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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학 첫날인 지난 토요일(2008년 11월 29일)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에 다녀왔다.
장릉(長陵)은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와 그의 첫째 왕비인 인열왕후 한씨의 무덤이다.
장릉(長陵)/ 파주 탄현면 헤이리에서 금촌 가는 길목에 있다.
장릉은 현재 일반인에게 공개를 하지 않는 비공개릉이다.
고양시민회에서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문화재와 생태답사를 아울러 하고 있고, 이번 장릉 답사도 그러한 일환으로 다녀온 것이다.
나는 답사팀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경험이 제법 많은 시민회에서 어떻게 답사팀을 운영하는지 배우고 싶었다. 더욱이 비공개릉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지 않은가.
영조 때 다시 만들어진 능이다. 백성들의 수고를 던다고 석물을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조각은 참 아름다웠다.
시민회 답사는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하다보니 관광버스도 빌려서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이번 답사에는 총 38명이 참가했고, 20여 명의 아이들이 함께 했다.
일반 무덤의 상돌처럼 생긴 것은 왕릉에서는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한다. 제수를 차려놓는 공간이 아니라 왕 또는 왕비의 혼이 나와서 노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밑에 북처럼 생긴 받침돌은 '북석' 또는 북'고'자를 써서 '鼓石'이라고 한다. 고석에 새겨진 귀면상이 생동감이 있다.
답사에서 강사분은 모두 세분이었는데, 첫째 강사는 능과 관련된 문화재에 촛점을 맞췄고,둘째 강사는 인조와 관련된 역사에 셋째 강사는 생태에 촛점을 맞춰 강의를 했다.
물론 아이들을 데리고 하는 답사라 어려움이 많았다. 갑자기 추워진 쌀쌀한 날씨도 답사를 어렵게 했다.
설명을 듣는 답사 일행/ 아이들이 많았다.
2.
인조는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여 신하들과 군대가 보는 앞에서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 태종에게 항복의 예인 삼배구고두례(세번 절하고, 한번 절할 때마다 머리를 세번 땅에 대는 항복의식)를 행하였던 임금이다.
인조는 살아생전 2번의 큰 전쟁을 겪었고, 자신을 임금으로 만든 반정공신이 일으킨 반란인 '이괄의 난'으로 공주까지 피난 가는 등 임금노릇을 평탄하게 하지 못한 임금이니 동정을 받을 만도 하다.
망주석/ 혼이 망주석에 붙어 있는 세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데 인조를 비호감으로 여기는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얼마 전에 끝난 sbs의 드라마 '일지매'에서도 인조(김창완 분)를 비겁한 악인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최강칠우에서도 인조는 비호감이었다.)
인조에 대한 나의 비호감은 상당 부분 서인세력에 대한 비호감에 힘입은 바 크지만, 인조 자신의 캐릭터 또한 나에겐 비호감이다.
문인석
무인석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에 참여한 것은, 광해군이 자기 동생(능창군)을 역모로 몰아 죽음을 내렸으니, 그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고, 소현세자빈인 강빈을 직접 죽였으며,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당시 12세, 8세, 4세)을 제주도에 유배보낸다.
세 손자는 제주도에 유배가서 다음 해 봄에 큰 손자 석철이 죽고, 그해 12월 둘째 석린도 죽는다. 그러고 보면 인조는 비호감을 넘어 참 대단한 인간이다. 큰 손자 석철의 죽음에 대하여 심지어 사관까지도 이렇게 썼다고 한다.
'사신은 논한다. 석철이 역강(逆姜, 강빈)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손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장독(瘴毒)이 있는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결국은 죽게 하였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의 묘 곁에다 장사지낸들 또한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돌에 새겨진 조각은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3.
