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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 투쟁에 관한 단상...

서울의 모 대학 총장이 일명 <빵장>으로 불리고 있다.

그 이유인즉슨, 그 총장이 <더 맛있는 빵을 먹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면서,

내년도 등록금을 2~3배 정도 올려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란다.

물론 그 이후에 해명을 했단다. <단과대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려면 등록금을 그 정도로 올려야 한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뭐,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시대가 천박하니까 교육자라는 사람도 입이 경박해지고 천박해지는가부다.

맑스가 한 말이 절실하게 생각난다.

<교육자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

교육자를 누가 교육을 시킬 것인가?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학생들이다.

학생들의 <힘>이 없으니까 즉흥적으로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힘이 있었다면 저런 식으로 교육자가 천박함을 드러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교육자가 천박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책임이 크다 할 수 있겠다.

 

90년대 이후로 줄기차게 대학 사회의 중요한 이슈 중이 하나가 된 것이 바로 <등록금 인상> 문제이다.

학교는 끊임없이 인상하려고 하고, 학생들은 인하하려는 저항을 계속 해 왔다.

그러나 등록금은 학교가 마음 먹은대로 계속 인상되어 왔고,

학생들의 저항은 별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것은 곧 학생 운동권의 불신을 넘어서서 학생회 자체에 대한 불신,

더 나아가 학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공부이자 활동인 <자치>에 대한 무관심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자치는 학생들에게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러고서는 오로지 취업, 취직만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

대학은 이제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 불모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

대학이라는 횃불이 점점 더 사그러지고 있다.

 

그러다고 하더라도 아주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여전히 투쟁의 불씨는 남아 있다.

그 불씨가 바로 등록금 인하 투쟁이다.

지금까지의 등록금 투쟁은 대학 재단과 총장에게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 등록금을 인하해 달라는 식이었다고 본다.

이때 대학의 답변 역시 먹고 살기 힘드니까, 다시 말해 자꾸 물가가 오르니까 등록금을 올리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 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똑같은 전제를 깔고 있는데, 누가 더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여 싸움의 승패를 가를 수가 있을까?

그러니 이 투쟁은 아무런 진전도 없이 지리하게 이어지는, 김 빠진 사이다와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칼자루를 대학 재단이 쥐고 있으니 싸움을 오래 끌면 끌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학생들 쪽이다.

그러니 이 싸움의 승리는 결국 재단이 하게 된다.

등록금 인하 투쟁을 한다고 대학 본관(행정관), 총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한다고 해도 학생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싸움의 승자를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싸움은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늘 항상 투쟁의 방식은 이런 식이었음을 학생들은 보아 왔다.

학생회는 학교에 선전포고를 한 다음에 말싸움 몇 번 하고 서명을 받고는 더 이상 무엇을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것 이외의 어떤 다른 전술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학생회, 학생운동 진영의 상상력의 빈곤... 이것은 교육자의 천박함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단순히 등록금만 인하하자고 하는 투쟁은 이제 안 하느니만 못한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

안 하자니 마땅히 할 사업이 없고, 하자니 이미 결판난 싸움이고, 또 학생들한테 곱지 않은 눈길을 받을 테고.

 

<등록금 투쟁은  졸업 이수 학점을 대폭 낮추는 투쟁과 결합해야 한다!>

 

먼저 등록금 투쟁은 학생들의 관심과 주체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

이 말은 아주 진부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부하다고 생각되는 이 말 속에 진리가 있다.

진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들의 관심과 주체적인 참여가 가능하도록 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학생들이 현재 수준에서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학생들은 과중한 노동, 즉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재미 없는 공부와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 공부에 지쳐 있다.

그래서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너무도 필요로 한다.

그들의 입에서는 <어휴~~! 힘들어!> 하는 소리가 무의식중에 흘러 나온다.

속된 말로 똥 누고 밑 닦을 틈도 없는 것이 학생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학생들은 정말로 약간이라도 인간적인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재미 있는 대학생활을 원한다.

학기 중엔 잠도 맘 편히 실컷 자볼 수도 없다.

시험과 레포트에 치여 일주일에 삼사 일은 거의 밤을 새다시피한다.

(잠 좀 자자라는 말은 촛불시위를 당긴 여고3학년의 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대학생들 전체의 입 속에서 신음소리인 듯이 나오는 말일 것이다.)

어느 딱한 책상물림들이 한국 대학생들은 공부를 안 한다고 했던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고3보다도 더 빡빡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한국의 대학생들이다.  

 

친구들과 마음 편히 영화 한편, 연극 한편 등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

그러한 여유를 누리고 싶지만, 거의 대부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럴 시간에 토익 한자라도 더 공부해야 하고,

A+ 학점을 맞기 위한 공부를 한자라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렴풋이 자기가 꿈꾸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어하지만,

그러한 것을 할 시간이 없다.

늘 해야 하는 것의 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그러다가 졸업할 때쯤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도 잘 모르게 된다.

그냥 그렇게 떠밀려 대학을 떠나게 된다.

대학생들은 이러한 것을 대단히 두려워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하면서 받아들인다.

 

학생들의 공부라는 노동의 강도를 완화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이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완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이러한 노동 강도의 완화 투쟁은 졸업을 위한 이수 학점을 대폭 낮추어야 하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

절반 이상으로 낮추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고, 인간다운 대학생활을 위한 자유시간을 쟁취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시간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즉 졸업 이수 학점을 절반으로 낮추는 투쟁을 어떻게 등록금 투쟁과 연결시킬 것인가?

학교 측의 경제 논리를 역이용하면 된다고 본다.

학교 측의 논리는 대체로 등록금 인상 요인이 일반적으로 물가 상승이고, 이러한 물가 상승이 인건비의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등록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인건비의 상승이 등록금 상승의 요인이라는 것이다(그렇지만 대학 교육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시간강사의 경우 강사료의 인상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거의 20년간 강사료의 인상율은 그간의 물가 상승율에 비하면 거의 10분의 1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인건비를 낮추면 등록금을 인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졸업 이수 학점을 낮추어서 인건비를 절감하면 된다. 다시 말해서 졸업 이수 학점을 절반으로 낮춘다는 것은 그 학점에 해당하는 과목 또는 강좌를 줄인다는 것이고, 이는 곧 그 과목 또는 강좌를 담당하는 교강사를 줄이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등록금 인하 요인을 학교 측의 경제 논리를 이용하여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었을 때 당장 생존에 지장을 받는 이는 나 같은 시간강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 보장의 책임은 학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부 및 자본에게 있다. 그러므로 교강사들의 생존 보장은 학생들의 노동 강도 강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부 및 자본에 대해 요구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요구 투쟁을 할 때 학생들은 기꺼이 연대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학교 측에 공을 넘겨 버리면 학교는 분명히 <졸업 이수 학점을 낮추는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 의지의 문제이다>라고 하면서 비껴가려고 할 것이다.

학교의 답은 분명히 맞는 답이다.

사실상 졸업 이수 학점 감소 문제는 개별 학교에서 투쟁할 사안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국 전체 대학생의 문제로서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답게 공부하기 위해, 즉 과도한 노동강도의 공부, 그리하여 재미 없게 된 공부의 양을 대폭 줄이기 위해 학생들 스스로 촛불시위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학생들은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지난 번 촛불시위는 여고3학년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이제는 좀더 구체적이고 절실한 삶의 문제인 노동강도의 완화로서의 졸업 이수 대폭 감소를 위한 촛불시위는 대학생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충분히 시작될 수 있으리라 본다.

대학 안에 갇혀 있던 대학, 외부와 소통이 단절된 대학이 아니라 사통발달의 거리 광장의 대학,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한 대학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해 와서 발표하고 토론하며, 또한 서로 격려해 가면서 공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듦으로써 스스로 대학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러한 대학 만듦은 자연스럽게 대학 안에 갇힌 대학에 대한 동맹 휴업으로 나타날 것이고, 휴학 투쟁으로 나타날 것이고, 졸업 연기 투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은 서서히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자본은 자기 입맛대로 노동력을 공급 받을 수 없을 텐데, 졸업하는 학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대학은 더 이상 대학에 갇힌 대학이 아니라 사통발달의 광장의 대학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할 커리큘럼을 만들기 시작하고, 이 커리큘럼대로 공부하기 시작할 것이고,

이 공부한 것을 발표하고 토론하며 서로 격려해 가는 공부의 장, 축제의 장, 소통의 장, 정치의 장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러한 장은 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릴 것인데, 이는 기존의 축제와는 전혀 다른 학생들 스스로를 생산해 내는

생산력 발전의 축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축제는 곧 학생들 자신의 코뮌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이것은 곧 등록금 인하가 아니라 대학의 무상 교육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아가 대학 입시제도도 폐지될 것이고, 누구든지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대학에 올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학의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좀 더 생각이 구체화되는 대로 세부적으로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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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 윤리학에 대하여^^...

# 메타 윤리학 #

 

- <과학(합리성) = 윤리>라는 도식이 아예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문제의식은 에피쿠로스학파, 흄, 칸트와 거의 똑같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성 작용의 영역을 과학에 한정시키고 윤리의 영역은 빼 버린다는 것이다.

- <과학(합리성) ≠ 윤리>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면, 윤리(~해야 한다, 당위, 도덕, 자유의지의 영역; 가치판단의 영역) 영역에 속하는 주장은 그 근거를 과학․합리성의 영역(~이다, 자연법칙․필연성의 영역; 사실판단의 영역)으로부터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조류가 메타 윤리학이다.

 

** 메타 윤리학 1 : 무어와 이모티비즘

- 메타윤리학의 대표적인 학자가 <무어>이다. 무어는 윤리적인 판단의 참됨을, 즉 가치판단의 참됨을 과학․합리성의 영역에서, 즉 사실 판단에서 그 근거를 끌어대는 것은 오류이고, 이러한 오류를 <자연론적 오류>라고 불렀다.

- 예를 들어 ‘인간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규범 윤리학자에게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결국 행복하게 잘 살더라’는 등의 사실에 관한 판단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규범 윤리학자에게 <윤리 = 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실판단의 예를 많이 끌어들여도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는 증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과 당의는 그 존재의 층위가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 이렇게 해서 메타 윤리학은 규범 윤리학이 학문, 즉 과학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현대의 대표적인 메타 윤리학의 조류는 <이모티비즘(emotivism)>이다. 이모티비즘을 주장하는 윤리학자들은 예를 들어 ‘인간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판단은 ‘아 슬프다’, ‘나쁜 녀석’ 등과 같이 말하는 사람의 감정(emotion)을 표출하거나 듣는 사람의 감정을 일으키는 구실을 할 뿐이며 우리에게 아무런 사실도 알려주지 않는다.

