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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를 내면서

「코뮤니스트」 12호를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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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 선언 이후 8개월, 세계 자본가계급의 모든 처방에도 재앙은 더욱 악화하고 있다. 겨울을 앞둔 지금은 새로운 대유행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위기는 코로나19 위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팬데믹이 방아쇠를 당겨 세계 자본주의를 강타했다. 위기가 폭발한 지 채 몇 개월이 되지도 않아 자본주의 체제의 분열과 무능력이 확인되었다.

 

이 재앙의 부담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어깨에 무겁게 떨어졌다. 자본주의 세계는 온갖 종류의 사회적 반란과 전쟁 위협이 고조되고 있고, 세계 곳곳에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위기는 계급 대결의 새롭고 전례 없는 가능성과 경로를 열어주었다. 이번에도 ‘코뮤니스트 혁명이냐 야만이냐’의 의제가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에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선 투쟁은 세계 곳곳에서 지금보다 훨씬 자주, 치열하게 벌어질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 반란은 시도조차 못 하고 K방역에 방어적 계급 행동마저 제한당하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2020년 코로나19 위기의 한복판에서 한국 노동자들은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이했다. 물론 2년 전 러시아혁명 100주년/87년 노동자 대투쟁 30년에도 (반성이나 성찰이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투쟁하는 소수 노동자만이 노동계급다운 행동을 이어가고 있다.

 

「코뮤니스트」 12호는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국제주의-코뮤니스트의 원칙으로 지금의 정세를 바라보고 투쟁의 전망을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는 세계의 혁명 세력(특히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과 국제 노동계급의 투쟁 흐름에 주목하면서도 한국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발전과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위해 길고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으려 한다. 계급투쟁이 고조되고 집중되는 곳에서부터 일상의 계급의식과 내부 모순이 생기는 곳까지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투쟁의 최종 목표를 밝힐 것이다.

 

 

□ 전태일 열사 50주기, 노동운동 전망에서는 민주노조운동을 넘어선 코뮤니스트 노동자 운동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필자는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원인 분석과 노동조합 수준을 넘어서는 새로운 노동자 운동을 제안한다.

 

"50년 전 전태일 열사의 외침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열사의 외침은 노동운동에서는 민주노조운동으로 이어진 계기가 되었다. [ … ]

 

하지만 이제 민주노조는 노동자의 이해와 요구 대신 조합원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 … ]

 

50년 전 전태일 열사의 항거가 민주노조운동으로 이어졌듯이, 계급적 소수파의 투쟁과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직접행동만이 민주노조운동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와 맞설 코뮤니스트 노동자 운동, 당 건설의 기반이 될 것이다."

 

  □ 특집. 자본주의 위기 : 코로나19 팬데믹과 계급투쟁 전망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맞아 다소 무겁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현 정세를 이해하기 위해 ‘자본주의와 전쟁’, ‘전염병’, ‘백신 전쟁’, ‘자본주의 해체기’ 등에 관한 세 편의 글을 정독하기를 권유한다.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선 계급투쟁'과 '계급투쟁 전망'에서는 노동계급만이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모든 투쟁은 위기의 근본 원인인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으로 발전해야 하고, 반(反)자본주의가 아닌 코뮤니즘을 대안으로 투쟁하자고 주장한다.

 

"노동계급의 주적은 부르주아 국가에 있고 진정한 바이러스는 자본주의 체제다. 그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상황에서도 노동자를 착취하고 노동자에게 위기를 전가하는 자본가와 그 대리인들이다.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위기와 고통, 바이러스 대유행의 치명적인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모든 민족주의, 애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국제적으로 연대하여, 노동계급 공동의 이해관계를 위해 국제적으로 투쟁하는 것이다. 생산수단이 더는 자본가나 국가의 손에 있지 않고 사회화된 사회를 위해, 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닌 인간의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사회, 생산과 분배가 인류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 국제정세에서는 '미국 대선'에 관한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의 입장을 번역해서 실었다. 이 입장은 선거 이전에 작성되었지만, ‘당선 예측’이 아니라 부르주아 선거(서커스)의 본질을 밝힌 글이라서 선거 이후 계급투쟁에 계속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경찰 개혁에 반대한다. 자본주의의 종식을 위하여'는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 벌어진 반(反) 경찰 투쟁에 대한 코뮤니스트 관점의 글이다.

 

"경찰을 해체하여 다른 이름으로 하는 다른 기관으로 대체하는 것은 ‘급진적’인 어떤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것은 근본적 개혁이 아니라 폐지와 다를 바 없다. 경찰 폐지 운동이 지닌 문제점은 폐지에 대한 관념이 아닌, 그러한 구조가 자본주의 내에서 폐지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는 경찰이 그것의 자본주의적 본질과 분리될 수 있으며, 자본주의 내에서 파괴될 수 있는 조직이라는 가정을 필요로 한다. 경찰은 단지 부르주아지의 도구로서 존재할 뿐이며, 자본의 이해관계를 변호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코뮤니스트는 알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그 기능을 필요로 하는 한 경찰은 존속해 나갈 것이다. 경찰 폐지론은 별개의 목표가 될 수 없으며, 혹은 코뮤니즘의 ‘점진적 발전’으로 나아가는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가 붕괴하여야만 비로소 경찰이 폐지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계급적 노선을 따라 조직되어야만 한다. 경찰 폭력을 계급 문제라기보다 인종 문제로만 다루는 것은 본질적으로 계급협조를 수반한다. 이는 흑인을 계급 지위와 상관없이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거대한 덩어리로 간주하는 것이다. [ … ]

 

경찰 폭력을 계급적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인종 문제의 결과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노동자계급과 기타 소수 민중의 이해를 노동자 전체의 문제로 바라봐야만 한다."

 

"자본주의가 종식되어야만 경찰이 폐지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조직하고, 국제주의 혁명당을 창설함으로써만 자본주의는 무너질 수 있다. 점진적 개혁이라든지 투표를 통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코뮤니스트로서 경찰 폭력으로부터 투쟁하는 이들을 지지한다. 그러나 조직화한 노동자계급투쟁이 없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지금은 중요하다. 시위에서 계급투쟁의 요소가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긍정이지만, 단결하지 않으면 물거품이 되고, 해방을 위한 어떤 장기적인 목표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 특집.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부 논쟁(3)에서는 그동안의 논쟁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토론, 논쟁 그리고 연대⦁단결을 전망했다. 이번 호에도 이 글이 가장 깊고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이야말로 현재 세계 혁명 세력의 수준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쟁점을 보여주기에 어려운 글이지만, 정독해줄 것을 권한다.

 

"이번 논쟁(3)에서는 「코뮤니스트」 11호(2020년 4월) 이후 5~6개월 동안 팬데믹 위기가 중첩되면서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부의 논쟁도 이와 무관하지 않고, 그동안 대립 구도가 절충을 통하지 않고 더욱 깊고 첨예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몇 가지 특징적 논쟁을 살펴보자. [ … ]

 

셋째, ICC가 다른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 특히 ICT에 대해 계급 정체성 문제와 당 문제를 직접 제기하며 핵심적 논쟁 의제를 쏟아낸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넷째, 그러나 논쟁이 시작된 “혁명인가 전쟁인가”의 중심의제는 ICC가 전쟁을 ‘세계적 혼돈’으로 대체하면서 이윤을 강조한 ICT 등의 입장과 혼돈, 야만 등의 질적인 차원이라는 인류 문명 차원의 ICC 대립구조는 앞으로도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팬데믹 위기가 자본주의 위기,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전망, 맑스주의와 코뮤니즘 원칙에 굳건히 서 있는 젊은 코뮤니스트들의 성장과 발전, 계급 정체성을 회복하는 혁명적 노동계급의 복원은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그 과정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스트들의 연대, 단결, 통일을 위한 자기반성, 상호비판이 계속될 것이다."

 

이외에도 「코뮤니스트」 12호에는 코뮤니스트 정치,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현장의 목소리까지 많은 글이 실려 있다.

 

 

자본주의 쇠퇴기-코로나19 재앙의 시대에 「코뮤니스트」를 발행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코뮤니스트 정신을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제대로 부활시킬 것을 다짐한다.

 

모든 지배계급을 코뮤니스트 혁명 앞에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848년, 코뮤니스트 선언)

 

모든 국경과 조국을 넘어서서, 영원한 봉화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비칠 것이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1920년,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강령)

 

미래는 코뮤니즘의 것이다! (1933년, 코뮤니스트 좌파, 빌랑)

 

 

 

2020년 11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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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20년 12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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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20년 12호가 나왔습니다.

 

 

"미래는 코뮤니즘의 것이다!"