인조를 얘기하면서 서인세력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서인세력은 주로 기호(경기도와 충청도)지방에 살면서 대대로 부귀를 누려온 집안들 중심이니 한 때(선조, 광해군) 권력에서 멀어졌다고 해도, 왕조가 망하지 않는 한 언젠가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는 그런 특권층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뒤에서 본 장릉
권력에서 밀려난 이 특권 세력은 광해군의 인목대비에 대한 폐비사건을 패륜으로 몰고,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등거리 실리외교를 은인의 나라 명나라에 대한 배은망덕으로 몰아 결국 그것을 명분으로 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일거에 권력을 장악한다.
자신들의 명분을 강조하기 위해 강대한 청나라를 무시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여, 결국 정묘, 병자 양대 호란을 겪게 된다.
참도/ 제사를 받들러 오는 신하들이 조심스럽게 걸을 수밖에 없도록 박석을 울퉁불퉁하게 깔아놨다.
아까 말한 인조가 항복의식인 삼배구고두례를 행할 때 머리를 땅에 박을 때마다 멀고 높은 자리에 위치한 청태종이 그 소리가 자신에게 들리지 않으면, 소리가 들릴 때까지 다시 하라고 명령하여 결국 인조 머리가 깨져 피가 철철 흘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고, 요즈음 나오는 어린이용 문고에도 그렇게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은 역사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있는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사초에도 그러한 기록은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러한 야사를 퍼트린 것은 집권세력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병자호란이 자신들의 무능에 의한 것이란 사실을 은폐하고, 백성들에게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주기 위한, 일종의 자신들의 명분을 살리기 위한 역사왜곡이라고 생각된다.
이들은 또한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청나라 연호 대신에 명나라 연호를 공공연하게 썼다. 예를 들면 명나라 마지막 연호인 숭정 기원후 104년 따위이다.
비석 뒷면/ 숭정기원후 104년이라는 비가 세워진 연대가 적혀있다.
사실 명나라는 조선에 대하여 더 치욕스럽게 대한 나라이다.
조선의 사신은 중국에 가면 황제를 제대로 접견을 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명나라 관리에게 엎드려 매달리며 구걸을 하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서인세력은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냈다 하여 끝까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보인다고 하였다.
미공개릉이라 사람들이 없어 고즈넉하기는 하다.
혹시 옛날 무덤을 갈 기회가 있으면 비석을 자세히 보시라.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000라고 시작하는 비석을 본 기억이 있으리라. 여기서 유명은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는 有名이 아니라 명나라에 속한 조선국이란 뜻이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어륀쥔지 뭔지 하는 짓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가 보다.
그동안 산국을 따러 갈 기회가 없었다.
어제는 맘먹고 산국을 따러갔다.
이왕 산국을 따는 길에 후배 태하랑 함께 하기로 하고, 답사를 겸하기로 했다.
이곳 고양시보다는 아무래도 자연이 덜 훼손되지 않은 파주가 산국이 더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윤원형과 정난정의 무덤이 있는 파주 교하를 선택했다.
정난정의 무덤/ 첩의 몸으로 정경부인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남편 윤원형 무덤 바로 옆에 있다.
파주시청 홈페이지 안내는 참으로 불친절했다.
윤원형네 집안 무덤은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넓이만도 22만평에 이른다고 하는데,
홈페이지가 알려주는대로 따르다가 목적지를 가운데 두고 크게 한바퀴 돌았다.
윤원형과 정난정, 그리고 문정왕후.
그들의 극적인 삶만큼이나 TV 사극에 여러 번 등장했던 인물들이다.
일명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은 파주시에서 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안내도조차 없다.
파평윤씨는 조선의 대표적인 왕비족이다.
특히 이곳에 있는 윤번(정정공)의 후손 중에 3명의 왕비가 나온다.
그러니 그 위세가 짐작하고 남음이 있겠다.
조선 전기의 왕실혼인도/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가 윤번의 따님이다. 그리고 중종의 비인 대윤의 장경왕후와 소윤의 문정왕후가 모두 윤번의 후손이다.