- 그러므로 이모티비즘에 따르면 이런 도덕판단은 예를 들어 ‘이 사과는 빨갛다’는 사실판단과 달리 참, 거짓을 가릴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도덕판단을 핵심 내용으로 삼는 규범 윤리학은 과학이, 즉 학문이 될 수 없다.

 

** 메타 윤리학 2 : 헤어

- 무어나 이모티비즘에 따르면 모든 도덕판단과 그 도덕판단을 핵심으로 하는 규범 윤리학은 주관적인 개인 감정에 기초하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도덕, 윤리는 성립할 수 없게 되고, 인간 사회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 바로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규범 윤리학이 학문(과학)으로 성립할 수 있다고, 즉 도덕판단도 참, 거짓을 가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메타 윤리학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20세기 미국의 윤리학자 헤어이다.

- 헤어는 도덕판단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적 요소>, 즉 이성(과학)이 작용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도덕판단도 참, 거짓을 가릴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도덕판단 속에는 <누구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과 <이런 이웃 사랑을 적극적으로 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전자는 이 도덕판단의 내용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보편화 가능성>과 그 내용을 행동에 옮기도록 촉구하는 <규제성>이 들어 있다.

- 보편화 가능성을 먼저 살펴보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 또는 없는지, 즉 그 보편화 가능성의 참․거짓(정당성과 부당성)을 가질 수 있으며 이 결과에 따라 규제성의 ‘~을 하라’는 것 역시도 해야 되는지 또는 하지 않아야 하는지, 즉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참․거짓을 판별할 수 있게 된다.

- 그렇기 때문에 헤어는 규범 윤리학이 학문, 과학으로 성립할 수 있다, 즉 <과학 = 윤리>라는 도식이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 메타 윤리학 3 : 듀이

-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철학자 듀이는 도덕판단이란 인간이 부딪친 <문제 상황> 속에서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 일종의 <실천 판단>이며, 이 실천판단 속에는 <현재 사실>에 대한 정보와 미래 사실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 예를 들어 ‘너는 병원에 가야 한다’는 실천판단 속에는 현재 너의 몸이 아프다는 사실에 대한 정보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나을 것이라는 미래 사실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다. 그리고 현재 몸이 아프다는 점과 병원에 가면 나을 것이라는 점은 참․거짓을 가릴 수 있다.

- 그러므로 듀이에 따르면 도덕판단도 참․거짓을 가릴 수 있으며, 이 도덕판단을 핵심 내용으로 가지는 규범 윤리학은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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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 윤리학에 대하여 주저리 주저리 2^^...

** 근대 윤리학 1 : 칸트의 윤리학

- 중세 봉건 공동체가 해체되고 근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각 개인들은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지게 되었다. 이것은 곧 각 개인들의 생존이 각 개인 자신에게 달려 있을 뿐 다른 어떤 누구에게도 간섭 받거나 침해 받을 수 없음을 뜻한다.

- 이러한 생존의 법칙은 타인을 완전히 배제하는 배타적 특성을 가진 사적 소유의 원리가 된다. 모든 합리적인 수단․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신만의 부를 소유․축적할 수 있다는 것이 근대 시대의 <자유> 이념이며, 누구나 이러한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근대 시대의 <평등> 이념이다.

- 자기 자신만의 생존을 위하는 근대 인간은 곧 만인 대 만인 투쟁 상태, 즉 먹지 않으면 먹히고 마는 정글 법칙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 이러한 상태는 여타의 다른 동물들이 사는 자연 세계와 똑같은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서로 돕고 협력하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윤리’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가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피쿠로스학파에게서처럼 칸트에 오게 되면 고대의 전통인 <과학(합리성 또는 이성) = 윤리>라는 도식이 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정글법칙에 따라 사는 이 현실의 삶이 왜 그러한지를, 즉 신의 뜻을 이 현실 속에서 찾아봐야 정글법칙이 그 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글법칙은 정확하게 말해서 신의 뜻이 아니다.

- 정글의 법칙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배타적인 사적 소유의 원리, 즉 적대적인 무한 경쟁의 원리로서 이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만드는 원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사회성, 즉 협력과 단결, 연대와 우애라는 특성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제 인간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간의 사회성을 회복시켜야만 하는 의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안 하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러한 의무의 영역은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적 현상의 영역, 즉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객관적 ‘사실’의 영역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영역이다. 이 영역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당위’ 또는 ‘도덕’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 이러한 의무․의지를 칸트는 ‘선 의지’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지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그러한 의지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답게, 즉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사회성(연대와 협력, 그리고 우애와 단결)을 실현시키며 살아가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 칸트의 이러한 <선 의지>는 <정언명령>이라는 정식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 위와 같은 내용을 고찰해 볼 때 칸트의 ‘선 의지’, ‘정언명령’은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유의지처럼 <자발성>에 기초한 윤리 법칙이라 할 수 있다.

- 그런데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유의지>와 칸트의 <선의지>와의 차이점은 아마도 칸트의 선의지가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유의지 방향을 구체적으로 설정하였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유의지의 발현방향을 <선>으로 구체화하였다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 이러한 윤리 법칙은 국가들 간의 윤리적․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UN과 비슷한 <국가연합>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 근대 윤리학 2 : 공리주의

- 에피쿠로스학파와 칸트의 윤리학이 자발성에 기초해 있다고 한다면 공리주의는 비자발성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수로서의 나의 이익이 다수로서의 여러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충돌이 일어나게 될 때, 공리주의는 다수의 여러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지지하게 되며, 소수로서의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여러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법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는 <적대적인 무한 경쟁>을 생존 원리로 삼고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 대다수가 이 생존 경쟁으로부터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는 칸트가 말하는 선의지, 즉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정언명령이 실현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 이런 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즉 비합리적인 것으로 비판 받을 수 있다.

- 윤리는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리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윤리관을 통해 공리주의가 성립한다. 그런 점에서 공리주의는 <경험주의적>이다.

- 공리주의는 이러한 자본주의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다시 말해서 <적대적인 무한 생존 경쟁> 원리를 이미 그 바탕에 깔고 있다. 그 경쟁에서 탈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 경쟁에서 탈락한 자는 경쟁 구조 속에 다시 뛰어들 수 없는 죽은 자(또는 비존재)이다.

-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는 경쟁 이전의 전체의 측면에서 볼 때 <최대 다수>이다. 왜냐하면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에는 애초부터 경쟁에서 승리한 자뿐만 아니라 패자부활전 같은 것을 통해서 다시금 경쟁 체제에 편입될 수 있도록 구원 받은 자들과 앞으로 경쟁 체제에 들어올 예비 경쟁자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일단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킨 <행복한 자들>이다.

- 그러므로 벤담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의 원리는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 된다.

-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그 특성상 <배제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경쟁에서 탈락한 소수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다른 한편 경쟁은 단 1번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한하게, 그것도 적대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계속 최대 다수 중에서 경쟁에 탈락한 소수가 배제되고 결국에 가서는 <1등 혼자만이> <최대 다수>가 되고, <최대 다수>인 경쟁자는 <최대 소수>가 된다.

- 이렇게 해서 공리주의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 결국에 가서는 1등만을 위한 윤리법칙이 되고 만다.

- 또한 공리주의 경제지상주의(경제적인 이익이 커져야만, 즉 파이가 커져야만 각 개인에게 돌아갈 이익도 커진다는 논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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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 윤리학에 관해 주저리 주저리 1^^...

# 규범 윤리학 #

 

- 의미 : 당위에 관한 학문이라는 의미.

‘~을 해야 한다’, ‘~이어야 한다’ 등의 도덕 판단으로 표현.

- 이러한 도덕 판단의 기초, 토대 : <이성>

- 그런데 <이성>의 의미나 그 기능(또는 작동 방식)은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성>의 의미나 작동 방식은 시대적인 인간의 삶․문화 형태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또한 인간의 삶․문화 형태는 <이성>의 <대상>인 <인간 자신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그런데 세계에 대한 이성의 파악은 궁극적으로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법칙성, 즉 필연성을 파악하는 데 있다. 이러한 필연성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가지 형태로 나뉘게 되는데, 그 하나는 인간 삶의 필연성, 즉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당위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법칙이 가지고 있는 필연성, 즉 사실관계가 가지고 있는 필연성에 관한 것이다.

-고대에서는 이 둘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즉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후로 가게 되면 인간이 자연 존재이면서도 여타의 다른 자연 존재들과는 구별된다는 특성에 따라서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 관계에 초점을 두게 된다. 이는 인간을 여타의 다른 자연 존재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을 강조하게 되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그 특성을 ‘자유의지’로 보았다.

-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방점을 두고서 대체로 윤리의 보편성, 절대성을 강조하는 목적론적 윤리설과 법칙론적 윤리설, 공리주의 등의 규범 윤리학에서 나타난다.

- 다른 한편으로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방점을 두고서 대체로 윤리의 특수성과 상대성을 강조하는 상대론적 윤리설 등의 메타윤리학에서 나타난다.

- 아래에서는 규범 윤리학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 고대 그리스 윤리학 1 : 플라톤

- 플라톤의 윤리학은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 <이성>은 이데아 세계의 진리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인간은 바로 그 진리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 그런데 이데아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하는 현실 세계의 원본이면서도 이 현실계와 분리되어 있다.

- 그렇다면 <이성>은 이 이데아 세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이성은 현실세계를 분석하고 쪼개고 따져서 이데아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데아 세계는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오로지 도를 깨치듯이 아는 방법, 즉 직관을 통해서 이데아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그 당시의 <신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그런데 이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 당시의 인간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도시국가(폴리스)의 시민 성인 남성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 고대 그리스 윤리학 2 : 아리스토텔레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비판하였다.

예) ‘개(dog)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범신론적이고 경험론적인 형상론과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 <이성>의 목적은 <순수형상>, 즉 <신>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신>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 그런데 이 <신>은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 이 <신>은 이데아 세계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이 <신>은 <직관>을 통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분석하고 쪼개고 따지는 연역적 방법>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 그런데 이 <직관>은 그것이 참된 것이니, 거짓된 것인지 확인․증명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개인 또는 몇몇이 신의 뜻을 빌러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인간의 삶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 이 <신>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 인간 삶(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 이르는데, 이 행복은 현실 세계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연역적으로 파악하는 <이성적 활동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 그리고 이러한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중용이란 현실 세계의 이런 저런 변화에, 그리고 그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임의적인 주관에 휘둘리지 않는,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불변의 이성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질적인 삶에 휘둘려 살지 않고 <과학적인 태도>의 삶을 견지하는 것을 말한다.

- 그런데 이런 변화의 현실은 필연적인 신의 뜻이므로, 당시의 모든 정치․경제․계층적 삶은 신의 뜻에 의한 것이다.