 

 

□ 코뮤니스트 12호를 내면서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전태일 열사 50주기, 노동운동 전망    

▸민주노조운동을 넘어선 코뮤니스트 노동자운동을 위하여   | 윤태상 

▸수많은 김용균이 있던 그 자리   | 김경진

 

 

□ 특집. 자본주의 위기 : 코로나19 팬데믹과 계급투쟁 전망

▸자본주의 위기 : 코로나19 팬데믹과 계급투쟁 전망   | 이형로 

▸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선 계급투쟁   | 해방 

▸자본주의, 전쟁, 그리고 전염병   | A Free Retriever

▸백신 전쟁: 자본주의는 치료법 개발에 방해   | 국제코뮤니스트흐름  

▸코로나19 팬데믹과 자본주의 해체기에 관한 보고서   | 국제코뮤니스트흐름   

 

 

□ 국제정세

▸트럼프와 바이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잘못된 선택   | 국제코뮤니스트흐름   

▸[미국 대선] 선거 서커스 반대! 계급투쟁을 위해!   | 국제코뮤니스트당 

▸경찰 개혁에 반대한다. 자본주의의 종식을 위하여   | 국제주의노동자그룹

▸노동자계급이 핵심인 이유   |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 코뮤니스트 정치

▸임신중지를 범죄로 낙인찍는 부르주아 정부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부르주아 정부의 부동산정책 허구   | 윤태상 

▸부르주아 정부의 디지털/그린 뉴딜은 전형적인 자본의 이윤추구 정책   | 윤태상 

 

 

□ 코뮤니스트 정치 원칙

▸노동자정당의 반혁명적 본질과 공동전선 비판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 이형로 

 

 

□ 문화. 김용균 동지 2주기 

▸김용균이라는 빛   | 우창수

▸비극을 위하여   | 임성용

▸나에게 돈은 목숨이다   | 봉윤숙

▸비정규   | 최지인

 

 

□ 특집.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부 논쟁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3)   | 오세철 

 

 

□ 세계혁명당 건설을 위하여

▸우리는 모든 제도권 정당에 반대한다   | 국제코뮤니스트경향

▸프롤레타리아 국제정당을 위해   | 국제코뮤니스트경향 

 

 

□ 이론. 서평

▸카피에로와 맑스: 요약된 「자본」?   | 국제코뮤니스트경향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

▸1940년: 레온 트로츠키 암살 - 우리가 잊지 못하는 날   | 국제코뮤니스트경향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   | 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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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격 :  15,000원

 

□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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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선거 서커스 반대! 계급투쟁을 위해!

 선거 서커스 반대! 계급투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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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르주아 선거는 노동자를 똑같이 속인다. 투표가 이 자본주의 정치, 경제, 사회 체제의 틀 안에서 노동계급의 생활 조건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한 도구라는 것이다.

 

거짓말에는 항상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붙는다. 하지만 정치권력은 지배계급, 즉 대기업, 금융, 지주 같은 부르주아지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어떠한 것도 지배할 수 없다.

 

정치권력은 이 사회를 통치하는 계급인 부르주아지가 국가기구를 통해 주로 노동계급에 행사한다. 여기서 국가기구는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중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의 지배와 억압의 도구로서 주인인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행사된다.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어 국회의원, 시의원의 숫자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들은 지금과 같은 인류 재앙의 시기에 프롤레타리아에 불리한 법(사회보장, 코로나19 재난지원금 등)을 통과시켰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의 국가기구와 언론에 대한 조종⦁통제는 선거와 선거 참여 정당들이 여전히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는 다음 정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지배계급에 보장한다.

 

지금까지 선거전에 뛰어들었거나 참여하고 싶은 정당들은 부르주아지 편에 서기 위한 유일한 선택을 했음을 공표해왔다.

 

하지만 우리 혁명적 코뮤니스트들은 “선거 준비냐, 혁명 준비냐”를 현수막으로 내걸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한 표”가 삶의 조건을 개선할 것이라는 사기에 속으면 안 된다, 투쟁이 아닌 투표로 우리의 주장(임금삭감 반대, 실업증가 반대, 인종차별반대 등)을 관철시킬 수 있다고 속이는 자들의 거짓 약속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설령 노동자 편에 서서 수백만 표를 얻는 정당이 있다 하더라도 현 정치, 사회 체제의 본질을 바꾸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그들은 항상 의회 내에서 소수에 속할 것이고, 만약 그들이 터무니없이 다수가 된다면, 지배계급은 노동자에 대한 자본 독재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의회 자체를 폐쇄하고, 민주적 가면을 버릴 것이다.

 

이것이 파시즘의 교훈이었다.

 

부르주아 선거에서 노동자가 던진 수백만 표는 쓸모가 없다. 그러나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벌인 파업 투쟁은 임금 인상과 “선거 참여”로는 해낼 수 없는 생활 조건의 실질적 향상을 며칠 만에 이룰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 부르주아지의 심각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의 시기, 코뮤니스트 노동자와 노동자 투사들은 코로나19-자본주의 위기 전가에 맞서 파업 투쟁을 확산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인 코뮤니스트 노동자들과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 함께 만들어 낼 대대적인 파업 투쟁은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지로부터의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주의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2020년 10월

국제코뮤니스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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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미국 대선을 앞두고 부르주아 선거(서커스)의 본질을 밝히면서, ‘투표가 아닌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의 입장을 지지하며, 지난 대선(2017년)에서의 우리 입장을 다시 싣는다.

 

 

정권교체의 본질은 야권세력이 과거 노무현 정권의 반노동자 정책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아서 그들을 지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체제의 실질적인 지배계급이 최고 권력자의 얼굴만 바꾼 채 계속 노동자·민중을 지배한다는 것에 있다. 촛불의 민심이 정권교체를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체제의 지배자인 ‘자본가계급’의 이윤추구를 보장하고 이 사회의 크고 작은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을 지키기 위한 정권교체이다. 지배계급은 이러한 정권교체의 본질을 숨기기 위해 자신들과 적대적인 노동자계급을 국가의 일부인 시민사회로 통합시키려 촛불 투쟁을 시민혁명이라 칭송하고 노동자계급을 시민으로 머물게 한다. 촛불 투쟁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시민이 되어 자본가계급과 함께 투표소에서 정권교체를 이루어 내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 혁명이다.

 

따라서 노동자 운동 진영에서는 대선을 맞이해 정권교체론에 대한 비판을 넘어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환상까지 넘어서는 투쟁을 해야 한다.

 

‘노동존중’은커녕 최소한의 노동 삼권과 생존을 위한 최저임금도 보장하지 않은 반노동자 악법과 제도를 만든 주역이 규칙을 정한 자본주의 선거에서 노동자는 승리할 수도 권력을 가질 수도 없다. 어디에도 노동자를 위한 자본주의 선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선거는 유일하게 노동자 고유의 투쟁이 지금의 촛불 투쟁과 같이 대대적으로 전 사회를 뒤덮을 때나 가능하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절대 불리한 부르주아 선거에 뛰어들어 자본가 정치세력의 들러리를 서거나 권력에 구걸하지 말고, 노동자들에게 선거의 본질을 제대로 알리고 노동자 정치의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선거가 아닌 투쟁으로 노동자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노동자 정치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자본에 포섭된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으로는 불가능하다.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왼편에 자리 잡는 노동자 정치, 그들의 민주주의 방식을 따르는 가짜 노동자 민주주의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자본과 국가권력, 그리고 부르주아 정치로부터 독립된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통해 실현할 수 있다. 노동자 정치는 대대적인 계급투쟁 속에서 다수 노동자 대중이 참여하는 정치광장에서 탄생한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열정적이고 대대적인 토론과 직접행동, 계급적 연대가 그것을 확장시킬 것이다.

 

노동자 정치는 노동자 민주주의, 노동자 혁명, 노동자 권력이 실현되는 정치이며, 이것을 목표로 현실에서 투쟁하는 ‘행동의 정치’이다. 노동자들이 이러한 목표로 향하는 모든 곳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독재 권력이 막아서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체제이다. 그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폭력이며, 노동자를 착취하는 생산양식이며, 전쟁과 학살과 굶주림과 환경재앙과 인간 파괴의 근본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이다. 노동자 정치는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와 싸우는 ‘혁명적 정치’이다.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 보듯이 주권자가 직접 권력을 끌어내리지 못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는 선출된 권력을 언제든 소환할 수 있어 선출한 자에 의해 통제되고, 모든 대표자의 특권을 폐지하여 위임받지 않은 권한을 행사할 수 없고, 소수(자)가 배제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한 조건으로 향하며, 선출되지 않은 관료제는 점진적으로 폐지하고 노동자가 직접 정치와 행정에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직접 민주주의이다. 이러한 민주주의만이 노동자의 생산과 일상을 스스로 조절하고, 다수가 사회를 통제할 수 있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삶을 위선과 불평등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법 제도에 맡기지 않고 투쟁으로 돌파하면서 스스로 조직하고 민주주의를 창조해 나갈 때 가능하다. 촛불 투쟁과 노동자 투쟁이 나아갈 길은 바로 지배계급의 민주주의 환상을 깨고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나가는 것, 모든 권력을 누구에게도 위임하지 말고 스스로 권력에 참여하고 행사하는 것, 정권교체를 넘어 선거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와 싸우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무게에 눌려 후퇴하고 움츠렸던 노동자 운동과 혁명운동세력은 이제 반격에 나서야 한다. 자본가계급과의 협력은 노동자 투쟁의 무덤이다. 노동자가 시민으로 후퇴하는 자본주의 선거는 노동자 투쟁의 독약이다. 자본주의 체제와 싸우지 않고 재벌해체와 자본주의를 개량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현재 위기와 참상의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인 것을 가리고 건강한 자본주의 환상을 퍼뜨린다.