윤번을 중심으로 가계도를 그리면,
윤번 --- 사윤(士昀, 2번째 아들) - 보(甫) --- 장경왕후(보의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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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임(보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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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흔(士盺, 3번째 아들) - (계겸, 사흔의 둘째아들) --- 문정왕후(계겸의 증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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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원형(문정왕후의 4째 동생)
- 정희왕후 윤씨
이와 같다. 즉 윤임과 윤원형은 9촌 관계이고, 윤임이 아저씨다.
그러나 윤원형 세력에 의해 윤임과 그의 세 아들이 사형을 당했다.
자신의 조카가 왕위(명종)에 오르면서 윤원형은 승승장구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른다.
정난정은 첩에서 정경부인으로 신분상승을 한다.
윤원형의 무덤/ 비석 뒤로 숨어 있는 무덤이 정난정의 무덤이다. 윤원형과 정난정은 스스로 자살하였기 때문에 삭탈관직만 되고 후손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문정왕후의 9년간에 걸친 섭정이 있었고,
유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승과를 부활하였고,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서산대사나 사명대사는 이때 승과 부활로 승과에 급제한 승려들이다.)
윤원형은 권력을 한손에 잡았고,
정난정은 첩에서 정경부인이 되었으니
그 과정에서 무리가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기와 원한 또한 막대하였을 것이다.
물론 동정 따위를 하자는 게 아니다.
윤원형이 권력을 장악한 동안 축재하여 서울에 16채의 저택이 있었다고 하는데 동정할 이유가 뭐가 있으랴. 다만 권력을 장악한 자들에 대하여 믿음이 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폄하하였던 권력자들 또한 믿지 않을 따름이다.
이곳 묘역에 있는 무인석
이곳 정정공파 묘역을 들러보니 의외로 무인석이 많다.
무덤 앞에 세우는 인물상은 왕실이 아니면 무인석을 세울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문인석 대신에 무인석을 많이 세웠다.
권력의 중심이면서도 그 권력의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를 하는 것은
그때에도 종종 있었나보다.
윤지임의 무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아버지 무덤이다. 남의 처첩을 가로채는 등 전횡을 많이 했지만, 아들과 달리 외척은 정치와 멀어야 된다는 신조로 살았다고 한다. 덕분에 후손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의정을 지낸 이 치고는 초라한 윤원형의 무덤과 달리 그의 아버지 윤지임과 그의 큰형 윤원필의 무덤은 아주 당당하다.
정정공 윤번의 묘(뒷편)와 그의 부인 인천이씨의 무덤/ 인천이씨는 따님(정희왕후)이 왕후가 된 후 죽었기 때문에 남편보다 장명등이 더 장대(민간 무덤에서 가장 크다고 함)하다고 한다.
산국은 어떻게 됐을까.
이상하게 이곳에서 그렇게 많이 돌아다녔는데도 산국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음주에 산국 따러 또 갈 수 있을까.
그리고 이곳은 넓은 산들이 높지도 않고, 포장되지 않은 길들이 능선에서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산책이나 자전거 타기 참 좋을 것 같다.
가장 찾기 쉬운 방법은 교하 이마트 안쪽 마을에서 산으로 넘어가는 길(막힌 것 같지만 있음)이 있는데, 그리로 넘어가면 된다. 워낙 넓으니 혹시 가게되면 먹을 것 싸가지고 가시길...
지난 토요일(7월 8일) 난 여주 한국노총 수련원에서 개최된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참석차 가는 길에 임사홍 묘소에 들렸다. 임사홍 묘는 명성왕후 민씨 생가 바로 옆에 있다.
글을 쓰려고 일부러 들렸고, 다녀와서 바로 쓰고자 했는데,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참석했던 (정신적인) 후유증이 커서 쓸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임사홍은 유자광과 함께 연산군 시절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내 취미 중 하나인 고무덤, 고적(古蹟)을 답사를 하다보면 이전에 알고 있던 상식이 오히려 의심이 들 때가 많다. 특히 역사적으로 패자의 무덤에서는 더 많은 이면을 생각하게 된다. 임사홍의 경우도 그렇다.