 

** 고대 로마의 윤리학 1 : 스토아학파

- 고대 로마의 문명은 고대 그리스의 문명을 계승․발전시킨 문명이다. 그러므로 고대 로마의 윤리학 역시 고대 그리스 윤리학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러한 고대 로마의 윤리학 가운데 하나가 스토아학파가 내세우는 윤리학이다. 스토아학파가 내세우는 윤리학은 금욕의 윤리학이다.

- 고대 그리스의 윤리학의 쟁점은 참된 진리가 어느 정소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이성의 작동 방식이 달라지는 데 있다. 그런데 스토아학파가 문제 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이성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가>였다.

- 스토아학파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 작동 방식이 암묵적으로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의 물질적인 변화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 이것은 곧 물질적인 측면에서 금욕주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고, 금욕주의를 통해 마음의 평정, 고요함(부동심)을 얻은 후에야 이성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과학적 태도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 과학적 태도․실천은 곧 윤리적 태도․실천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고대 로마의 윤리학 2 : 에피쿠로스학파

- 절제와 평정을 강조했던 스토아학파와는 달리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를 주장했다.

-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은 <자유의지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 에피쿠로스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와는 달리 자연의 필연적 인과율을 거부하는 비결정론적인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의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의 필연적 인과율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신의 의지, 뜻(자연법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인간 이외의 여탸 다른 생명체와 인간 사이의 어떠한 구별․분리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의’ ‘윤리’는 성립될 수 없다. ‘인간의’ ‘윤리’가 성립되려면 인간 이외의 여타 다른 생명체와 구별될 수 있는 특성이 인간에게 존재해야 한다. 그러한 특성이 바로 ‘자유의지’라 하겠다.

- 자유의지는 자연법칙을 파악하는 능력 이외의 것이다. 자연법칙을 파악하는 능력은 자연을 분석하고, 쪼개고, 따져서 그 본질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이렇게 해서 파악된 여러 개별적인 자연법칙 그 자체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결론적으로 동물의 삶의 방식과 구별되지 않는다. 인간은 단순히 이러한 법칙들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법칙들을 자신의 삶의 목적에 맞게 종합․통일시킨다. 이렇게 종합․통일시켜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현실화하는 것이 자유의지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런데 자유의지의 실현은 이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학파의 윤리학 역시 이성을 통한 자유의지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이성은 분석하고, 쪼개고 따지는 능력이 아니라 종합하고 통일시키는 능력이 된다.

- 또한 동시에 이러한 능력은 과학적 실천의 기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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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미술의 위기(16세기 후반 유럽) 2

▲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cos Theotocopoulos : 1541?-1614) ▼

- 이 사람은 “보통” “간략하게 ‘그리스인’이라는 의미의 엘 그레코(El Greco)로” 불렸는데,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의 화가”로서 “16세기의 화가들 중에서 틴토레토의 화법을 한층 더 밀고 나간 사람”이다. (371쪽)

- 엘 그레코가 베네치아로 갔다가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한 이후에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감동적이고 극적인 환상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엘 그레코가 틴토레토를 능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는 아직도 미술에 관한 중세의 이념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73쪽)

- “도판 238(<요한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 p.372)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놀랍고 흥미진진한 것 가운데 하나다.” (373쪽)

- “흥분된 몸짓을 하고 있는 나체의 인물들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인 흰 두루마기를 받기 위해서 무덤에서 일어난 순교자들이다. 제아무리 정확하고 빈틈없는 소묘력을 가진 화가라 할지라도 성인들이 이 세상의 파괴를 요구하는 최후의 심판날의 그 무서운 광경을 이처럼 무시무시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373쪽)

- “틴토레토의 한 쪽으로 치우친 비정통적인 구성 방법에서 엘 그레코는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고 또 파르미자니노의 기교를 부린 <마돈나>(도판 234, p.365)에서와 같이 인물을 길쭉하게 그리는 매너리즘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73-4쪽)

- “그의 작품은 믿기 힘들 만큼 매우 ‘현대적’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스페인 사람들은…… 반감 같은 것은 가지지 않은 것 같다.” (374쪽)

- “그의 가장 위대한 초상화들(도판 239 <펠릭스 오르텐시오 파라비시노 수사>, p.373)은 티치아노의 초상화(p.333, 도판 212)에 비견될 수 있다.” (374쪽)

 

 

▲ 북쪽(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 미술가들의 위기 ▼

- “남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롭고 놀라운 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제와 씨름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회화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었다. 이 커다란 위기는 종교 개혁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 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374쪽)

- 또한 거대한 제단화나 프레스코화를 그린다는 것은 캘빈 교도들에게는 일종의 사치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화가들의 정상적인 수입원으로 남게 된 것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과연 그것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374쪽)

 

 

▲한스 홀바인(아들)(Hans Holbein the Younger : 1497-1543) ▼

- “우리는 이러한 위기의 영향을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 화가인 한스 홀바인(아들)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374쪽)

- 도판 240(<성모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p.375)을 살펴보자. “이 그림의 형식은 모든 나라에서 전통적인 것으로서, 우리는 이미 이런 형식이 <윌튼 두폭화>(p.216-17, 도판 143)나 티치아노의 <페사로의 성모>(p.330, 도판 210)에 적용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홀바인의 그림은 이러한 종류의 그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76쪽) 즉 완벽한 삼각형의 구도(이 삼각형의 구도의 원리는 중세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인물 배치 구도이다 ; 성모와 예수가 무대의 정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동일한 거리 내에 헌납자들의 가족들이 왼쪽에는 남성들로, 오른쪽에는 여성들로 배치되어 있다)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 “고전적 형태의 감실(龕室)에 둘러싸인 고요하고 품위 있는 성모 양쪽에 헌납자의 가족들을 별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배치해 놓은 방법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조반니 밸리니(p.327, 도판 208)와 라파엘로(p.317, 도판 203)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조화로운 구성을 상기시켜 준다. 세부 묘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인습적인 아름다움을 다소 무시하는 것으로 보아, 홀바인은 북유럽에서 화가 수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376쪽)

- 도판 242(<리처드 사우스웰 경>, p.377)를 살펴보자. “홀바인의 이러한 초상화들에는 드라마틱한 것은 하나도 없고 사람의 눈을 끌 만한 것도 없으나 이 그림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모델의 마음과 인품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다. 홀바인이 그 인물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호의 없이 본대로 충실하게 그린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376-9쪽)

- “홀바인이 이 인물을 이 그림에 배치한 방법을 보면…… 전체 구성이 아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아주 ‘알기 쉽게’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홀바인이 의도한 것이었다.” (379쪽)

- 홀바인은 “그의 초기의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배경, 즉 평소에 그 인물이 가까이 했던 것들을 통해서 주인공의 특성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세부를 묘사하는 그의 탁월한 솜씨를 여전히 과시하려고 했다(도판 243<런던의 한 독일 상인 게오르크 기체>, p.378).” (379쪽)

-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고 기법이 완숙해감에 따라서 그러한 트릭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도 않았으며 또 초상 인물로부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게 의도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높이 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거장다운 절제 때문이다.” (379쪽)

 

 

▲ 니콜라스 힐리어드(Nicholas Hilliard : 1547-1619) ▼

- 홀바인이 죽자 독일어권과 영국의 회화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가운데서도 홀바인이 지켜낸 유일한 분야가 초상화인데, 이 초상화 분야에서도 “남유럽의 매너리즘 취향이 나타나고 홀바인 풍의 간결한 양식 대신에 귀족적인 세련과 우아함이 이상시되었다.” (379쪽)

- “이런 새로운 유형의 최고 수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젊은 귀족의 초상화(도판 244 <들장미 곁의 젊은이>, p.379)”인데, 이 초상화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이었던 유명한 영국의 화가 힐리어드가 그린 ‘세밀화’이다.” (379쪽)

- “아마도 이 세밀화는 청년이 구애를 하고 있는 숙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 그린 그림 같다.” (379쪽)

 

 

▲ 16세기 후반 네덜란드 미술의 상황 ▼

-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을 통해 일찌감치 부를 축적하였고, 이러한 부의 축적은 곧바로 상인계급, 즉 부르주아지를 경제적․정치적으로 급성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급성장은 네덜란드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중세 가톨릭의 규제를 덜 받고 그만큼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 종교 개혁이 가져왔던 엄청난 역사적 파장도 네덜란드에서는 그닥 큰 파장을 가져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교 개혁은 부르주아지들이 깊숙이 연관된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시대적 배경은 네덜란드의 미술, 특히 회화의 영역을 다양하게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 “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무사하게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 그들은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그러한 모든 유형을 전문화하였다.” 신교 교회의 신도들 대부분은 상인계급, 즉 부르주아지였다. “일찍이 반 에이크의 시대로부터 네덜란드의 미술가들은 자연을 모방하는 데 완벽한 대가들로 정평이 나 있었다.” (380쪽)

- “따라서 더 이상 제단화나 기타 다른 종교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진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공인된 전문적 특기를 사줄 수 있는 시장(市場)을 발견하려고 애썼고, 또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솜씨를 과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381쪽)

- 그림을 살 수 있는 부를 가지고 있는 계급이 부르주아지였고,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일상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들을 선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일상 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들을 뒤에 가서 소위 ‘풍속화(genre painting)’라고 부르게 되었다. (381쪽)

 

 

▲ 피터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 : 1525?-69, 아버지) ▼

- 브뢰헬은 “16세기 플랑드르 최대의 풍속화가”였다. (381쪽)

- 도판 245(<화가와 고객>, p.380)를 보면, 브뢰헬은 “뒤러나 첼리니에게”서처럼 “미술과 미술가의 존엄성을 중요”시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에서 화가의 뒤에서 “지갑을 만지작거리는” 고객(부르주아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붓을 들고 그림 작업을 하고 있는 화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381쪽)

- “브뢰헬이 주로 그렸던 그림의 ‘종류’는 농민들의 생활 장면이었다. 그는 농부들이 떠들썩하게 술잔치나 축제를 벌이고 일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381쪽)

- “브뢰헬이 그린” 풍속화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시골의 결혼을 다룬 유명한 작품”은 도판 246(<시골의 결혼 잔치>, p.382)이다. (382쪽)

- 이 그림에서 “넘치는 기지와 뛰어난 관찰력으로 묘사된 이처럼 많은 일화들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브뢰헬이 비좁다거나 번잡스러운 인상이 전혀 들지 않게 그림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틴토레토라 하더라도 이렇게 수많은 인물들이 가득 들어찬 공간을 브뢰헬만큼 교묘한 수단으로 더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383쪽)

