 우리가 가부장제 역사의 요소들을 단일화시켜 이해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추상의 수준에 머무르게 되지만, 보편적인 것을 언급하는 어떤 경우도 또는 요소들을 단일화시키는 어떤 경우도 하나의 추상이 된다. 권력 관계들의 특수성과 보편성 양자 모두 남성 지배의 특수한 동력이 포함된 것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봉건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이의 변하지 않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유사점들이 새로운 사회에서 지속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확신하고자 할 때 이 유사점들이 중요하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이 전(前)자본주의 형태들과 연결되어 있을 경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지되고 있는 전(前)자본주의 요소들에 도전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들 수 있는 예가 성별 노동 분업이다. 이 분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지되고 있으며 자본주의 문맥 속에서 규정되고 있지만 특별히 자본주의 욕구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전(前)자본주의 형태들의 유지를 통해 우리는 가부장제 역사가 세워짐을 보게 된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점이 아니라 페미니즘 사회주의 관점으로 삶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제 가족과 성적 위계라는 낙인이 더 이상 찍히지 않은 혁명적인 가족 이론이 필요하다.
# 2011.10.29. 토요일 #
- 광나루 구장(총5게임: 07:00~17:45, 1심 경기) (날씨 비오고 흐렸다가 오후 늦게 서서히 맑아짐)
* 제1경기(07:00~08:50)
* 제2경기(08:50~10:40)
* 제3경기(10:40~12:30)
* 제4경기(12:30~14:20) (주심:본인)
* 제5경기(14:20~16:10) (주심:본인)
- 특이사항이 없었다.
# 2011.10.23. 일요일 #
- 신월 구장(총4게임: 08:00~17:45) (날씨 맑음)
* 제1경기(08:00~10:15) (주심:본인)
* 제2경기(10:30~12:45) (루심:본인)
* 제3경기(13:00~15:15)
* 제4경기(15:30~17:45)
- 특이사항이 없었다.
# 2011.10.16. 일요일 #
- 수원 일림 구장(총5게임: 08:00~17:50) (날씨 비 오다가 개서 맑은 날씨)
* 제1경기(08:00~09:50) (루심:본인)
* 제2경기(10:00~11:50) (루심:본인)
* 제3경기(12:00~13:50)
* 제4경기(14:00~15:50) (루심:본인)
* 제5경기(16:00~17:50) (루심:본인)
- 투아웃 주자 만루 상황에서 타자주자가 낫아웃(not out)이 되었다. 이때 타자주자를 반드시 태그하거나 1루 베이스 터치아웃을 시켜야만 그 이닝이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타자주자를 아웃시켜도 되고, 다른 주자를 태그아웃 또는 베이스 터치아웃을 시키면 된다. 예를 들어 포수가 놓친 공을 잡아서 그냥 홈베이스 터치아웃을 시키면 그 이닝이 끝나게 된다. 왜냐하면 포스 아웃(force out) 상태이기 때문이다.
- 인필드 플라이 상황(무사 또는 1사 주자 1,2루 또는 만루 상황)일 때 파울 지역으로 내야 뜬공이 나왔다. 이때 인필드 플라이(infield fly)를 선언해야 하는가 또는 하지 않는가? 파울 라인 선상에서 얼마만큼 파울 지역으로 공이 떴는지에 따라서 선언하던가 아니면 선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심판이 보았을 때 파울 지역으로 뜬 공이 땅에 떨어져서 내야로 흘러들어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인필드 플라이 이프 페어(infield fly if fair)>를 선언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야로 흘러들어오게 되면 볼인플레이 상황이 되고 이때 주자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예 내야로 흘러들어올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인필드 플라이를 선언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파울로 인해 경기는 볼 데드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 2심제의 기본적인 포메이션에서 우익수와 중견수 사이로 나온 타구가 나왔을 때 루심은 일단 외야로 나갔다가 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본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루심이 이렇게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외야 타구라고 해서 모두 루심이 홈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주심인 동료 심판과의 위치가 중복되는 결과가 가끔 나타났다. 이렇게 중복되면 심판 판정이 엇갈리게 나거나 아니면 홈으로 들어가는 주자를 놓치게 되는, 아주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게 될 수 있다. 