연산군의 총신 임사홍은 연산군이 폐위되는 중종반정 와중에 거리에서 반정군에 의해 맞아 죽는다. 무덤에 묻히고서도 또 한 번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리고 간신열전에 실릴 정도로 대표적인 간신으로 낙인 찍혀 끝내 복권되지 못했다.
대단한 명문가 출신인 임사홍
무지막지한 간신으로 꼽히는 임사홍은 의외로 대단한 명문가 출신이다. 아버지 임원준은 3정승 바로 밑인 종1품 좌찬성을 지냈고, 임사홍 자신은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주사위가 되었다. 그 뿐인가. 큰아들 광재는 현숙공주에 장가들어 예종의 부마가 되었고, 둘째 아들 숭재는 휘숙옹주에 장가들어 성종의 부마가 되었다. 이렇듯 임사홍 가문은 왕실과 이중 삼중으로 결혼한 대단한 명문가이다.
임사홍은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고, 성종의 명에 의해 월산대군 신도비문을 지었을 정도로 문장에 능했으며, 글씨 또한 뛰어나 촉체(蜀體)를 잘 썼고 특히 해서(楷書)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가 남긴 글씨는 <노문광공사신신도비명(盧文匡公思愼神道碑銘)>, <박중선묘비명(朴仲善墓碑銘)>, <이계손묘비명(李繼孫墓碑銘)>, <한확묘비명(韓確墓碑銘)>, <영원윤호묘비명(鈴原尹壕墓碑銘)>, <서거정묘비명(徐居正墓碑銘)> 등이 있다. 그리고 중국어에도 능통해 역관들을 교육시킬 정도였다.
이렇듯 다재다능했던 임사홍이 희대의 간신으로 몰린 것은 갑자사화의 주역이었고, 그 자신과 아들 숭재가 연산군에게 미희들을 뽑아 올리는 채홍사 역할을 맡았기 때문일 것이다.
임사홍 아버지 임원준의 무덤
선비들을 죽인 갑자사화의 주역
연산군 시절에는 크게 두 번의 사화가 있었으니 연산군 4년에 있었던 무오(戊午)사화와 동 10년에 있었던 갑자(甲子)사화이다. 무오사화는 그 유명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록에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당시 사림이 대거 죽음을 당한 일대 사건이었다. 조의제문은 조선 사림의 시작(宗祖)이랄 수 있는 김종직이 세조 3년에 지은 것으로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실은 데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음을 당한 초나라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내용인데 단종을 죽인 세조를 은근히 빗댄 것이다. 세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으면 그 후손인 연산군의 정통성도 문제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유자광 등 훈구파는 문제를 확대해 김일손과 김종직의 제자들 등 사림을 대역죄로 몰았으며, 김종직을 부관참시(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목을 치는 형벌)하였고, 그의 제자들을 대거 죽였다.
갑자사화는 임사홍과 유자광이 주동이 된 사화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을 훈구파 사림 할 것 없이 대거 죽인 사화이다.
역사기록은 성종이 폐비 윤씨 건을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함구하라고 유언하였는데 임사홍이 폐비 윤씨 죽음의 비밀을 연산군에게 알리고, 외할머니를 궁에 들어오게 하여 그 유명한 피 묻은 금삼(비단저고리 소매)을 보였고, 생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안 연산군이 분노가 극에 달해 관련자들을 모두 죽인 사화라고 한다.
임사홍의 무덤과 문인석/ 역적의 무덤이라지만 석물도 갖추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역사기록
앞서 말한 대로 난 무덤을 살피면서 역사를 다시 볼 때 믿기 어려운 구석을 많이 본다.
조선시대 사화들 특히 연산군 시절 또는 중종, 명종 시절의 사화는 대부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에서 훈구파에 의한 사림파의 (피의)숙청이라는 형태를 띤다. 선조 이후에는 사림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사림을 숙청한 훈구파는 조선 말까지 복권이 안 되거나 간신, 소인배로 낙인이 찍힌다. 유자광, 임사홍, 남곤, 심정, 김안로, 윤원형 등등이 대표적이다.