- “식탁은 원근법에 의해서 뒤로 후퇴하고 있고, 인물들의 움직임을 배경에 있는 헛간 입구의 군중들로부터 시작해서 전경의 음식을 나르는 두 사람을 거쳐 음식을 받아 상 위에 올려놓는 사람을 통해서 다시 배경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바로 이 음식을 옮겨 놓는 사람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곧장 조그맣게 그려졌지만 회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흐뭇한 표정의 신부에게로 향하게 된다.” (383쪽)

- “이 유쾌한, 그러나 결코 단순하다고 할 수 없는 그림들에서 브뢰헬은 풍속화라는 미술의 새로운 왕국을 발견했다. 그 이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 왕국을 더 완벽하게 개척해 나갔다.” (383쪽)

 

▲ 16세기 후반 프랑스 미술의 상황 ▼

-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미술의 위기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탈리아와 북유럽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는 양쪽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프랑스 중세 미술의 굳건한 전통이 처음에는 이탈리아 미술의 유입으로 위협을 받았다. 프랑스 화가들은 네덜란드 화가들(p.357, 도판 228)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미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 상류 계급이 마침내 받아들인 이탈리아 양식은 첼리니 유형(도판 233)의 세련되고 우아한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이었다.” (383-4쪽)

 

 

▲ 장 구종(Jean Goujon : 1566? 사망) ▼

- “이탈리아 미술의 이러한 영향을 우리는 프랑스 조각가 구종이 만든 분수의 부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도판 248 <님프>). 이들 흠 잡을 데 없이 우아한 인물상들과 좁고 긴 면적에 인물을 적절하게 짜맞추어 넣는 방법에서 우리는 파르미자니노의 까다로운 우아함과 잠볼로냐의 절묘한 기교를 함께 엿볼 수 있다.” (384쪽)

 

 

▲ 자크 칼로(Jacques Callot : 1592-1635) ▼

- 칼로는 “틴토레토, 더 나아가 엘 그레코와 같이”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인물들과 예기치 않은 광경을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결합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수법을 구사하여 브뢰헬처럼 부랑자, 군인, 병신, 거지, 떠돌이 악사들의 생활 정경(도판 249 <두 이탈리아 광대>, p.385)을” 그렸다. (3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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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미술의 위기(16세기 후반 유럽) 1

18장. 미술의 위기(16세기 후반 유럽)

 

 

▲ 16세기 후반 이탈리아 젊은 미술가들의 문제의식 ▼

- “1520년 경 이탈리아 도시들의 모든 미술 애호가들은 회화가 완성의 극에 달했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레오나르도 등은 그전 세대가 이룩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실제로 해냈다.” (361쪽)

- 젊은 미술가들과 미술 지망생들은 이들을 모방하고 따르는 데 열중했다.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의 유행에 휩싸여 단순히 그의 수법(manner)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보는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매너리즘(mannerism) 시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 모두가 어려운 포즈를 취한 나체들만 모아 놓으면(“미켈란젤로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자세의 나체상을 즐겨 그렸다.”) 그림이 된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었다.” (361쪽)

- 그래서 이 젊은 미술가들은 이전의 거장들과는 달라 보이는 기발하고 색다른 것을 추구함으로써 이전의 거장들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하였다. 물론 이전의 거장들 역시도 이러한 실험적이고도 독창적인 창안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였다. 그래서 “선배들(이전의 거장들)을 능가하려는 이들(젊은 미술가들)의 미친 듯한 노력 그 자체가 그들의 과거의 거장들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였다.” (362쪽)

 

 

▲ 페데리코 추카리(Federico Zuccari : 1543?-1609) ▼

-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다소 재미있는 디자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건축가이자 화가인 추카리가 설계한 얼굴 모양의 창문(도판 231)은 이러한 기발한 창안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보여 주는 좋은 예다.” (362쪽)

 

 

▲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 : 1508-80) ▼

- 추카리와는 달리 “다른 건축가들은 그들의 박식과 고전 작가들에 관한 지식을 과시하는 데 더 열을 올렸는데, 사실 그들은 이런 점에서 브라만테 세대의 거장들을 능가했다. 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박학했던 사람은 건축가 팔라디오였다.” (362-3쪽)

- “도판 232(<비첸차 부근의 빌라 로톤다>, p.363)는 비첸차 근처에 있는 그의 유명한 별장인 <빌라 로톤다(Villa Rotonda)>이다. 이것도 어떤 점에서는 ‘기발한 창안’에 속한다. 왜냐하면 사면이 동일하며, 하나의 중앙 홀을 중심으로 각 면이 신전의 정면 형태를 한 현관을 가지고 있어 로마의 판테온(p.210, 도판 75)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363쪽)

- “하지만 그 구성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할지라도 이것은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부적합한 것 같다. 기발함과 인상적인 효과에 대한 추구가 건축의 일반적인 목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363쪽)

 

 

▲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 1500-71) ▼

- 첼리니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미술가”로서 “피렌체의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였다.

- “첼리니의 태도는 그전 세대가 했던 것보다 더 흥미롭고 비범한 것을 만들려는 당대의 불안정하고 열광적인 노력들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364쪽)

- 이러한 전형을 “몇 안 되는 그(첼리니)의 작품 중에 1543년에 프랑스의 왕을 위해 만든 금제 소금 그릇(도판 233 <소금 그릇>, p.364)”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그릇에서 “첼리니가 만든 매끈하고 우아한 인물 모습은 약간 지나칠 정도로 정교하고 장식적이라” 할 수 있다. (364쪽)

 

 

▲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 1503-40) ▼

- 첼리니와 동일한 태도를 “코레조의 제자였던 파르미자니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364쪽)

- 도판 234(<긴 목의 마돈나>, p.365)의 “작품은 일명 <긴 목의 마돈나>라고도 불리는데 그 까닭은 이 화가가 성모를 자기 나름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나머지 성모의 목을 마치 백조처럼 길쭉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367쪽)

- “그는 인체의 비례를 기묘한 방식으로 길게 늘여놓았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가진 성모의 손, 전경에 있는 천사의 긴 다리, 초췌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펼쳐보고 있는 비쩍 마른 예언자 등은 마치 일그러진 거울에 비친 상처럼 보인다.” “이러한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그(파르미자니노)는 이 그림의 배경에 인체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비례를 가진 괴상한 모양의 높은 원주를 세워 놓았다.” (367쪽)

- “이 그림의 구도는 그가 종래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조화를 기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파르미자니노는 자기가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여진 형태를 좋아한다는 것을 열심히 보여 주려고 했다.” (367쪽)

- 이러한 방식은 파르미자니노의 일관된 방식이었고, 문학에서 고전주의로부터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사실 선배 거장들이 이룩해 놓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엇인가 새롭고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창조하고자 모색했던 파르미자니노를 비롯한 그 당시의 모든 미술가들은 아마도 최초의 ‘현대적인’ 미술가들이었을 것이다.” (367쪽)

- “소위 ‘현대’ 미술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미술도 이들처럼 분명한 것을 피하고 인습적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는 다른 어떤 효과를 이룩하고자 하는 욕망에 그 근본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367쪽)

- ‘현대적인 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에 기초한 해체주의, 아방가르드 쪽 계열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장 드 불로뉴(Jean de Boulogne : 1529-1608) ▼

- 파르미자니노처럼 “선배들을 능가하려고 그처럼 절망적으로 노력”했던 몇몇 뛰어난 미술가들 중의 한 사람이 “이탈리아 이름으로는 조반니 다 볼로냐(Giovanni da Bologna) 혹은 잠볼로냐(Giambologna)라고 알려진 플랑드르의 조각가” 불로뉴이다. (367쪽)

- 도판 235(<머큐리 상>, p.366)을 살펴보자. “그(잠볼로냐)는 여기서 불가능한 것을 성취하고자 하였다. 즉 생명이 없는 물체의 무게를 극복하고 공중을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조각상을 창조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까지 성공하였다.” (367쪽)

- “이 조각상은 아주 교묘하게 균형이 잡혀 있기 때문에 실제로 공중에 떠서 빠르고 유연하게 날아가는 것 같이 보인다.” 이것은 기존의 조각상들이 땅에 힘차게 발을 딛고 서 있는 것과는 반대로 하늘을 날아가는 것처럼 함으로써 정통적인 조각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인지해 주고 있다. 이것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전기의 조각가라면, 심지어 미켈란젤로까지도 그러한 효과는 본래의 무거운 재료 덩어리를 생각나게끔 하는 조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368쪽)

 

 

▲ 야코포 로부스티(Jacopo Robusti : 1518-94, 통칭 틴토레토(Tintoretto) ▼

- “16세기 후반의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바로 틴토레토였다. (368쪽)

- 틴토레토 역시 “역시 티치아노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형태와 색채에 있어서의 단순하 아름다움에 진력이 나 있었다.” (368쪽)

- 틴토레토가 티치아노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그 불만은 “예외적인 것을 만들어 내려는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티치아노의 작품은 성격의 엄숙한 이야기와 성자의 전설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할 만큼 열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368쪽)

 

 

▲ 틴토레토의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도판 236, p.369) ▼

- 틴토레토는 이 그림에서 “성경의 이야기들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그린 사건의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368쪽)

- “이 그림은 성 마르코의 유해를 (‘이교도’인 회교도들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왔던 이야기 중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368쪽)

- “얼핏 보면 이 그림은 혼란스럽고 번잡하다.” (368쪽) 왜냐하면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과 어둠, 원경(遠景)과 근경(近景) 및 조화가 결여된 몸짓과 동작” 때문이다. (371쪽)

- 먼저 이 성경 이야기의 주인공인 <성 마르코>가 이전의 그림과는 달리 무대의 중앙에 위치해 있지 않고 구석으로 배치되어 있다. 또한 성 마르코는 시신으로, 또한 살아 있는 인간으로 이중적인 모습으로 처리되어 있다.

- 또한 양탄자 위에 널브러진 시신(성 마르코)은 “괴이한 단축법으로 그려져 있다.” (368쪽)

- 각 인물들의 동작과 행위 구성 원리는 이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빛의 명암이 이러한 구성의 원리라고 한다면, 성 마르코는 성경 이야기의 중심인물이니까 빛을 밝게 그린다고 하지만, 오른쪽에 배치된 커다랗게 놀란 몸짓을 보이는 남녀는 왜 빛을 밝게 그렸는지에 대한 이유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 이 남녀는 아마도 성인을 보고서 놀라는 몸짓인데, 그들의 시선은 성인을 향해 있지 않다.