 

우리 앞에 이러한 걸림돌은 늘 있었다. 우리가 후퇴할수록 걸림돌은 더 늘어만 갔다. 하지만 우리가 길을 돌아가지 않고 정면 돌파할 때 길은 다시 열릴 것이다. 둑은 큰 물결에 허물어진다. 그러나 작지만 곧고 강한 물살이 먼저 균열을 내지 않으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비록 우리는 지금 소수지만, 곧고 강한 물살이 되어 싸울 것이고, 촛불 투쟁보다 더 크고 높은 투쟁의 물결과 만나 세상을 바꿀 것이다.

 

선거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노동자를 위한 자본주의 선거는 없다.

정권교체를 넘어 선거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와 전면적으로 투쟁하자!

노동자민주주의, 노동자혁명, 노동자 권력을 향한 노동자 정치 실현하자!!!

 

2017년 4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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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2호] 트럼프와 바이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잘못된 선택

 트럼프와 바이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잘못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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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지구상의 모든 국가를 지배하는 생산체제인 자본주의는 깊은 쇠퇴의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한 세기의 쇠퇴기가 마지막 단계에 도달해 광적인 전쟁의 소용돌이, 경제 불황, 환경 재난 및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지구상 모든 국가는 이 죽어가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공공연한 친(親)자본주의 정부든 가짜 ‘사회주의’ 정부든, 민주적이든 독재의 옷을 걸쳤든, 모든 정부는 자본의 진정한 목표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의 필요 충족이라는 단 하나의 생산 목표를 가진 세계 공동체인 우리 종(種)에게 하나뿐인 미래를 희생하면서 이윤을 확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당과 대통령이 정권을 잡느냐를 선택하는 것은 자본주의 문명을 재앙으로 향하는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이다. 이는 다른 선거 서커스와 마찬가지로 다가올 미국 대선에도 적용된다.

 

트럼프는 노동자의 친구가 아니다…

 

많은 사람에게 트럼프는 코로나-19의 현실과 기후 위기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법과 질서라는 이름의 경찰 폭력에 대한 사과, 인종주의자와 극우세력에 대한 구애, 그리고 그의 측근 여성에 대한 역겨운 개인적인 대우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썩어가는 모든 것에 대한 공공연한 옹호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저격수 마이클 코헨(전 변호사)의 말에 따른 “거짓말쟁이, 사기꾼, 인종주의자”라는 사실이 자본가계급의 중요한 파벌들이 그를 지지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의 노골적인 국가주의적 경제와 환경 및 보건 서비스 규제 완화가 그들의 이윤을 증가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선거에서 트럼프는 많은 미국 노동자들에게 ‘미국 우선’ 보호주의가 일자리를 구하고 전통 산업을 부활시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위기 이전부터 중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는 이미 새로운 불황에 빠져들고 있었고, 대유행의 경제적 결과는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보호주의는 어떤 경제도 세계 시장의 무자비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환상이며, 트럼프의 미국 노동자에 대한 약속은 2019년 불황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공허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하지만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트럼프에 따르면 조 바이든은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 일한 오마르(Ilhan Omar) 등 주변의 '스쿼드(팀)'가 체현한 '급진 좌파'의 손에 있는 꼭두각시일 뿐이기 때문에 미국을 '사회주의 유토피아'로 만들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1)

 

사실 바이든은 트럼프와 공통점이 많은 오바마와 클린턴의 주류 민주당 정책의 지속성을 대변하기 때문에 민주당 후보로 선택되었다: 중국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동양으로 회귀"는 오바마 정권하에서 시작되었는데, 오바마는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접근법 때문에 ‘최고의 추방자’로도 알려져 있었다. 물론 민주당은 트럼프와 차이가 있다: 그들은 푸틴 러시아에 대한 트럼프의 아첨을 의심하는 군사 및 안보 기득권 세력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트럼프의 무분별한 국제조약과 동맹 파기로 미국의 외교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 때문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미 제국주의를 위한 최선의 전략에 대한 차이점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민주주의적 신비화가 사회질서 유지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에 트럼프가 ‘민주주의’ 규범을 경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민주당은 미국 자본주의의 양자택일 정당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몇 년간 「민주사회주의동맹」과 같은 내부 압력 단체와 그린뉴딜,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BLM), 그리고 공식 정당 안팎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 정치 옹호자들이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급진 좌파”는 위기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계에서 자유기업 우파와 광신도를 포함한 지배계급의 모든 파벌이 고수해야 하는 국가자본주의보다 좌파적 버전만을 제공한다. 좌파의 어떤 정책도 자본주의의 본질이자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의 근원인 민족국가, 이윤을 위한 생산, 임금 체제의 존재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노동계급이 미래의 열쇠를 쥐고 있다

 

자본주의 정치인이나 정당은 체제의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제시할 수 없다. 세계의 미래는 우리가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는 계급에 달려있으며, 그들은 모든 나라에서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고, 모든 곳에서 똑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진정한 사회주의, 또는 맑스가 그것을 코뮤니즘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했던 것처럼, 인류는 마침내 국가, 국경, 그리고 임금 노예제도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이것은 아주 먼 전망으로 보일런지도 모른다. 일상생활 속에서 노동계급은 수천 가지 방식으로 분열된다: 일자리 경쟁, 국경, 성별, 인종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예제도와 인종주의의 해로운 유산을 가진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말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집단으로 일하고 집단으로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연합의 계급이기도 하다. 그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패배를 피하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계급의 분열을 극복하는 경향이 있다.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는 노동자를 분열시키는 강력한 도구지만, 계급투쟁이 전진하려면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해야 한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처음 발생했을 때, 미국 노동자들은 자동차공장, 병원, 슈퍼마켓 또는 창고에서 감염 보호 대책 없이 일하도록 강요당하는 것에 반발했다: 그리고 ‘백인’, ‘흑인’, ‘라틴계’ 또는 다른 모든 노동자가 피켓 라인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한 단결의 순간은 백인 우월주의와 자본주의의 썩어가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파시스트 운동과 같은 인종 분열의 ‘고전적’ 표현과 상반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인종을 계급보다 우선시하고 민주당에 의해, 맥도날드나 애플과 같은 대기업의 이익에 의해, 노동조합에 의해 - 한마디로 국가 체제에 의해 완전히 도구화하여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의 동원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종에 기반을 둔 투쟁은 노동계급의 통일로 이어질 수 없다.: 지배계급 일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사회로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현실을 감추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을 축복한다.

 

미국 노동계급은 선거를 앞두고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직면해 있는데, 정치인과 미디어 슈퍼스타들은 진정한 권력이 투표소가 아닌 작업장과 거리에 있는 게 아니라 유일한 희망은 투표할 때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최근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에서 보았듯이, 흑인과 백인의 무장 '민병대' 사이 폭력적인 충돌에 휘말릴 위험에도 직면해 있다.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양극화되고 있으며, 특히 트럼프가 이미 암시한 대로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 전체 부르주아 지형에서 ‘내전’ 위험은 선거 이후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이는 노동자들이 좌우 사이렌 소리를 거부하고, 민주적 슈퍼마켓(부르주아 투표)의 잘못된 선택을 거부하고, 자신의 계급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뿐이다.