역사 기록대로라면 이들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사림이 모두 옳은 것인가? 거기에도 의문이 든다.
조의제문을 쓴 사림의 祖宗(시조 할아버지쯤으로 이해하시길) 김종직은 제문을 쓴 지 불과 3년 후인 세조6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종 때에는 벼슬이 형조판서에까지 이른다. 정말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사림 정신을 지켰다면 과연 세조6년에 과거를 볼 수 있었을까?
정사(연산군일기)는 임사홍이 성종의 유지를 깨고 연산군 10년에 생모 파평윤씨의 일을 꺼내 무도하게 많은 사람을 죽게 하였다고 하는데, 사실 이 기록 또한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연산군은 임금에 즉위하던 그 해 전남 장흥에 귀양살이 하던 외할머니 신(申)씨와 외삼촌 윤구를 석방시켜 서울로 돌아올 수 있게 조치한 바 있다. 따라서 생모의 일을 임금이 되고 10년이나 지나 임사홍의 발설에 의해 비로소 알았다는 것은 이치상 맞지 않는다.
연산군만 문제 있는가
중종반정 세력도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대표적 간신이랄 수 있는 유자광이 반정 1등 공신으로 책봉되었고, 이후 사림에 의해 유자광이 탄핵을 받을 때도 역사적으로 후한 평가를 받는 성희안과 같은 반정 공신도 끝까지 그를 비호했다고 한다. 내 솔직한 심정은 반정세력이나 임사홍이나 그저 ‘그 나물에 그 밥’으로 보인다.
‘왕의 남자’를 계기로 연산군에 대해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시도가 있는 것 같다. 어찌 됐던 사료(史料)를 다양(?)하게 살펴보아도 연산군은 폭군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이나 다른 임금은 엄청 달랐는가.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연산군이 주색에 빠진 황음무도(荒淫無道)로 비판받는다면 그 아버지 성종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성종은 수시로 민가로 나가 주색을 즐겼다고 한다.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와 관계가 나빠진 것도 그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더 나아가 복잡한 남자관계가 문제가 되어 사형을 당한 그 유명한 어우동과도 관계를 맺었다는 야사가 전해오고 있기도 할 정도이다.
성종뿐만 아니라 성종시절에는 사대부나 서민 할 것 없이 퇴폐풍조가 만연하였다고 한다. 어우동은 그 희생물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어우동의 어머니는 딸을 변호하기를 ‘성욕이 없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 아이는 조금 더 셌을 뿐인 걸’이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적어도 연산군 시절과 같은 조선 초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교 의식으로 푹 절은 도덕적인 나라는 아니었던 것 같다.
역사가 있다면 그래도 단죄해야 마땅
앞의 글이 임사홍을 변호하는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난 그를 변호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다만 그를 간신으로, 대역죄인으로 몰아간 세력을 믿지 못할 뿐이다.
임원준의 무덤에 있는 무인석/ 앞에 서 있는 아내와 비교할 때 얼마나 큰가?
난 사실 임사홍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조차 놀라웠다. 반정의 와중에서 맞아 죽고, 500년 동안 간신으로 낙인찍혔다면 무덤조차 쓸 수 있었겠는가 하는, 나아가 무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후손이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임사홍의 아버지 임원준의 무덤 때문이었다. 임원준의 무덤(여주군 향토유적 12호)은 다른 무덤과 달리 문인석이 아니라 무인석이 서 있다. 왕릉이 아니고는 무인석이 있는 사대부 무덤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곳은 무인석이 있고, 생김도 왕릉의 무인석과 흡사하다. 뿐만 아니라 크기도 왕릉에 있는 것처럼 어마어마하게 크다.
난 임원준의 무덤을 보면서 임사홍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교만했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권력이 막강하였던 것은 물론이었겠지만 왕릉에나 썼음직한 거대한 무인석을 자기 아버지 무덤에 버젓이 세우다니... 역사의 패자에게 흔히 드는 동정심이 싹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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