 

 

▲ 틴토레토의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도판 237, p.370) ▼

- “런던에 있는” 이 그림은 “음산한 빛과 불안정한 색조가 어떻게 긴장감과 흥분된 감정을 고무시키는지를 보여준다.” (371쪽)

- 이 그림에서 “공주는 마치 그림 속에서 곧바로 우리들을 향해 달려 나올 것 같이 보인다. 한편 주인공인 성 게오르기우스는 일반적인 규칙과는 정반대로 주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배경 속에 멀리 들어가 있다.” (371쪽)

 

 

▲ 틴토레토에 대한 평가 ▼

- “틴토레토와 같은 사람은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했으며 또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그의 그림이 전설적인 장면에 대해서 그가 상상한 바를 전달하기만 하면 그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매끈하고 세심한 마무리 손질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보는 사람들의 주의를 그림의 극적인 사건으로부터 다른 데로 돌려 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았던 것이다.” (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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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새로운 지식의 확산(16세기 초 : 독일과 네덜란드)

17장. 새로운 지식의 확산 (16세기 초 : 독일과 네덜란드)

 

 

▲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업 3가지-북유럽의 평가 ▼

- ①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

- ② “아름다운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하도록 하였던 해부학에 관한 지식”

- ③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품위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고전 시대의 건축 형식에 관한 지식”

- 이러한 지식의 충격은 그러나 건축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왜냐하면 건축은 회화와 달리 대단히 기능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건축물들이 ‘공공’ 건물이었다. ‘공공’이라는 말은 중세 가톨릭교회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건축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이념을 현실화하는 기능적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 그러므로 이탈리아로부터의 “이 새로운 유행”이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자 원했던 군주와 귀족들의 줄기찬 요구에서 비롯”되었지만, “건축가들은 이런 새로운 양식의 요구를 대단히 피상적으로만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원주(圓柱)나 프리즈를 여기저기에 갖다 붙이는 식으로,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풍부한 장식적인 모티프에 약간의 새로운 고전적인 형식을 가미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건축 이념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과시했다. 건물의 본체는 고딕식으로 전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341쪽)

 

 

▲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 1471-1528) ▼

- 그러나 화가들은 건축에서의 기능들에 매어 있을 수 없었다. 이미 반 에이크와 같은 15세기 북유럽 화가들의 현실화(자연을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묘사, 즉 자연의 모방)라는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그 현실화를 새로운 미술 원리로서 자기화하려는 충동과 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뒤러는 이탈리아로의 “여행 중에” “사물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고 알프스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수채화로 옮기기도 하고 만테냐(pp.256-9)의 그림을 연구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공방을 열기 위해서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북유럽의 미술가가 남유럽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기법적인 성과들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343쪽)

 

 

▲ 뒤러의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도판 220, p.344) ▼

- 이 목판화에서 나타난 “뒤러의 상상력과 대중들의 관심은 중세 말엽 독일에서 무르익어 결국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폭발한, 교회 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과 불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343쪽)

- 이 목판화는 “성 요한의 계시록을 묘사한 일련의 대형 목판화”인데, “최후 심판 날의 공포와 그에 앞선 여러 가지 징후와 불길한 조짐들의 무시무시한 광경”을 “힘 있고 강력하게 시각화”시키고 있다. (343쪽)

- “이 위대한 한순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뒤러는 종래의 전통적인 포즈를 모두 버렸다. 살려둘 수 없는 적과 싸우는 영웅을 종래와 같이 우아하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뒤러의 성 미가엘은 일정한 포즈를 취하며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다. 그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큰 창으로 용의 목을 찌르려고 온 힘을 다해 두 손을 사용하고 있고 그 힘찬 몸짓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 이 천상의 싸움터 아래에는 뒤러의 유명한 서명과 함께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이 전개되어 있다.” (345쪽)

 

 

▲ 뒤러의 <풀밭>(도판 221, p.345) ▼

- “자연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던 얀 반 에이크 이래, 지금까지 어떤 예술가가 했던 것보다도 더 끈기 있게, 그리고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뒤러의 목적이었음을 그의 습작이나 스케치를 통해 알 수 있다. …… 예를 들면 뒤러의 토끼 그림(p.24, 도판 9)이나 풀밭의 일부분을 그린 수채화(도판 221)와 같은 것이다.” (346쪽)

- “뒤러는 자연을 모사하는 완전한 기술을 얻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유화와 동판화와 목판화로 삽화를 그려야 했던 성경의 이야기를 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346쪽)

 

 

▲ 뒤러의 <예수 탄생>(도판 222, p.347) ▼

- 고딕 미술은 성경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성경 이야기를 <자연의 모방>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통해 묘사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 <예수 탄생>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둘이 아주 자연스럽게 동화․통일된 것이 뒤러의 <예수 탄생>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러한 결합은 <예수 탄생>에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고딕 미술의 전통은 성경 이야기의 인물들로 나타나는데, 이 “인물들은 정말 작고 거의 중요치 않게 보인다. 이 그림을 보면 낡은 헛간에 쉴 자리를 마련한 마리아가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며 요셉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좁은 물통에 붓느라고 분주하다. 배경에서 경배를 올리고 있는 목동 한 사람을 찾아보려면 대단히 세심하게 그림을 음미해야 하며 또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는 전통적인 천사의 모습을 하늘에서 찾아보려면 확대경이 있어야 할 판이다.” (346쪽)

- 그러나 이 성경 이야기의 인물들의 배경인 “단지 낡고 무너진 담장”과 “이미 허물어진 외양간의 울퉁불퉁한” “금이 간 회벽”, “맞물리지 않은 기왓장들, 부서진 틈바구니에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벽, 지붕 대신 씌운 너덜너덜한 벽,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새”들이 “바로” 이 그림의 “주제인 것”처럼 “꼼꼼히” 묘사하고 있다. (346쪽)

- 이렇게 볼 때, 인물들과 배경의 결합에서 주된 것은 배경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배경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새로운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동판화에서 뒤러는 예술이 자연의 모방을 추구하고 시작한 이래로 고딕 미술의 발전을 총합하고 완성시킨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마음을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부여한 고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346쪽)

 

 

▲ 뒤러의 <아담과 이브>(도판 223, p,348) ▼

- “고딕 미술이 거의 도외시되었으나 이제 관심의 전면으로 부상한 새로운 목적을 바로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인체의 표현이었다.” (347쪽)

- “여기에서 뒤러는 반 에이크의 아담과 이브(p.237, 동판156) 같이 꼼꼼하고 충실하게 묘사된 경우조차도 실제 자연에 대한 단순한 모방이 남유럽 미술 작품들을 돋보이게 하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요소들을 창출해 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347쪽)

- “라파엘로는 이러한 문제에 당면했을 때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아름다움의 ‘어떤 이념’에 비추어 답을 구했는데(p.320), 그 이념은 그가 고전적인 조각과 아름다운 모델들로 수년 간 연구하는 동안에 익힌 것들이었다.” 그러나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확실한 법칙을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그러한 법칙을” “인체의 비율에 관한 고전 시대의 저술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347쪽)

- 뒤러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서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림으로써 인간의 체격을 왜곡시켰다. 평생 동안 몰두했던 이러한 연구의 첫 번째 결과 가운데 아담과 이브를 그린 동판화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아담과 이브>이다. (349쪽)

-다른 한편 “뒤러가 울퉁불퉁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의 어두운 그늘을 배경으로 희고 섬세하게 모델링된 인체의 분명한 윤곽을 돋보이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남유럽의 미술의 이상(가장 아름다운 인간 신체의 표현)을 북유럽의 토양에 이식시킨 최초의 진지한 시도에 감탄하게 된다.” (349쪽)

 

 

▲ 뒤러에 대한 소결론 ▼

- 뒤러의 4개의 작품을 통해서 뒤러의 화가로서의 고민의 진행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 먼저 도판 220의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에서 전통과 현실을 결합시키고자 한 뒤러의 의도가 기계적인 결합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 뒤러는 이러한 기계적 결합을 넘어서서 유기적인 조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그 노력의 일환으로 도판 221 <풀밭>이 나타나게 된다. 이 <풀밭>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경 이야기(전통)를 보다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나타난 작품이 도판 222의 <예수 탄생>이다. 성경 이야기의 일부인 예수의 탄생을 그 당시의 일상생활 속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그런데 성경 이야기의 주된 부분은 이야기 내용의 주체(subject)인 인물들이다. 이러한 인물들을 생명력이 충만한 현실성을 가지면서도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따라야 할 가장 완벽하게 아름다운 존재(Type)인 성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도판 223의 <아담과 이브>이다.

 

 

▲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uünewald) ▼

- “위대함과 예술적인 기량에 있어서 뒤러에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독일 화가”인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이 “화가가 그렸다고 확신되는” “작품들은 통상 ‘그뤼네발트’라는 라벨이 붙게 되었다.” (350쪽)

- “그는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발견들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미술의 이념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한도 내에서만 그것들을 활용했다.” (353쪽)

- “그에게 있어서 미술은 (뒤러처럼) 아름다움의 숨겨진 법칙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목적, 즉 중세의 모든 종교 미술의 목적인 그림으로 설교를 해 주고 교회가 가르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젠하임 제단화의 중앙 패널(도판 224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p.351)은 이 절대적인 목적을 위해서 다른 모든 문제들을 희생시켰음을 보여 준다.” (353쪽)

- 그 예로 “인물상의 크기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십자가 밑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손과 예수의 손을 비교해보기만 해도 그 크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뤼네발트는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하여 온 근대 미술의 법칙들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중요성에 따라서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들로 의도적으로 되돌아간 것이 분명하다.” (353쪽)

-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구세주의 뻣뻣하고 참혹한 모습에는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생각하는 그런 아름다움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뤼네발트는 수난절의 설교자처럼 이 고통스러운 장면의 무서움을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353쪽)

-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근대 미술의 원칙들을 모두 버린 것은 아니다. 그가 필요하다면 이 원칙들을 적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도판 225(<그리스도의 부활>, p.352)이다.