 

2020년 9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1] 참조 : “트럼프 대 스쿼드(팀)” : 미국 정치기구의 악화 ; 세계혁명 384호, 2019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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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미국 대선을 앞두고 부르주아 선거(서커스)의 본질을 밝히면서, ‘투표가 아닌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의 입장을 지지하며, 지난 총선에서의 우리 입장을 다시 싣는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는 전 세계적인 재앙이면서도 노동자계급에게 더욱 큰 고통과 희생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선거 이후 그 결과와 관계없이 자본가계급과 정부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19 사태를 상대적으로 잘 대응하고 있다는 선전에는 ‘노동자계급의 일방적인 희생과 인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위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이미 오랜 기간 깊은 위기에 빠져 있었고, 코로나19 사태는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최신 경보 신호일 뿐이다. 자본주의 위기를 막을 수 없는 부르주아 정치의 무능은 포퓰리즘과 파시즘에 이어 인종주의와 배외주의를 부추기면서 노동자들을 더욱 심각한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와 함께 자본주의는 인류의 평화와 공존이라는 보편적 가치마저 공식적으로 내팽개쳤다. 코로나19는 인류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지만, 지배계급은 이윤 창출을 위해 착취를 멈추지 않고 있고, 오히려 위기를 노동자계급에 전가하고 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야만으로 질주하는 것은 착취 체제 자체가 작동한 결과이다. 이것은 선거를 통해 지도자나 대표를 잘못 선출해서가 아니라 명백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이다. 해결책은 오로지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생산, 노동, 인간 자원과 자연 자원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조직해 소수의 착취자에게 봉사하는 이윤의 법칙을 대체하는 것뿐이다.

 

 

 

노동자계급은 노동자의 해방이 대통령 당선/의회 장악이나 다수파 선출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과 완전한 정치참여는, 자본주의와 그 국가기구의 파괴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비록 지금 소수이지만, 선거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다수가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려는 노동자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자신의 삶을 위선과 불평등의 부르주아 정치에 맡기지 않고, 투쟁을 통해 스스로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평등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노동자계급의 미래이다.

 

 

 

자본주의 쇠퇴기 모든 부르주아 선거는 사기와 다름없다. 매일 세계 곳곳에서 수백 번 넘는 투쟁이 일어나고, 노동자들은 1년에만 수만 번의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고작 몇 년에 한 번 치루는 선거만으로 노동자계급은 자신이 누려야 할 권력을 빼앗기고, 일상의 대부분을 지배받는다. 이것이 노동자들이 선거를 통해 노예가 되는 ‘민주적인 권리’의 실체다. 노동자들이 이러한 부르주아의 정치와 선거제도에 복종하는 한, 자본주의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정치는 투표소가 아니라 저항하고 투쟁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노동자들이 살아 숨 쉬며 토론하고 행동하는 곳, 계급적으로 연대하고 단결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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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정부의 디지털/그린 뉴딜은 전형적인 자본의 이윤추구 정책

부르주아 정부의 디지털/그린 뉴딜은 전형적인 자본의 이윤추구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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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제로(탄소 중립) 사회는 이윤이 생산 목적이 되지 않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코뮤니즘 사회에서만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변화, 바이러스 창궐을 막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7월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한국판 뉴딜 국민보고대회’를 개최하였다.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고용·사회 안전망 강화라는 기반 위에서 추진하고, 2025년까지 국고 114조 원을 포함한 총 160조 원을 투자하여 19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금만 내용을 살펴봐도 넷 제로(탄소 중립)는 구체적 방법과 내용이 빠졌고, 노동자에게는 더 많은 고통 분담과 자본에는 이윤추구의 새로운 방법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디지털 뉴딜’, ‘그린 뉴딜’이라는 화려한 수사는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말처럼 속 빈 강정에 불과하였다. 역시나 소문난 부르주아 정치판은 빛 좋은 개살구라는 역사적 명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그린 뉴딜은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동시에 탈 탄소 산업이라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해 녹색 일자리도 창출하고 지구도 살리고 돈도 버는 정책으로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탄소배출 제로 의지와 전망이 없는 부르주아 정권의 추진과제들은 공허한 내용뿐이었다. "정부가 2025년까지 수십조 원의 예산을 들이는 그린 뉴딜을 추진하지만,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더 늘려 잡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린 뉴딜로 인한 감축 효과는 애초 줄이기로 한 6천만 톤 중 약 20%인 1,230만 톤가량에 그친다는 것이다." (한겨레, 2020.07.16)

 

이는 탄소 문명이 탄생한 사회적 배경, 더 나아가 환경 파괴의 근본 원인에 대한 성찰할 능력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 부재는 당연히 대안의 부재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부르주아 정부는 자신의 무능과 대안 빈곤을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해 장밋빛 청사진으로 제시했지만, 그들의 계급적 성격은 감출 수 없었다. 탈 탄소 문명을 탈피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빠져 있고 오로지 자본의 이윤추구 정책에 맞춰져 있다. 위기에 처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에 인색한 금융자본이 이른바 ‘한국판 뉴딜’에 수십조의 금융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은 그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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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권은 그동안 대북 화해 제스처와 한일 무역 분쟁을 계기로 민족주의 각을 내세워 이명박, 박근혜 정권과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면서 그린 뉴딜은 이명박 정권의 녹색성장과는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이명박 정권은 표면적으로 친환경 정책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토건 사업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였고 그 결과물이 최악의 4대강 사업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에서도 그동안 세계 곳곳에 노동자의 필요와 생존보다는 자본의 입맛에 맞는 토건 사업을 추진한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연장선에서 그린 뉴딜은 최소한의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구체적 목표·계획이나 어떠한 규제책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동안 친자본적인 정책 추구를 이번 뉴딜정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이전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이쯤 되면 그린 뉴딜은 자본 뉴딜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린 뉴딜의 이러한 성격은 디지털 뉴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판 뉴딜의 배경 중 하나인 코로나19는 사회적 연대(기본적으로는 환경 파괴를 방지해야 하지만, 의료의 공공성 강화, 혈장 치료제 개발 등등)로만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스마트 의료 인프라를 목적으로 디지털 기반 스마트병원, 디지털 돌봄 등과 같은 원격의료 정책 등의 비대면 산업 육성 정책의 사례를 보면 의료 공공성은 처음부터 관심 밖이고 자본의 이윤추구 정책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더해 공공서비스의 디지털 전환율을 2025년까지 80% 이상 달성하겠다는 목표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노동강도 강화와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고통을 전제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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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정책은 고용·사회 안전망 강화라는 기반 위에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추진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본 중심이 아닌 노동계급의 이익에 기반하고 추진되어야 한다. 자본은 그린보다는 뉴딜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고 디지털 뉴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국가정책은 추진될 수 없다. 그런데도 조합주의자들과 의회주의자들을 비롯한 온갖 개량주의자들은 일부 유럽국가나 미국처럼 정의로운 전환을 바탕으로 그린 뉴딜로 수정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넷 제로가 가능하다는 환상에 빠져있다. 그러나 일부 유럽국가, 미국에서 넷 제로 대응에 사회적 약자를 참여시키는 것은 세계화된 자본의 본질을 미화시키기 위해서이다.

 

환경 파괴는 이윤을 생산의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 원인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 문제 제기 없이는 환경 파괴를 막을 수 없다. 또한, 고용·사회 안전망 구축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 없는 정의로운 전환은 근본 해결은 고사하고 환경 파괴와 사회안전망 부재라는 구렁텅이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노동자·인민의 필요에 따른 생산체제와 생산수단을 노동계급이 통제할 수 있는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만 환경 파괴를 방지하고 고용·사회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을 누릴 권리와 자연환경 파괴를 막을 의무가 함께 주어지는 세상은 오로지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2020년 7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윤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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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건설] 세계 혁명당 건설이 절실하다.

세계 혁명당 건설이 절실하다.

 

 

<편집자 주>

올가을 본격적으로 진행될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이른바 '좌파' 또는 '사회주의 자임 세력'과 분명히 구분되는)의 '당 건설' 논의를 앞두고, 당(분파)에 대한 기본 개념과 당 건설 원칙을 정립하기 위해 ICP를 포함한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의 입장과 자료를 공유합니다.

 

 

앞으로의 연재에는 과거 '사회주의당 건설 운동' 실패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과 성찰 없는 조직보존 도구로서의 (사이비) 당건설 논의 흐름, 혁명적 주체와 전망이 부재한 후퇴한 당 건설 경로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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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세 번째 세계 혁명당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 창설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100년 동안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그대로인가? 왜 세계혁명은 인류의 역사적 과제였으며, 아직도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가? 우리는 대답해야 한다.