외야 타구 중에서 홈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외야 타구가 외야수 뒤쪽으로 넘어가는 타구는 루심이 끝까지 쫓아가서 외야수가 그 공을 포구하는지를 잘 판단한 다음 홈으로 뛰어 들어오면 된다. 이때 주심은 타자주자나 주자를 달고서 1,2,3루를 커버하게 된다. 그러나 외야 타구가 외야수 앞쪽으로 떨어져서 안타가 날 경우 바로 내야 쪽으로 들어가서 타자주자를 달고서 1,2,3루 또는 1,2루를 커버하면 된다. 1,2루를 커버하는 경우는 대체로 루심이 주자의 촉루와 태그아웃 상황도 봐야 하고 타자주자의 촉루나 아웃 상황을 모두 다 보아야 하는데, 그러면 어느 한 경우를 놓치는 위험이 발생하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주심이 <내가 간다>를 외치면서 3루로 오는 주자를 커버하기 위해서 3루 쪽으로 달려간다
# 2011.10.15. 토요일 #
- 동국대 구장(총3게임: 12:00~17:50, 고용노동부 장관배 경기) (날씨 비 오고 센 바람)
* 제1경기(07:30~09:20) ( 루심:본인) (신분증 부족으로 몰수경기처리)
* 제2경기(09:30~11:20) (루심:본인) (우천 관계로 가위바위보 결정 승)
* 제3경기(11:30~13:20) (주심:본인) (우천 관계로 가위바위보 결정 승)
- 제1경기는 몰수경기 처리하면서 연습게임이 이루어졌다. 비가 오는데도 연습경기를 강행하다가 1회만 하고 더 이상 경기가 진행되지 않았다. 비를 하도 맞아서 감기 걸릴 뻔했다.
아래의 글은 질라 아이젠슈타인이 편집한 논문 모음집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Monthly Review Press, New York and London, 1979) 중에서 질라 아이젠슈타인의 논문 [2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에 대한 몇 가지 노트 ]를 해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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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에 대한 몇 가지 노트 #
- 질라 아이젠슈타인(Zillah Eisenstein) -
(41쪽) 이 논문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분석 방법론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것은 페미니즘을 통해 맑스주의의 역사 접근 방법을 다시금 조명하고 정의하는 것을 포괄하고 있다. 급진적 페미니즘 이론을 통해 맑스주의 방법론을 여성의 억압, 특히 성-계급 구조, 가족, 노동과 사회의 위계적인 성별 분업과 관련한 여성 억압을 이해하는 쪽으로 적용시켜볼 수 있다. 요즘 부각되고 있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한 학파는 바로 이러한 작업을 시도해 왔다. 이러한 (방법론의-옮긴이) 확장은 페미니즘 분석을 통해 맑스주의 방법론을 변형하는 데 기초해 있다. 변형된 맑스주의 방법론을 통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성 권력의 측면들을 알게 되었고, 권력의 특수한 역사적 국면들에 대해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페미니즘의 문점들을 해소하게 된다.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은 그녀 자신이 “우리는 페미니즘의 의문점들에 대답하여야 하지만 몇몇 맑스주의 답변은 고려해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이러한 종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그녀의 이러한 말은 페미니즘 분석 아니면 맑스주의 분석이라는 이분법, 즉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분석을 방해하는 이분법을 함축하고 있다.
페미니즘을 통해 맑스주의 방법론(마찬가지로 그 내용도 포함해서)의 방향을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선차성(priorities)에 관한 문제, 특히 사회 조건들과 관련한 의식의 문제를 재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식의 문제는 사회적 현실(social reality)에 관한 논쟁의 일부가 되고 있다. 현실 그 자체는 계급과 성 그리고 인종 관계를 포괄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사적인 것(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정치적인 것) 양자 사이의 관계는 (42쪽) 섹슈얼리티, 헤테로섹슈얼리티, 호모섹슈얼리티를 규정하는 관계들이 특별하게 중요하다는 쪽으로 주요하게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서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초점이 된다. 그리하여 변증법은 자기 의식적으로(self-consciously) 의식, 이데올로기 그리고 사회적 현실 사이의 관계들로 그 폭을 확장시켜 나갈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이러한 새로운 방식, 즉 사회의 관념과 사람들의 의식이 객관적인 사회적 현실의 부분들이며, 이 부분들이 성, 계급 그리고 인종 관계들의 외부에서 작동한다고 보는 방식은 좌파가 가지는 이론과 실천의 빈약함에 대한 페미니즘 비판의 산물이다.