- 이 그림에서 그뤼네발트는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색채들을 통해 “휘황찬란한 빛을 남기고 무덤에서 막 솟아나와 승천하는 것 같이” 보이는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354쪽)

- 다른 한편 “땅 위에 쓰러져 있는 군인들의” 모습 사이에서 원근법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무덤 앞에 있는 군인들과 뒤에 있는 군인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입체성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이 한낱 이야기 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사실임을 강조함으로써 신도들에게 믿음에 대한 각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종교의 목적을 잘 전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 1472-1553) ▼

- "뒤러 세대에 세 번째로 유명한 미술가“가 크라나흐이다. (354쪽)

- 크라나흐는 “해묵은 산림과 낭만적인 풍경을 가지고 있는 알프스 북쪽 산기슭에 매혹되어 있었다.” “1504년에 크라나흐는 이집트로 도피하는 성(聖) 가족을 그렸다(도판 226 <이집트로 피난 중의 휴식>, p.354)” (355쪽)

- “이 시적인 새로운 구상은 로흐너의 서정적인 미술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p.272, 도판 176).” (355쪽)

 

 

▲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 1480?-1538) ▼

- “알트도르퍼는 숲과 산을 누비고 다니며 풍우에 시달린 나무와 바위의 형태를 연구했다. 그가 남긴 많은 수채화와 동판화, 그리고 유화 몇 점(도판 227, <풍경>)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으며 인물이 하나도 없다.” (356쪽)

-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변화이다.” “중세에는 종교적인 테마이든 세속적인 테마이든 분명한 이야기 거리를 다루지 않는 그림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356쪽)

 

 

▲ 얀 호사르트(Jan Gossaert) 또는 마뷰즈(Mabuse : 1478?-1532) ▼

- “독일의 뒤러처럼 적어도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고 노력했던” 16세기 초엽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옛날 장식에 대한 집착과 새로운 것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껶어야만 했다.” (356쪽)

- “도판 228(<성모를 그리고 있는 성 루가>)은” 마뷰즈의 “작품으로서 그러한 갈등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한 예이다.” (356쪽) 이 그림에서는 성경 이야기의 인물들과 그 배경이 따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왜 하필이면 성 루가가 성모상을 그리는 데 겉보기는 화려하지만 외풍이 있을 듯한 텅빈 궁전의 중정에 자리를 잡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되기도 한다.” (356쪽)

- “그 결과 이 그림은 확실히 대단한 매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모델들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조화미(색채를 가지고 인물이나 배경의 구성․배치를 조화롭게 통일시킨 회화의 원리)는 결여되어 있다.” (356쪽)

- 다른 한편, 이 그림은 15세기, 16세기 초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새로운 기법이 기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을 그린 방식은 얀 반 에이크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고, 그 배경은 이탈리아 방식, 즉 “과학적인 원근법에 대한 능숙한 솜씨, 그리고 고전기의 건축에 대한 조예와 능숙한 명암 처리 방법”에 충실히 따르면서 그것을 “과시하려 한 것 같이 보인다.” (356쪽)

 

 

▲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 ?-1516) ▼

- “이 화가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356쪽)

- 그렇지만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미술가들” 중의 한 사람인데, 보스는 “독일의 그뤼네발트와 같이 남유럽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물결에 휩쓸리기를 거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미술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356쪽)

- “그뤼네발트와 마찬가지로 보스는 현실을 가장 신빙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 발전되어 온 회화의 전통과 새로운 수법들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그럴 듯하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보스는 지옥의 광경을 소름끼치게 묘사한 화가로 유명하다.” (356쪽)

- 도판 229-30(<천국과 지옥>)을 보면 알 수 있다.

- “중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괴롭히던 공포심을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형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미술가는 역사상 보스 한 사람뿐일 것이다. 이러한 업적은 아마도 새로운 시대정신이 미술가들에게 그들이 본 것을 재현하는 방법을 마련해 주었고 반면에 구시대의 이념이 의연히 살아남아 있었던 바로 그 순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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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빛과 색채(16세기 초 :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16장. 빛과 색채(16세기 초 :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 16세기 초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미술의 특징 ▼

- 이 시기 이곳의 미술의 특징은 원근법과 맞먹는 빛의 명암을 사용하고 그 빛의 명암을 색채 구성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 빛의 명암을 처음 사용한 화가는 곰브리치가 마사초의 후계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꼽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도판 170, p.261)이다. 피에로는 빛을 “인물들의 형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 내는 원근법과 대등한 중요성을” (260쪽) 지닌 것으로 사용하였다.

- 이 시기 이곳의 화가들은 아마도 남부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인 피에로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만, 그러한 피에로의 영향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들은 빛을 인물들의 구성과 배치의 조화와 통일성의 원리, 수단으로까지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것은 베네치아의 지형적․기후적 특성과 연관 있어 보인다. “사물의 예리한 윤곽을 희미하게 만들고 휘황찬란한 빛 속에 사물의 색채들을 뒤섞이게 하는 환초로 둘러싸인 해변의 분위기가 이 도시의 화가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의 화가들이 해 왔던 거보다 더 신중하고 민감하게 색채를 사용했는지 모른다.” (325쪽)

- 이탈리아 남부 “피렌체의 위대한 개혁자들은 색채보다는 소묘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그림이 색채 면에서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나 한 그림 속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형태들을 하나의 통일된 구성으로 결합시키는 데 색채를 주된 수단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던 화가는 매우 드물었다. 그들은 채색하기 전에 원근법이나 구도로써 그러한 통일된 구성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베네치아 화가들은 색채를 그림 위에 덧붙이는 부가적인 장식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326쪽)

 

 

▲ 야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 : 1486-1570) ▼

- 산 마르코(San Marco) 성당 도서관(도판 207)을 지은 피렌체의 건축가가 바로 산소비노이다. “그는 자신의 양식과 작품을 그 도시 특유의 분위기, 즉 환초로 둘러싸인 해변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화려한 베네치아의 밝은 빛에 어울리도록 완벽하게 적응시켰다.” (325쪽)

 

 

▲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 1431?-1516) ▼

- 도판 208(<성모와 성인들>)을 살펴보자. “그림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도 전에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채들이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326쪽)

- “벨리니는 그림의 질서를 깨트리지 않고 이 단순한 대칭적인 구도 속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성모와 성인들의 전통적인 모습을 그 신성함과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사실적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변화시키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는 페루지노(p.314, 도판 202)가 어느 정도 그랬던 것과는 달리 살아 있는 인물의 다양성과 개성을 희생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페루지노의 인물 못지않게 보다 더 조용하고 아름다운 세계, 즉 이 그림을 꽉 채우고 있는 충만한 따뜻함과 초자연적인 빛이 스며든 세계에 소속된 사람들 같이 보인다.” (329쪽)

 

 

▲ 조르조네(Giorgione : 1478?-1510) ▼

- “조반니가 보여준 모범”처럼 “색채와 빛을 행복하게 사용하여 화면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한” “영역에서 가장 혁명적인 업적을 이룩했던 사람이다. 이 미술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그의 진작(眞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겨우 다섯 점밖에 되지 않는다.” (329쪽)

- 도판 209(<폭풍우>)를 살펴보자. “이 그림은 분명히 화면 전체에 스며 있는 빛과 공기에 의해서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뇌우의 섬뜩한 빛이 그림 전체를 지배한다. 또한 이 그림이 그 시초일 듯싶은데, 그림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움직이고 있는 무대가 되는 풍경이 이제는 단순한 배경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풍경은 그 나름대로 그림의 진정한 주제가 되고 있다.” “사물과 인물을 나중에 공간 속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 땅, 나무, 빛, 공기, 구름 등의 자연과 인간을 그들의 도시나 다리들과 더불어 모두 하나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거의 원근법의 창안과 맞먹는 새로운 영역을 향한 하나의 발돋움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회화는 그 자체의 비밀스런 법칙과 방안을 갖는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329-331쪽)

 

 

▲ 티치아노(Tiziano : 1485?-1576) ▼

- 조르조네의 이 위대한 발견(자연과 인간을 모두 하나로 생각해서 그림의 소재가 되는 모든 것들이 제각각의 진정한 주제가 되도록 하는 회화 기법)의 모든 결실을 얻은 화가로서 “모든 베네치아 화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티치아노였다. (331쪽)

- 티치아노의 “물감을 다루는 솜씨는” “그(티치아노)로 하여금 전통적인 구도의 모든 규칙을 무시하게 했으며 파괴한 듯이 보이는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색채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331쪽)

- 도판 210(<성모와 성인들과 페사로 일가>)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조반이 벨리니의 그림 <성모와 성인들>(도판 208, p.327)보다 불과 약 15년 뒤에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조반니 벨리니의 그림에서처럼 성모 마리아를 그림의 중앙에 두고 시중 드는 두 성인을 대칭되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 성모를 그림의 중심에서 이동시켰으며 두 성인을 이 장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는데 이것은 거의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331쪽)

- 이것은 다가올 근대사회의 특성, 즉 개개인이 모두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된다는 근대사회의 이념인 자유(인물들의 자유로운 배치)와 평등(인물들 누구나 이 장면에 능동적으로 참여, “권위의 상징”인 “열쇠”가 “성모의 왕좌 아래의 계단에” 놓여 있음(331쪽)-이는 범신론의 특성이기도 함)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사람들은 “처음에” 이 “그림이 한 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 예기치 않는 구도는 전체적인 조화를 깨트림 없이 오히려 그림을 생기 있고 활기차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티치아노가 빛과 공기와 색채로써 이 장면을 통일시켰기에 가능하였다.” (332쪽)

- “단순한 깃발 하나를 가지고 성모의 모습과 대칭을 이루게 한” 것은 역사적․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부르주아가 정치적으로 교황청에 대적할 만큼 성장하였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332쪽)

- 도판 212, 213(<젊은 영국인>)을 살펴보자. “티치아노가 당대에 그처럼 큰 명성을 얻은 것은 초상화 때문이었다.” “이 그림에는 레오나르도의 <모나 리자>(도판 193, p.301)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세밀한 입체감의 묘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무명의 젊은 영국인은 모나 리자처럼 신비하게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이 꿈에 잠긴 듯한 눈동자는…… 영혼이 담긴 강렬한 표정으로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 같다(도판 213).” (333-334쪽)

-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은 도판 214(<교황 바오로 3세와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그의 동생 오타비오 파르네세>)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이 그림은” “티치아노가 황제 카를 5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를 떠나 독일로 그의 초상을 그리러 갔기 때문에”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되었다.” (335-337쪽)

 

 

▲ 코레조(Correggio)라 불리운 안토니오 알레그리(Antonio Allegri : 1489?-1534) ▼

- 코레조는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16세기 초기의 이탈리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과감한 혁신가로 평가”되었다. (337쪽)

- “아마도 그는 북부 이탈리아의 인근 도시들에서 레오나르도 제자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의 명암법을 배울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후대의 여러 유파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완전히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명암법에 관한 것이었다.” (337쪽)

- 도판 215(<거룩한 밤>)를 살펴보자. “왼쪽의 복잡한 장면에 대응하는 군상(群像)들이 오른쪽에는 없으므로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성모와 아기 예수에게 빛을 던져 강조함으로써 전체 그림은 균형을 이루게 된다. 코레조는 색과 빛을 사용하여 형태에 균형을 주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발견을 티치아노보다 더욱 잘 활용하였다.” (337쪽)

- “코레조 이후 세대의 수많은 화가들이 수세기 동안 그처럼 반복해서 모방한 이 화가의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가 교회의 천장과 둥근 지붕에 그림을 그리는 장식이다.” (337-339쪽)

- 이 장식의 대표적인 작품이 도판 217(<성모의 승천>)이다. 코레조는 “아래의 본당에 있는 신도들에게 천장이 열려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하늘의 영광을 곧장 바라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빛의 효과를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그의 능숙한 기술로 인해 그는 햇빛을 가득 받은 구름으로 천장을 채우고 그 구름들 사이로 천사들의 무리가 다리를 아래로 늘어트린 채 빙빙 떠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339쪽)

- 도판 216(<성모의 승천 : 파르바 대성당으 천장화를 위한 습작>)을 보면 “코레조가 단지 몇 번의 분필 자국만으로 그처럼 넘쳐흐르는 빛을 암시할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단순하 회화 수단을 구사했는지를 알게 된다.”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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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조화의 달성(16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2

▲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 1449-94) ▼

- “콰트로첸트 말엽 피렌체의 지도적인 화가의 한 사람이었으며,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다.” (303쪽)

- 콰트로첸트 시기의 다른 화가들처럼 성경 이야기(전통)와 현실의 조화를 꾀한 화가이다. 고촐리에 비견된다 할 수 있다.