 

100년 동안의 근본적 변화를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1차 세계대전을 자본주의의 번영과 쇠퇴를 가르는 역사적 기점이라는 점에 세계의 맑스주의자와 코뮤니스트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20년 동안의 자본주의의 번영을 보고 그리고 지금의 자본주의의 표피적 성장 모습을 보고 쇠퇴를 부정하는 이른바 「자본의 좌파」도 있지만, 여기서는 논외의 대상으로 한다, 핵심적 논쟁은 쇠퇴의 국면을 총체적 해체국면인가 아닌가에 놓여있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잉여가치의 생산과 분배 모두에 있음은 당연하지만, 경제적 위기를 포함하여 정치·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생태적 위기라는 총체적 위기임을, 그리고 인류 미래의 재앙임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은 전쟁이고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인가라는 100년 전의 역사적 과제는 여전히 유효한가? 항상 혁명보다 전쟁이 먼저라는 것은 자본의 능력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압하고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혁명을 향한 세계적 투쟁의 몸부림이 있었지만, 민족주의에 굴복한 기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성공한 러시아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스탈린주의라는 반혁명 세력에 의한 변질과 실패 등으로 세계혁명은 이루어내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뼈아픈 과오와 패배의 역사로 남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혁명을 향한 어떠한 투쟁도 없었고 자본주의의 일시적 번영의 착시와 사회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복지국가 모델, 케인즈주의의 일시적 위기 극복 그리고 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신자유주의의 공격과 또 다른 형태의 케인즈주의의 활용 등이 지금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으며, 계급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프롤레타리아트 앞에서 100년 전과 비슷한 이데올로기로 겨우 버티고 있다. 트럼프를 비롯한 민족주의, 국가 제일주의, 좌우를 막론한 포퓰리즘, 인종주의 그리고 크고 작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긴장과 충돌이 지속되고 있다.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크든 작든 제국주의가 아닌 국가는 없다. 100년 전과 변화된 자본주의 모습이다. 한국도 제국주의 국가다. 중심과 주변의 차이밖에 없다. 한국과 일본의 긴장과 충돌은 제국주의 사이의 필연적 과정이다. 이 대결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것 역시 제국주의의 본질이다. 세계전쟁의 가능성은 100년 전보다 훨씬 커지고 있고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자본에게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전쟁의 화약고는 늘 수면 아래 있다. 전쟁을 막아내고 진정한 계급의 평화를 혁명을 통해 이루어내고 인류를 구원할 대안은 오직 자본주의를 대체한 코뮤니즘밖에 없다.

 

전 세계의 코뮤니스트들과 프롤레타리아트는 100년 만에 다시 한번 혁명을 통해 평화를 이루자는 코민테른의 교훈을 상기하고, 100년의 사이비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청산하고 자본주의의 질곡과 재앙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혁명적 무기, 세계 혁명당 건설을 함께 선언하고 그 구체적인 역사적 과업에 나서야 한다. 코민테른 창설 100주년을 맞이한 우리의 임무는 진정한 맑스주의의 복원과 그 실천인 세계 혁명당 건설임을!

 

(「실천 복간 3호」, 오세철, 201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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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건설] 프롤레타리아 국제정당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국제정당을 위해

 

<편집자 주>

올가을 본격적으로 진행될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이른바 '좌파' 또는 '사회주의 자임 세력'과 분명히 구분되는)의 '당 건설' 논의를 앞두고, 당(분파)에 대한 기본 개념과 당 건설 원칙을 정립하기 위해 ICP를 포함한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의 입장과 자료를 공유합니다.

 

 

앞으로의 연재에는 과거 '사회주의당 건설 운동' 실패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과 성찰 없는 조직보존 도구로서의 (사이비) 당건설 논의 흐름, 혁명적 주체와 전망이 부재한 후퇴한 당 건설 경로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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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이탈리아 동지들의 이전 번역 글에서 우리는 ‘무엇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정당이 아닌가’에 대해 다루었고, 여기서는 ‘무엇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정당인가’에 관해 설명하고자 한다. 다시 한번 당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이해를 위해, 우리의 웹사이트(www.leftcom.org)에 올려진 문서들을 참조한다.

 

 

맑스주의 분석을 견지하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진정한 코뮤니스트 대안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행동으로만 건설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당도 계급을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경제 체제와 사회의 혁명적 전환을 위해 우리는 혁명정당의 역할이 근본적이라고 믿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모든 제도권 정당에 반대한다. 최근 모든 사람이 ‘당’이라는 단어를 선거와 부르주아 제도와 연관 짓는다. 이것은 톨리아티(Togliatti)의 구(舊)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공산당)과 그 구성원들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혁명가들이 코뮤니스트당에 부여한 기능은 오늘날 사람들이 (심지어 스스로 코뮤니스트들조차도) 생각하는 것과 꽤 다른 것이다. 코뮤니스트당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게 사회주의 사상과 정치적 의식을 부여하고, 자발적인 노동-계급 운동과 불가분으로 연결된 혁명정당을 조직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계급의 정치적 조직화와 정치적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다. “(레닌, 「우리 운동의 시급한 책무」)

 

”... 투쟁하는 조직 건설과 정치적 선동 행위는 어떤 ‘단조로운, 평화로운’ 환경에서도 필수적이다. 어떤 시기에서든, ‘혁명정신이 쇠퇴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기라고 할지라도; 오히려 이러한 종류의 활동이 특히 필연적인 것은 바로 그러한 시기, 그러한 환경에서인데, 폭발과 분출의 시기에 조직을 만드는 것은 너무 늦기 때문이다; 정당은 시기의 도래에 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여야 한다. “(레닌,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사회의 혁명적 변형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주역이 되는 행동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자발적으로 ‘오직’ 계급 본능을 발전시킨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극복할 현실적인 필요에 대한 인지 없이, 즉각 경제 조건을 방어하도록 자극하는 의식이다. 그것은 장기적이고 단호한 투쟁을 가능케 하지만 전략적 관점에서 더 나아갈 수 없도록 한다. 물론 이것은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보유한 이데올로기적 우월성의 지속적인 영향 때문이다. 특히,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이 경제 체제가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유일한 것이고,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거의 자연적 결과이므로 만약 필요하다면 개선될 수 있는 가치 있는 자산으로서 보호되어야 하지 정면으로 공격받거나, 대체되어서는 안 된다고 우리가 믿도록 해 왔다.

 

코뮤니스트의 기능은 정확하게 이것이다 : 계급을 위한 혁명적 정치적 기준점이 되어, 혁명적 사상, 의식, 그리고 정치적 의제를 계급에 전달하는 것이다. 코뮤니스트당은 혁명적 전위의 조직, 혁명적 의식(자본주의의 본질과 이 체제를 극복할 필요성에 대한 깨달음)을 발전시켜온 이들의 조직이어야 한다. 따라서 코뮤니스트당은 가장 의식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혁명적 의식을 발전시킨 (자신의 뿌리가 되는 계급의 이해를 포기한) 비(非)프롤레타리아트를 집결시킨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당은 대중정당이 아니라 코뮤니스트 핵심 그룹의 전위정당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정당은 계급 전체에 호소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로 혁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과 독립적으로, 역사적 단계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스트들은 계급에 개입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개입하여 사람들의 경험을 기름지게 하고, 계급의 현실을 경험함으로써 분석 능력과 정치적 강령을 풍부하게 해야 한다. 계급투쟁의 정치적 도구로서 당은 항상 계급투쟁에 함께하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것은 투쟁이 퇴조기에 있든 회복기에 있든 관계없이 그러하다.

 

”현장에서 혁명적 요구를 제안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노동자 투쟁의 불안정하고 허약한 현재 조건 속에서도, 글만 쓰고, 그리고 그 결과뿐만 아니라 의도에서도 언제나 논쟁적인 개인적 활동으로서의 이론화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정치적 투쟁에 개입해야 한다. “(오노라토 데이먼)

 

코뮤니스트들은 혁명적 정치의 기준점으로 행동하며, 계급의 부문들을 자극하여 자신이 처한 착취의 조건에 대해 혁명적 비평을 할 수 있도록 개입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계급투쟁에 개입해야 한다.

 

혁명정당은 이론적 준비, 실질적인 조직과 정치적 지도력의 요체로, 계급투쟁의 산물인 동시에 요소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혁명 실현에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다.

 

혁명정당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이론과 비판의 지속적인 정교화를 먹고 자란다; 지도부 형성과 일상적인 정치 투쟁에 참여하여 계급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조직을 위해 조직적 성장을 이룬다.

 

혁명정당은 무분별한 그룹의 통일과 강령에의 순응의 결과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투사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원칙과 전술, 자신의 목적을 세우는 혁명가 모임의 중심이다.

 

혁명정당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투쟁 조직이다. 그 구성원들은 작업장에서, 이웃들에서, 그리고 모든 다른 프롤레타리아 환경에서 계급의 강령을 방어하고 선전하는 데 적극 개입하거나 그 싸움에서 유용하게 통합하여, 보조적 업무를 담당한다.

 

혁명조직은 조직의 근본적인 문서(강령, 테제 등)에서 표현된, 방법, 원칙, 그리고 목적을 공유하는 조직이라는 사실이 특징이다.