맑스주의 방법론의 방향 재정립은 사회적 관계 이론을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방법론이 맑스 저작에 나타나 있는 계급 사회와 계급투쟁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사회적 관계 이론들은 현존의 맑스주의 분석에서 주어진 내용과는 구별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이 계급 분석과 잘 맞지 않고 여전히 계급 분석 너머에 있지만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중요하고 또 그럴 수 있다. 계급 분석은 우리의 이해에 필요하지만, 우리의 목적을 위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맑스주의 분석은 권력을 연구하는 데 방향이 맞춰져 있다. 우리는 이러한 분석을 권력의 어떠한 특수한 현상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그 도구를 충분히 그렇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분석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분석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다. 맑스는 이른바 “사물들”을 그 구체적 연관 속에서 파악하는 자신의 사회적 관계 이론을 사회의 권력관계들을 파악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의 분석이 계급투쟁에 관한 논쟁을 다루었던 것이지만, 사회적 관계들을 분석하는 그의 방법은 또한 가부장제 투쟁을 검토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맑스주의 사회적 관계 이론을 페미니즘 의문에 대답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생물학에 기초한 파이어스톤(Firestone)의 유물론 역사와 더불어 우리를 정체시킬지 모른다. 아니면 우리는 이 변형된 방법을 가부장제와 계급 역사 사이의 접점을 이해하는 데, 또한 성과 계급, 성과 인종, 인종과 계급, 그리고 성, 인종, 계급 사이의 변증법을 설명하는 데 사용해야만 한다.
우리가 현존하는 것 자체로서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면 뚜렷한 정치적 목적과 전략을 가지고 있는 여성 억압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킬 수 없다. 급진 페미니즘의 문제는 (43쪽) 사회 권력의 다른 관계들로부터 성을 도외시함으로써 이러한 분석을 수행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물론 급진 페미니즘이 권력의 이러한 여러 관계들을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관계들을 서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계급투쟁과 인종투쟁은 가부장제 역사를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역사가 종종 마치 이 투쟁들이 분리되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실천적으로 이 투쟁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관계들이 설명되지 않는다면, 남성 우위는 권력 관계 또는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것으로 보인다.
급진 페미니즘을 불러일으켰던 여러 좌파 분석들은 맑스주의 방법론을 새로운 방식으로 변형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진지하게 이 방법론을 파고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권력에 관한 의문점을 완전히 물질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에서 고찰하지 못했다. 급진 페미니즘, 계급 분석 그리고 변형된 맑스주의 방법론을 통일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가부장적·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사회 현존을 규정할 수 있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 2011.10.8. 토요일 #
- 염광고 구장(총4게임: 07:30~15:30, 1심 경기) (날씨 맑고 화창)
* 제1경기(07:30~09:20)
* 제2경기(09:30~11:20) (주심: 본인)
* 제3경기(11:30~13:20)
* 제4경기(13:30~15:20) (주심: 본인)
- 해당 구장에 오래간만에 오거나 처음 오는 동료 심판이 있을 때, 그 구장에 좀 더 와서 그 구장에 좀 더 익숙한 심판이 그 동료 심판에게 그 구장이 로컬 룰에 대하여 제대로 잘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기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한다.
- 사회인 야구의 심판원은 무엇보다도 사회인 야구선수들과 소통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소통을 위해서 심판원은 야구 게임을 관장하는 판정자의 역할보다는 도우미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도우미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가운데서 제대로 된 판정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도우미의 역할을 통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엄격한 판정관의 역할만을 강조한다면 경기가 딱딱해지고 그로 인해 양 팀의 승부욕이 과열되어 거친 어필이 자주 계속 되다보면 그 어필에 신경 쓰여서 경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 잘 되어야 전체 경기 운영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고, 그로 인해서 훨씬 더 올바른 판정을 잘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경기장에서 늘 느끼고 체험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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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abor of love는 성경에 나오는 구절로서 사랑의 수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의 일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에서 비롯된 것이며 어머니들을 향해서 한 말입니다. 어머니가 집안에서 하는 일은 사랑(labor=love)라는 뜻이며, 다음에 나오는 임금을 받고 하는 일(work)과 대비되는 것입니다. 여성이 집에서 하는 일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가없이 하는 것이고, 집밖에서 하는 일은 사랑과 관계없으니까 돈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줍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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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사랑의 수고가 훨씬 적절한 것 같네요. 고치도록 하겠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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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셰익스피어의 Love's labour's lost는 우리나라에서 사랑의 헛수고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어요. 멋진 번역이죠. 우리도 이런 멋진 번역을 위해 노력합시다. ㅇ^0^ㅇ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