- “그는 성경 이야기를 마치 그의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를 중심으로 하는 피렌체의 부유한 시민들 사이에서 방금 일어난 사람인 것처럼 재미있게 표현할 줄 아는 작가였다.” (303쪽)

- “도판 195(<성모의 탄생>)는 성모 마리아의 탄생을 묘사한 그림으로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의 친척들이 찾아와서 그녀에게 축하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여기서 15세기 말의 한 화려한 저택의 내부와 상류사회 숙녀들의 의례적인 방문 장면을 보게 된다. 기를란다요는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방법과 눈을 즐겁게 해 주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303쪽)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ounarroti : 1475-1564) ▼

- “16세기(친퀘첸토) 이탈리아 미술을 그렇게 빛나게 한 두 번째 피렌체 미술가는 미켈란젤로였다.” (303쪽)

-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시체를 해부하고 모델을 보고 직접 소묘하며 인체의 비밀을 모두 알 때까지 인체 해부학에 관한 나름대로의 연구를 계속했다.” (304쪽)

- “그러나 인간을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매혹적인 수수께끼 중의 하나로 본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미켈란젤로는 이 하나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겠다는 일념으로 분투 노력하였다. 그의 집중력과 기억력은 대단히 탁월했으므로 얼마 안 가서 그리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자세나 동작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304쪽)

- 미켈란젤로가 “30살이 될 무렵” “피렌체 시는 영광스럽게도 그와 레오나르도에게 시의회의 대회의실 벽면에 피렌체 시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다.” (304-5쪽)

 

 

▲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

- 도판 197, 198(<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을 살펴보자. 이 천장화에서 “미켈란젤로가 후대에게 제시해 준 항상 새롭고 풍요로운 착상들, 그리고 모든 세부를 묘사하는 정확한 솜씨와 그 비전의 장대함을 인류에게 천재의 능력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307쪽)

- 이것을 헤르메티시즘이 가지고 있는 범신론적 성격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신분제 질서로 꽉 짜여진 중세로부터 다양한 개인의 생존과 자유를 보장하는 근대로의 열망을 잘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 곰브리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엄청난 작업조차도 늘 새로운 형상들을 창조하려는 그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이 그림들 사이의 경계에 또 다시 수많은 인물상들을 그려 넣었다.” “이들 놀라운 인물상들은 미켈란젤로가 어떤 자세이든지, 어떤 각도에서든지 인체를 능수능란하게 그리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 준다.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는 이 젊은 운동선수들은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몸을 틀어 돌리고 있으나 언제나 우아함을 잃지 않고 있다.” (308쪽)

 

 

▲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 중 리비아 무녀를 위한 습작> ▼

- 도판 199(<시스티나 천장화 중 리비아 무녀를 위한 습작>)를 보면, “우리는 미켈란젤로가 모든 세부를 얼마나 세심하게 연구하였으며 소묘를 통해 각 인물상들을 얼마나 주의깊게 준비했는지 잘 알고 있다.” (310쪽)

 

 

▲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

- 도판 200(<아담의 창조>)은 도판 198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중앙 부분에 있는 것이다.

- 이 그림을 보면 헤르메티시즘을 단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다. 아담과 The One의 손가락으로 연결되어 있음은 인간의 세계(지상계)와 신의 세계(천상계)가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 두 세계가 상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The One이 “인간답게 힘차고 아름다우며” “의연하고 힘차”게 나타난 것으로 알 수 있다. 물론 The One이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두 세계가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범신론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 ▼

- 도판 201(<죽어가는 노예>)은 도판 200(p.312, <아담의 창조>)와 대비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에서 힘찬 젊은이의 아름다운 육체 속으로 생명이 불어 넣어지는 순간을 묘사한 반면에 <죽어가는 노예>에서는 생명력이 막 꺼지려 하고 육체가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는 순간을 선택했다.” (310-2쪽)

- 그런데 이 두 그림은 삶과 죽음의 단순한 단절과 대비를 표현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 시기로 보면, 중세 봉건 체제의 쇠퇴와 해체, 그리고 새로운 근대의 부상이라는 단절과 그 단절을 통한 역사의 연속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이 역사적 시기와 맞물려서 미켈란젤로 자신의 미술가로서의 지위에 관한 단절과 연속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 <죽어가는 노예> : 중세 봉건제의 쇠퇴와 해체 ; 중세 기독교와 교황청의 시녀로서의 미술가로서 자신의 부정.

- <아담의 창조> : 새로운 근대의 부상 ; 중세 기독교와 교황청 그리고 신학으로부터 독립한 미술가로서의 새로운 삶.

- 이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를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는 존경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성질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대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퍽 의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미술가의 지위는 그가 젊은 시절에 의식하고 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실제로 그는 77세 때에 한 이탈리아 인이 ‘조각가 미켈란젤로 앞’이라고 편지를 썼다고 해서 그 편지를 받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조각가 미켈란젤로 앞이라고 편지를 보내지 말라고 그에게 전하시오. 왜냐하면 여기서 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로 통하고 있으니까…… 나는 공방을 경영하고 있는 화가나 조각인 적은 한 번도 없었소…… 내가 교황들에게 봉사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었소.”” (313쪽)

 

 

▲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 1446-1523) ▼

- 페루지노는 “소위 ‘움브리아 파’의 지도자”로서 “감미롭고 경건한 화풍의 제단화를” 그리던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315쪽) 그리고 라파엘로 산티의 스승이기도 했다.

- “그(페루지노)의 성공적인 작품들 중에는 그가 전체적인 화면의 균형을 깨트리지 않으면서도 공간의 깊이를 묘사하는 방법과 인물들이 거칠고 딱딱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를 구사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작품”이 있다. (315쪽)

- 그 작품이 도판 202(<성 베르나르두스에게 나타난 성모>)이다. 그런데 페루지노가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얻기 위해서 희생시킨 것이 있다. 즉 콰트로첸토의 거장들이 그처럼 정열적인 애착을 가지고 추구했던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어느 정도 포기했던 것이다.” (315쪽)

 

 

▲ 라파엘로 산티(Raffaello Santi : 1483-1520) ▼

- 도판 203(<대공(大公)의 성모>)을 살펴보자. 이 그림에서 “우리는 라파엘로가 페루지노의 인물 유형의 조용한 아름다움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의 어딘가 공허한 듯한 규칙성과 제자의 그림에서 보이는 충만한 생명력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입체감 있게 묘사되어 어둠 속으로 물러나는 성모의 얼굴, 자연스럽게 늘어트려진 옷자락 속에 싸인 육체의 볼륨,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확고하고 애정 어린 자세 등 모든 것이 완벽한 균형의 효과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약간만 변경해도 그것이 전체의 균형을 깨트리게 되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구도에는 긴장감이라든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 이 그림은 마치 이것 이외의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없으며 태초부터 그렇게 존재했었던 것 같이 보인다.” (316쪽)

 

 

▲ 라파엘로의 <요정 갈라테아> ▼

- 이 그림은 일단 신플라톤주의의 경향 중에서도 플라톤의 이데아의 대립 구조를 각 인물들의 구성 배치에 적용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의 대립 구조는 선의 이데아를 중심으로 각각의 이데아들이 대립 쌍을 이루며 원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의 요정 갈라테아는 선의 이데아에 비견된다. 그리고 화살을 갈라테아의 가슴에 겨냥하고 있는 세 명의 큐피드와 헤엄치고 있는 큐피드는 모두 4인데 각각이 대립 쌍을 이루고 있다. 사랑을 나누고 있는 바다의 신 두 쌍이 있고 조개껍질을 불고 있는 해신(바다의 신) 2이 있다. 큐피드들과 해신들은 서로 대립 쌍을 이루고 있는 이데아들에 비견될 수 있다.

- “우리는 이러한 방법을 플라이우올로의 걸작(p.263, 도판 171)에서 보았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그의 해결 방법은 오히려 딱딱하고 둔해 보인다.” (319쪽)

- “라파엘로는 이전 세대의 화가들이 이룩하려고 그처럼 노력했던 것, 즉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완벽하고 조화롭게 구성해 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319쪽)

- 다른 한편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당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린 인물들의 완전한 아름다움이다.” (319쪽)

- 이러한 아름다움이 대단히 가설적이며 이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라파엘로는 그의 스승 페루지노와 마찬가지로 콰트로첸토의 그처럼 많은 미술가들의 야망이었던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어느 정도 포기했던 것이다.” (319쪽)

- 인물 묘사에 대한 이러한 가설적이며 이상적인 방신의 대단히 뉴턴의 가설(예를 들면 힘, 중력 같은 것)과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를 연상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뉴턴은 <과학 연구에 가장 좋고 안전한 방법은 사물의 성질을 부지런히 조사하고 실험에 의해 결정한 다음, 그것을 설명할 이론(가설)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라파엘로도 고대 그리스․로마의 조각상이나 인물화를 많이 관찰했을 것이고, 그러한 관찰로부터 자신의 이상적인 완벽한 인물 모델을 생각해 만들어 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파엘로가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도판 206(<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을 살펴보자. “머리가 약간 부풀어오른 근시안인 교황의 초상에는 이상화된 것이 하나도 없다.” (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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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조화의 달성(16세기 초 :토스카나와 로마) 1

15장. 조화의 달성(16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 16세기 거장(천재)들의 탄생의 역사적 배경 ▼

- 16세기, 즉 ‘친퀘첸토(500년대)’(이와 더불어 15세기를 ‘콰트로첸토(400년대)’라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부른다) “시기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파엘로(Raffaello), 티치아노(Tiziano), 코레조(Correggio)와 조르조네(Giorgione), 북유럽의 뒤러(Dürer)와 홀바인(Holbein) 등 수많은 거장들의 시대였다.” (287쪽)