 

부르주아 좌익정당이 자신을 지배체제 또는 심지어 그들의 지도자와 동일시 할 동안, 혁명정당은 투사들 전체를 중시한다. 그 내적 삶은 민주 집중주의 방식으로 지배되고, 강제적인 시행을 통해서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유기적 통일이 실현된다. 물론 절대적인 보증은 있을 수 없지만, 그것은 공동 원칙에 기초한 토론을 통한 이론적, 실천적 균질화의 일부이며, 모든 투사가 정당의 정치적 전선에서 주역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지도부를 선출하는데, 이것은 집단 집행 체제를 통해 당의 정치적 중앙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당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낼 힘은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연합에서 찾을 수 있다. 당을 위해 일하는 것은 미래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2020년 5월 12일

국제코뮤니스트경향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0-05-21/for-the-international-party-of-the-proletari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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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1호] 4년에 한번 5년에 한번 「빵과 서커스」

4년에 한번 5년에 한번 「빵과 서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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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는 “로마는 빵과 서커스로 유지된다.”라는 말로 로마 사회를 비판했다. 빵과 서커스(Bread and circuses)는 유베날리스가 고대 로마 사회의 세태를 시편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빵과 게임 (Bread and games) 이라고도 한다.

 

축제를 변형시킨 형식이 로마의 ‘키르쿠스 (Circus 서커스)’ 다. 서커스는 로마 황제가 정치적인 불만 세력이 될 농후한 프롤레타리아트(하층 로마시민)에 눈요깃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대형 원형 경기장의 이름이다. 아울러 로마의 시민은 매일 빵도 배급받았다.

 

로마제정의 우민정책을 “빵과 서커스”라고 비꼰 사람이 바로 당대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다. 당시 원형 경기장에서 이루어진 구경거리는 ‘벤허’의 전차경주, ‘쿼바디스’의 사자 (기독교도를 잡아먹는) 검투사의 검투 시합 등이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44년 동안 재위하면서 총 44번의 대규모 서커스를 열었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릴 때 나는 붉은 악마의 함성 뒤로 끌려가는 노동자를 보았고, 생존을 철거당하는 노점상도 보았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월드컵과 올림픽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2~3년에 한 번씩 번갈아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저들만의 축제를 보았다. 붉은 악마의 생동감을 느끼기 전에 씁쓸함을 먼저 느낀 것은 그만은 아닐 것이다.

 

조카와 축구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나는 그 원형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을 보면서 검투사가 생각이 났다. 신분적으로는 자유롭게 보이나 여전히 자본주의 검투사처럼 느껴졌다. 그냥 축구를 축구로 보면 될 것인데 자꾸 답답하고, 허하다. 며칠 후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난투극을 벌인다. 용감무쌍하다. 검투사 같다.

 

‘그래 노래를 만들자. 곰곰이 생각해보고 하고 싶은 말을 노래로 만드는 거야...’

내 1집 타이틀곡인 「빵과 서커스」는 이렇게 만들었다. 아랫글은 나보다 더 이 노래를 잘 설명한 어느 기자의 글이기에 인용해본다. 좀 쑥스럽지만...

 

 

“「빵과 서커스」는 시대 상황에 대한 촌철살인의 풍자곡이면서 권력과 관료화된 운동에 대한 신랄한 비틀기이다. 이 곡에서 우창수는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과 운동의 회절과 변절, 대의주의와 직접민주주의, 노동조합의 관료화와 권력화를 비판하며 혁명과 동학을 연결한다. 그리고 그들의 축제가 아니라 우리의 축제를 벌이자고 말한다. 이 곡의 테마가 된 글을 잠시 빌리면, 그는 월드컵과 수많은 관 주도 축제, 그리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등을 로마의 풍자 시인이 말했던 그들만의 축제로 보고 21세기 한국사회의 오늘과 실업자, 철거민, 조합에서 해고된 노동자 등을 통해 민중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눈에 대의제 국회는 정략적 이익을 위해 주먹질도 마다하지 않는 21세기의 검투장이며 민중은 대의제 아래 민중 의지와 상관없이 거수기로 전락하고 있음을 경고하며 풍자한다.

 

이러한 정치적 대안으로 동학의 ‘포’와 ‘접’이 가졌던 소통에 주목하고 사라진 광장정치와 높아만 가는 대중정치판의 단상을 허물어 우리들의 또 다른 축제를 벌이자고 노래한다. 그가 왜 2007년 말미 정치 계절에 음반의 제명을 「빵과 서커스」로 택했는지 알만하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 속에 한국에서는 4년 만에 총선이 치러졌고, 도쿄 올림픽은 연기되었다. 지난 국회에서 난투극을 벌인 몇몇 검투사 의원들은 낙선했고, 직접민주주의는 더욱 멀어졌다.

 

2020년 4월

우창수

 

 

 

빵과 서커스

 

 

 

작사, 작곡, 노래 : 우창수

 

 

 

 

 

1.

 

화려한 불꽃과 미끈한 다리

 

웃으며 행진하는 높은 양반들

 

쳐다보고 오르려 하지마라 축제를 즐겨라

 

달콤한 초콜릿 발렌타인 데이

 

코코아를 따러가는 어린 노동자

 

거대한 써커스 공을 굴려라 지문 없은 작은 손 헤 -

 

 

 

2.

 

지상의 방한칸 포크레인 삽날

 

아스팔트 노점상의 불안한 하루

 

빚더미 실업자는 멀리 떠나고 술병은 외롭다

 

조합에서 쫓겨난 황당한 해고자

 

추방당한 블랑카는 소식이 없고

 

생존의 벼랑 끝은 농성중이다 날 벼린 방패와 함께 헤 -

 

 

 

3.

 

오월의 핏빛 하늘은 맑게 개이고

 

87년 7,8,9는 다큐가 되고

 

광화문 네거리 촛불 밝혀라 팔려갈 진보를 위해

 

우리의 대표를 굳게 믿어라

 

의사당 검투사의 빛나는 용맹

 

민주의 시대를 굳게 믿어라 우린 모두 거수기 헤 -

 

 

 

4.

 

저아래 접들이 기포를 한다

 

은밀히 돌고 도는 사발통문이

 

혁명의 빨강색 비타민 C 우린모두 메신져

 

오늘은 우리들의 축제를 벌이자

 

저들의 빵과 총도 꺽어 버리자

 

공장의 담장은 헐어버려라 두려워 마라 헤 -

 

 

 

(후렴)

 

사년에 한번 이년에 한번 헤이 헤 빵과 써커스

 

오늘도 좋고 내일도 좋아 헤이 헤 빵과 써커스

 

 

 

나랏 말싸미 민중과 달라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헤

 

어깨를 걸고 어깨를 걸고 헤이 헤 밥과 자유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헤이 헤 평등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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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0호]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1)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1)

역사의 경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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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나를 포함한 한국의 코뮤니스트 좌파는 세계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의 주요 논쟁을 역사적으로 점검하고 분석하면서 앞으로의 코뮤니스트운동의 올바른 전망을 제시하는 노력을 지속해왔다.(주1) 이 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잠정적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우리는 150여 년 전의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화두를 진지하게 꺼내 들고 다시 한번 ‘야만인가 문명인가’, ‘코뮤니즘의 물질적 필요성’을 말하는 역사적, 문명적 인식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준비해야 한다. 자본주의 쇠퇴의 객관적 법칙과 조건이 생산, 권력, 역사의 주체인 노동계급과 만나 서로 침투하는 계급투쟁을 전개하는데 코뮤니스트의 역사적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코뮤니스트는 맑스주의 원칙 중에서도 국제주의의 원칙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자본주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제국주의 전쟁과 파시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천」 복간 2호, 66쪽)

 

그런데 최근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의 대표적 국제조직인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이하 ICC)의 23차 대회(2019년 5월 개최)에서 발표한 결정문이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을 정리하고 이후 계속되는 논쟁을 「논쟁」(2)에서 계속 다루려고 한다.(주2)

 

대회 결의문 중에서 특히 「국제 상황에 대한 결의(2019) : 제국주의 갈등 ; 부르주아지의 삶, 경제 위기」에서 ICC는 22차 대회의 내용을 반복하면서도 역사의 경로인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패러다임이 변화되었음을 명시적으로 제출하여 패러다임 논쟁의 불씨를 던졌다. 이 논쟁에 뛰어든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들은 설립된 지 몇 년이 안 된 새로운 소그룹들이다. 아직 이들 논쟁에 ICC와 「국제코뮤니스트경향」 (Internationalist Communist Tendency) (이하 ICT) (주3)의 본격적 논쟁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1)에서는 ICC와 코뮤니스트 좌파의 소그룹 사이의 논쟁을 간략히 정리하기로 한다.