- 이러한 거장들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조건은 다음과 같다. 먼저 중세 시대가 퇴락해 감에 따라서 신학의 시녀로 있던 여타의 다른 모든 과학(또는 학문)들이 신학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다른 한편 범신론의 영향으로 과학과 수학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미술에서도 이러한 과학과 수학의 발전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에는 미술가들이 원근법의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 수학으로 관심을 돌리고 인체 구조를 탐구하기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갖는 위대한 발견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발견들을 통해서 미술가들의 시야는 넓어졌다.” “그들은 자연의 신비를 탐색하지 않고서는, 또 우주에 감추어진 법칙을 밝히지 않고서는 명성과 영광을 얻을 수 없는 독립적인 거장들이었다.” (287쪽)

-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건축 분야에서 제일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브루넬레스키 시대(p.224) 이래로 건축가는 고전 시대의 지식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고대 건축의 ‘기둥 양식’에 적용했던 법칙들, 즉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식 기둥과 엔타블레이처의 올바른 비례와 치수를 연구해야 했으며 고대의 유적을 찾아가 측량해야 했다.” (288쪽)

- “이 당시 르네상스 건축가가 진정으로 열망했던 것은 건축의 쓰임새와 상관 없이 비례의 아름다움과 내용의 공간성 및 그 조화 자체가 만들어 내는 장대함만을 위해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건물의 실용적인 요구에 집착해서는 성취할 수 없는 완벽한 균형과 균제를 갈망했던 것이다.” (288-9쪽) 그런데 중세에서는 모든 것이 신학의 도구였고, 특히 과학은 일상생활에서의 실용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신학과 종교를 위한 ‘실용적’ 도구 차원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 1444-1514) ▼

- 브라만테는 “전통에 따라 성 베드로가 묻힌 자리에 세워졌던 고색창연한 성 베드로 바실리카를 헐어내고 1506년에 그 자리에 교회 건축의 오랜 전통과 신에게의 봉사라는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짓기로 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289쪽)

- 도판 187(<르네상스 전성기의 예배당 : 템피에토>)의 건축 양식을 보면 중세 고딕 양식에서 거의 탈피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뾰족한 첨탑 양식이 보이지 않고 원과 둥근 곡선 형태의 양식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 1435-88) ▼

- 베로키오는 피렌체의 화가이며 조각가이고,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이다.

- 도판 188-9(<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념상>)을 살펴보자. 이 기마상은 “그가 얼마나 꼼꼼하게 말의 해부학을 연구했으며 또 얼마나 명확하게 콜레오니의 얼굴과 목의 근육을 관찰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랄 만한 것은 투지만만하게 부대의 선봉장으로 달리는 것 같이 보이는 말 탄 사람의 자세이다.” (291쪽)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 1452-1519) ▼

- “그(레오나르도)는 그의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미술가의 임무는 더 철저하게, 그리고 더 열정적으로 더 정확하게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학자들의 책에서 얻는 지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293쪽)

- “레오나르도는 자기가 읽은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권위자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언제나 그것을 실험으로 해결하였다. 그는 자연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느꼈고 창의적 정신으로 이 모든 것에 도전했다. 30구 이상의 시체를 해부해서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기도 했으며(도판 190) 자궁 속에서 태아가 성장하는 신비를 조사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파도와 조류의 법칙을 연구했으며, 곤충들과 새들이 나는 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수년을 보내고 언젠가는 현실화되리라고 확신한 비행기구를 고안하기도 했다. 바위와 구름의 형태, 멀리 있는 물체의 색채에 미치는 대기의 영향, 초목이 성장하는 것을 지배하는 법칙들, 음(音)의 조화 등이 그의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그의 예술의 기초가 되었다.” (293-4쪽)

- “그의 글 가운데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레오나르도가 훗날 갈릴레오가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예견했음을 보여 준다.” (294쪽)

- “그는 그의 미술을 과학적인 토대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가 사랑하는 회화 예술을 비천한 기술로부터 존경 받는 신사다운 작업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294쪽)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

- 도판 191-2(<최후의 만찬>)를 살펴보자. “이 그림에는 동일한 테마를 다룬 이전의 그림들과 닮은 데가 하나도 없다. 이들 전통적인 그림들에서는 사도들이 식탁에 한 줄로 앉아 있고 유다만이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으며 예수는 조용히 성찬을 나누어 주고 있다. 이 새로운 그림은 이전의 전통적인 그림들과 아주 다르다. 이 그림에는 드라마가 있고 흥분이 있다.” (296쪽)

- “12사도들은 제스처와 움직임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는 세 사람씩 네 무리로 자연스럽게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 속에는 너무나 풍부한 질서가 있으며 또한 이 질서 속에는 너무나 다양한 변화가 내재해 있으므로 하나의 움직임과 그것을 받는 움직임 사이의 조화를 이룬 상호 작용을 살펴보려면 끝이 없다(이것은 어쩌면 상품들 사이의 관계와 아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플라이우올로의 <성 세바스티아누스>(p.263, 도판 171)를 설명할 때 논의했던 문제(즉 인물의 구성 배치 문제)를 돌이켜본다면 구성에 있어서의 레오나르도의 업적을 완전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298쪽)

- 로지에더 반 데르 웨이든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p.277, 도판 179)에서 나오는 인물상의 배치와 표정 변화를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이나 보티첼리와 같은 화가들이 각기 자기 나름대로 작품 속에서 회복시키려고 했던 그러한 무리 없는 균형과 조화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298쪽)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 리자> ▼

- “<최후의 만찬>보다 훨씬 더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들자면 그것은 리자(Lisa)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의 한 부인의 조상인 <모나 리자>(도판 193)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98쪽).

- <모나 리자>에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나타난 인물들의 다양한 변화와 표정이 리자라는 한 인물에 포괄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살아 있는 듯한 다양한 표정 변화가 <모나 리자>에서 한 인물의 변화무쌍한 표정 그대로 전이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감탄하게 하는 것은 리자라는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의 마음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299-399)

- “레오나르도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연의 위대한 관찰자인 레오나르도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사람들의 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300쪽)

- “그(레오나르도)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미술가들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 즉 정확한 소묘를 조화로운 구성에 결합하는 것만큼이나 미묘한 문제를 남겨 놓았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300쪽)

- “이탈리아의 ‘콰트로첸트(1400년대)’ 거장들”, 특히 반 에이크(자연의 모방 ; p.241, 도판 158), 만테냐(정확한 소묘법과 원근법 ; p.258, 도판 169)가 “재현한 자연은(자연이 신과 동급이기 때문에) 장대하고 인상적이면서도 그들의 인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오히려 조각상”이나 “어딘가 딱딱하고 거칠어서 나무로 만든 것 같이 보인다.” (300쪽) 다시 말하자면 인물을 세부적으로, 그리고 그대로 묘사하고 재현하고자 할수록 살아 있는 인물들이 아니라 돌처럼 굳어져 버린 인물들처럼 돼 버리는 난점을 이 거장들은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난점을 말끔하게 해결한 사람이 바로 레오나르도였다.

-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는 방식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 가령 윤곽을 그처럼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형태를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이 약간 희미하게 남겨 두면 이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인상을 피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창안으로, 이탈리아 어로 ‘스푸마토(sfumato)’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어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는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가리킨다.” (300쪽)

- 내가 보기에, 이 스푸마토라는 기법은 세부적인 것의 묘사에 있어서 빛의 밝음과 어두움, 그리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차이를 드러내는 원근법을 탁월하게 조화시킨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이 비치는 밝은 쪽과 가까운 쪽은 명확한 상이 드러나는 반면에, 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쪽과 먼 곳은 상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모호한 그 무엇으로 보인다. 이것을 선의 터치 측면에서 보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빛이 비치는 쪽은 가까운 거시에 있는 쪽과 마찬가지로 선을 명확하게 표시하여 그 형태의 경계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 반면에 그림자가 드려지는 쪽은 먼 거리에 있는 쪽과 마찬가지로 선을 불명확하게, 희미하게 처리함으로써 형태의 경계를 허물어서 서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 수 있게 된다.

- 이것은 헤르메티시즘을 가장 완벽하게 현실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헤르메티시즘에 따르면 천상계와 지상계는 ‘명확한’ 존재 사슬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형태’의 존재 사슬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천상계로 갈수록 지상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또한 천상계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신비의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비의 세계는 지상계로 오게 될 때 다양한 변화를 가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 이러한 것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제 <모나 리자>(도판 194)로 다시 돌아가 살펴보면 그 신비스러운 효과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스푸마토 기법을 아주 세심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얼굴을 그리거나 낙서를 해 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표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주로 두 가지 요소, 즉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 둔 부분들이 바로 입과 눈 부분이다. 모나 리자가 어떤 기분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은 늘 붙잡을 수가 없다. 물론 이러한 효과를 내게 하는 것은 이러한 모호함뿐만은 아니다. 그 뒤에는 더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 (301-2쪽)

- <모나 리자> 전체를 보면 모나 리자와 그 배경 사이에는 원근법적인 요소가 있다. 그런데 이 원근법적인 요소는 만테냐의 원근법하고는 차이가 있다. 왜냐 하면 이 원근법에는 빛의 요소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모나 리자의 표정이 빛의 요소와 원근법이 결합․통일되어 있듯이 그 배경도 빛이 있는 쪽은 선의 터치를 명확하게 한 반면에 빛이 없는 쪽은 선의 처리가 희미하게 되어 있다.

- 모나 리자 뒤에 있는 풍경을 보면, 그 왼쪽과 오른쪽 모두를 모나리자와 동일한 거리선상에 둔 것이 아니라 동일하지 않는 거리선상에 배치하였다. “왼쪽의 지평선은 오른쪽의 지평선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림의 왼쪽에 초점을 맞추면 오른쪽에 초점을 맞출 때보다 인물이 약간 더 커 보이거나 혹은 몸을 더 세우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또한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변하는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도 얼굴의 양면이 꼭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302-3쪽)

- 이상의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끈질기게 자연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레오나르도는 어느 선배 못지않게 근실했다. 다만 그는 더 이상 자연의 충실한 노예가 아니었다.” (303쪽) 다시 말하자면 레오나르도는 현실(지상계)에 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현실을 넘어서고자(즉 지상계와 천상계를 결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 “이제 위대한 과학자인 레오나르도는 태초의 형상 제작자들의 꿈과 두려움을 현실로 만들었다.” (303쪽) 이러한 레오나르도의 예술은 철저하게 자연에 대한 실험과 관찰,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도덕-->예술)이라는 칸트의 생각에 상당한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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