 

2. 논쟁의 발단 : ICC의 23차 대회(2019년 5월)의 패러다임 변화

 

2019년 5월 23차 대회에서 발표한 「국제 상황에 대한 결의(2019) : 제국주의 갈등 ; 부르주아지의 삶, 경제 위기」에서 ICC는 자본주의 해체 국면의 역사적 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주4)

 

“1) 30년 전 ICC는 자본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쇠퇴기의 마지막 국면인 해체기에 들어섰다고 밝혔다. 이 분석은 수많은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는 틀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의 두 가지 결정적이고 적대적인 계급이 스스로의 결정적인 반응을 부여하지 않고 부딪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역사는 그냥 멈추지 않는다. 아직 자본주의는 이전의 사회형식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삶의 ”동결“ 또는 ”정체”를 가능하게 한다. 위기를 안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순, 더욱 깊어질수록 총체로서의 사회를 위한 가장 가벼운 전망을 제공할 부르주아지의 무능력,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무능력은 오직 보편화된 해체의 상황으로 이끌 뿐이다. 자본주의는 발끝에서 썩어가고 있다.”

 

이어서 ICC는 1989년 소련 동유럽의 몰락이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역학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본다. 그 이전에는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이 그 역학의 결정적 요소로서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가 세계전쟁으로 나가던지 아니면 자본주의의 전복을 전망으로 하는 계급투쟁의 발전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두 제국주의 블록이 재구성될 때까지 현재 상황을 규정하는 패러다임 안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는 패배가 너무 깊어 결정적으로 회복하지 못하는 고통을 받을 것이지만, 사회의 보편적 진화를 위한 결정적 결과 없이도 깊은 패배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왜 “역사적 경로”의 의미가 더 이상 현 세계의 상황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힘의 균형을 규정할 수 없는지의 이유라는 결론이다.(주5) 그리고 이어서 최근의 제국주의 사이의 긴장을 상세하게 설명한다.(주6)

 

3. ICC의 「역사적 경로 패러다임」 포기에 대한 코뮤니스트 좌파 소그룹들의 비판

 

2019년 5월 ICC의 23차 대회의 결의문이 발표된 이후 특히 ‘전쟁인가 혁명인가’라는 ‘역사적 경로’에 대한 ICC의 입장 변화를 둘러싸고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의 신생 소그룹들이 정면 비판과 방어에 나섰다. 그중에서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그룹」 (International Group of the Communist Left) (이하 IGCL)(주7), 그리고 「국제주의자 목소리」 (Internationalist Voice) (이하 IV)가 논쟁의 주역이다.

 

특히 IV는 지속적인 논쟁을 ICC뿐만 아니라 ICT 등 다른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과 벌이고 있다. 보기를 들면, 「ICC와의 논쟁 : 노동자계급인가 대중인가?」 (2019년 3월), 「GCCF(Gulf Coast Communist Fraction)와의 논쟁 : 자본주의 발전의 이해에 있어서 약점」 (2019년 5월), 「국제코뮤니스트당(Proletarian)과의 논쟁 : 노동자 코뮤니즘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의 좌파에 속한다」 (2019년 5월 24일), 「ICT와의 논쟁 : 국제주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모호함」 (2019년 4월 27일), 「통일의 새로운 관점에 대한 GCCF에의 편지」 (2019년 7월 20일), 「ICC와의 논쟁 : 혁명조직인가 혁명적 출판인가」 (2019년 여름), 「ICC와의 논쟁 : 혁명적 출판의 변명」 (2019년 8월 23일), 등이 있으며 앞으로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이 두 그룹 이외에 미국의 「GCCF」(주8)와 「WORKERS' OFFENSIVE」 그룹, 스페인의 「해방」 (Emancipation)(주9)이 있다.

 

ICC와 가장 많이 논쟁을 벌이는 IV는 ICC와 친화적이다. ‘역사적 경로’ 문제에 대해서 IGCL을 빗대어 ICC에 대한 비난을 상쇄하려 한다. 「불명예의 교향곡」 (2019년 8월 22일)에서 이 그룹은 “ICC와 23차 대회에서 최근의 스탈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화하지 않고 세계 사회주의에 대한 이전의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라고 하는 IGCL의 맹비난을 전하면서 자신들은 코뮤니스트 가치와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방어하고 있다.(주10)

 

이제 ICC의 내부분파였던 IGCL의 ICC에 대한 본격적 비판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그룹은 2019년 7월 「ICC의 23차 대회의 대차대조표와 전망 : 새로운 혁명 세력 중에서 기생주의(parasitism)의 기회주의적이고 파괴적 이론의 독을 소개하기」 (2019년 7월) 라는 글에서 ICC의 23차 대회가 ‘역사적 경로’를 포기하고 계급투쟁까지도 청산했다고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2001~2002년 ICC의 조직 위기가 2003년 15차 대회로 이어져 ‘혁명이냐 전쟁이냐’의 역사적 대안을 제3의 방식인 기회주의의 영원한 제안, 다시 말하면 묵시적 전쟁이 아닌 해체의 점진적 진전을 통한 인류의 파괴라는 제3의 대안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주11)

그리고 소련, 동구가 몰락한 1989년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역동성은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에 의해 더 이상 결정되지 않는다고 규정하면서 힘의 균형이 어떠하더라도 세계전쟁이 더 이상 의제에 올라와 있지 않지만,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몰락의 길로 가라앉을 것이라고 말한다.

 

맑스주의의 중심적 정치원칙의 하나인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이 역사의 동력이라는 코뮤니스트 강령은 더 이상 배반할 수 없다고 보는 IGCL은 오직 유효한 척도는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을 평가하는 것이라는 ICT의 입장에 동조한다.

 

ICC의 최근의 활동이 최근에 새로운 혁명 세력으로 형성되어 등장하고 있는 그룹과 써클, 미국, 호주, 영국, 남미 등의 그룹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으로 보이기보다 특정 기생그룹을 향한 공격적 외교로 보이며, ICT의 진정한 몰입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주12)

 

23차 대회를 둘러싼 토론과 문제 제기는 「ICC Forums」에서도 이어졌다. 여전히 해체의 조건에서 계급투쟁은 역사의 동력이 아닌가? 코뮤니즘도 역사적 의제에서 떠난 것인가? 해체는 야만을 의미하는가? 부르주아지는 70, 80년대에 노동계급을 통제할 수 있었는데 왜 90년대 이후에는 점차 통제력을 잃게 되었는가? 역사적 경로에 대한 ICC의 패러다임 변화는 완전히 새로운 출발인가?(주13)

 

그러나 진정한 논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의 논쟁은 두 국제조직인 ICC와 ICT 간의 대립과 치열한 논쟁으로 촉발되고 지속되었기 때문이다.(주14) 새로운 논쟁의 시작은 다시 제국주의 전쟁에서 시작되고 있다.

 

4. ICT의 문제제기 – 중국-러시아 블록의 창조와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

 

1989년 이후 두 진영 사이의 균형이 깨어지고 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ICC의 주장에 대해 새로운 제국주의 블록이 반(反)미국 블록에 대항하여 「모스크바-베이징」으로 재구성되고 있으며, 지역의 중요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이란의 부상을 주목하는 해석을 ICT는 제안하고 있다.(주15)

 

세계전쟁은 더 이상 쟁점이 아니라는 ICC의 주장이 ICC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코뮤니스트 좌파」의 방법과도 어긋나는 관념론적 역사관이라고 비판한다. 1946년 「프랑스 코뮤니스트 좌파」는 국가 사이의 이해갈등과 강대국이 약소국의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으며, 제국주의 사이의 이해갈등이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란의 경우 러시아와의 (그리고 중국) 동맹, 또는 미국과의 동맹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세계전쟁의 위험성을 부정하는 것은 ‘전쟁과 평화’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저항할 수 없게 만들 뿐 아니라 위기와 전쟁으로부터 파생되는 삶의 조건의 피폐화에 맞서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요구할 수 없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의 국제회의에서의 공개토론, 다시 말하여 새로운 찜머발트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앞으로 전개될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부의 논쟁은 「코뮤니스트」 11호에 정리하여 싣기로 한다.

 

2019년 10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오세철

 

 

 

<주>

 

1. 최근의 정리 글은 “자본주의 쇠퇴기의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실천」 복간 2호, 2019.3.15., 42~73쪽, <사회실천연구소>

 

2. ICC의 22차 대회(2017년 5월 개최)의 결의문은 “22차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대회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코뮤니스트」 7호, 2018.4.30.,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을 참조할 것, 이른바 자본주의 쇠퇴기의 마지막 단계로서 ICC가 설정한 「해체」 (Decomposition)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다.

 

3. ICC와 함께 대표적인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조직이며, 그 전의 IBRP(혁명당 국제서기국)와 CWO(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이 통합한 새로운 조직의 명칭이다.

 

4. 이 결의문은 23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항의 내용이다.

 

5. 위 결의문 6항

 

6. 위 결의문 7항~15항

 

7. 이 그룹은 원래 ICC의 내부분파였는데, 조직 내부 사건으로 분리된 그룹으로 오래전부터 ICC와 대립해 왔다. 특히 ICC의 “해체”를 놓고 2005년부터 본격적인 논쟁을 한 바 있다. 이 그룹의 입장은 ‘사회적 해체 국면의 ICC 이론의 역사적, 이론적 절벽’ (ICC의 내부분파, 2005)에 잘 드러나 있다.

 

8. IV와 공동성명 「자본주의는 전쟁을 의미한다!」를 낸 미국의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

 

9. 2019년 7월 24일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10. ICC와 IV, 그리고 IGCL과의 논쟁은 더 지켜볼 일이다.

 

11. 윗글, 2쪽

 

12. 윗글, 4~5쪽

 

13. 「국제 상황에 대한 2019 결의 : 몇 가지 관찰과 질문」, ICC Forums

https://en.internationalism.org/forum/16708/2019-resolution-international-situation-some-observations-and-questions

 

14. (주1)에 소개한 긴 글은 두 조직의 논쟁이 자본주의 위기, 세계전쟁의 원인, 맑스주의 원칙과 방법론, 등으로 이어졌고, ICC가 2017년 22차 대회에서 ICC가 자본주의 쇠퇴기의 마지막 단계인 해체를 규정하면서 ICC는 세계에서 동떨어진 코뮤니스트 좌파처럼 보이고 있다.

 

15. 「중국-러시아 블록의 창조에 대하여」, 2019.9.28, <An internationalist Articles Selection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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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0호] 새로운 혁명 세력에 기회주의적이고 파괴적인 기생충 이론이라는 독물을 갖고 오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23차 대회의 평가서와 관점 :

새로운 혁명 세력에 기회주의적이고 파괴적인 기생충 이론이라는 독물을 갖고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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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문서는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그룹(이하 IGCL)에서 발행한 「혁명이냐 전쟁이냐」 12호(특별호)에 실린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이하 ICC) 23차 대회 보고서'에 대한 비판의 글이다.

IGCL은 원래 ICC의 내부분파였는데, 조직 내부 사건으로 분리된 그룹으로 오래전부터 ICC와 대립해 왔다. 특히 ICC의 자본주의 쇠퇴기 '해체'를 놓고 2005년부터 본격적인 논쟁을 한 바 있다. 

 

최근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의 대표적 국제조직인 ICC의 보고서가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고, 이를 두고 ICC와 IGCL 사이에 논쟁이 먼저 벌어졌다. 이 논쟁은 「코뮤니스트」10호, 11호에 실린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 (오세철)'에 다른 논쟁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위에 소개한 모든 논쟁(토론)은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전체의 역사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이기에, 국제코뮤니스트전망도 작년부터 내부 토론과 국제조직과의 토론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그들의 23차 대회에 대한 몇몇 문서를 발간했다(주1). 2017년, 그들의 전 22차 대회에 대한 보고서가 몹시 신중했던 데에 비교하면 우리는 유쾌하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이 조직의 「국제평론」에 국제적 상황에 대한 보고서만이 발간되었을 뿐이었다. 22차 대회에 대한 어떤 발표도, 어떤 평가서도 없었고, 이는 아마도 대회가 너무 분열되어 제안된 활동에 대한 보고서에 대해 어떤 입장도 취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반면, 23차 대회는 매우 중요하다 : ICC는 처음부터 갖고 왔던 근본적인 이론적, 정치적 관점인 ‘역사적 경로’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대회의 진정한 정치적 문제들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23차 대회는 ‘역사적 경로’를 폐기하고 계급투쟁을 포기했다.

 

국제적 상황에 대한 보고서(주2)와 결의안을 읽은 사람들은, 보기를 들어 계급 정체성의 상실(계급투쟁에 대한 보고서)이나, 혹은 그 반대와 같은, 다양한 가지각색의 추상적인 고려사항들 속에서 길을 잃기 쉽다. 수십 페이지에 걸친 이러한 잡동사니 가운데, 독자는 이 문서의 유일한 진짜 관심, 또는 정치적인 입장을 놓칠 수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역사적 경로’에 대한 개념은 현 세계의 상황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의 균형을 정의할 수 없으며 [왜냐하면 경로는] 역사적 흐름의 결과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세계 전쟁 또는 계급 대결”(국제적 상황에 대한 결의안). 역사적 경로는 ICC에서 언제나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왔고, 그런 만큼 그들의 전망과 분석에 기반을 둔 이론적, 정치적 유산의 근본적인 요소였다. 오늘날 이러한 그들의 공식적인 폐기는 별로 놀랍지 않은데, 역사적 경로라는 개념은 “세계 전쟁의 유령이 더는 지구를 위협하지 못한다.”(주3)라는 21세기 ICC 자신의 입장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만약 더 이상 역사적으로 대안적인 혁명이나 전쟁이 없다면, 필연적으로 오늘날 기회주의자 ICC는 생존을 위해, 조만간 공식적으로 역사적 경로를 없앨 수밖에 없었다.

 

2001~2002년의 조직 위기는 관념적인 자본주의 쇠퇴 이론의 결정적 승리와 그만큼의 결정적인 통제로 귀결되었고, 내부의 반대가 이른바... 종파주의 또는 기생주의(parasitism)로 비난을 받고 폭력적으로 배제되었다. 정치적인, 원칙적인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2003년 초, 15차 대회는 역사적 대안, 혁명 또는 전쟁, 그러니까 제3의 길, 언제나 기회주의의 (것이었던) 제안, “제3의 대안: 종말적 전쟁이 아니라 해체의 점진적인 진행에 의한 인류의 파괴”(15차 대회 결의안)으로 대체되었다. 이후의 대회는 보편화된 제국주의 전쟁(주4)의 어떤 가능성도 거부하면서 코뮤니스트 좌파(Communist Left)로부터 ICC가 계승한 입장을 계속해서 체계적으로 개정했을 뿐이었다. 해체의 효과에 저항하는 투쟁의 실질적인 정치적 결과는 반복되었고, 부르주아지와 같은 편에서 언급이 증가했다 : 2004년 10월, 독일 보훔의 오펠 공장에서의 비공인 파업 비난, 2004년 12월 아시아 쓰나미 피해자들과의 부르주아지 연대 운동 지지, 2006년 CPE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 동안 시위에서 부상당한 CRS(프랑스 진압 경찰)과의 연대 - 더 이상의 목록을 제한할 수밖에 없다 - 에서 폭력적이고 대규모로 행해진 국가의 억압에 반대하는 프랑스 노란 조끼의 반응에 대한 비난까지(주5) : 그리고 이것은 논쟁 중이지만, “폭력은 오직 폭력을 부를 뿐이다”라는, 미래의 계급 대결에서의 폭력의 불가피함에 대한 소부르주아지 공포를 표현하는 놀라울 정도의 진부함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ICC가 결국 코뮤니스트 좌파, 주요하게 국제코뮤니스트경향(International Communist Tendency)과 같은 다른 구성요소들의 주장에 설득되었고, 역사적 경로에 대한 개념과 방법을 거부하고 싸우기로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전혀 아니다. 그 거부는 다른 계급 본질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급 투쟁에 대한 원칙과 실제에 대한 의문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은 주로 (...) 해체가 사회 진화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경향이며, 그러므로 이 결의안의 주요한 취지를 구성하는 세계 상황의 모든 구성요소 (...) 라는 사실이다. [1989년 이후] 이러한 역동성은 더는 계급 간의 힘의 균형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힘의 균형이 어떻든, 세계 전쟁은 더는 문제가 아니며,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부패로 빠져들 것이다.(주6)” (같은 책, 우리의 강조)

 

맑스주의의 중요한 정치적 원칙 중 하나,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이 역사적 원동력이라는 코뮤니스트 강령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배신할 수 없다. 계급투쟁은 다른 역사적 역동 가운에 하나의 현상일 뿐인 것이 아니며, “(...) 오직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힘의 균형의 결과로서 (...) 세계는 전쟁 또는 혁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 유일하게 유효한 척도는 계급 간의 힘의 균형점을 평가하는 것이다”(주7) (ICT)(주8). 해체가 사회의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이러한 관점이 계급 간 투쟁, 그러니까 유물론적이고 역사적인 세력 간의 투쟁을 관념이나 개념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대체하지 못할 리가 없다. 계급 협력을 받아들이는 단계는 매우 작은 것이고, 가장 가벼운 사회적 혼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리가 없다. 이미 오펠 파업에서, 2004년 아시아 쓰나미 사태에서, 부상당한 경찰관과의 연대 등에서 이미 그러지 않았던가?(주9)

 

건설 중인 당을 방해하고 파괴할 수 있도록 고립을 깨고 나오다.

 

그러나 이것은 이 대회의 진정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ICC가 스스로 - 무의식적으로? - 오늘날 ICC의 모순과 심각한 약화를 노출한 문서로 되돌아가야 한다. 비록 그런 식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6월(영어판으로만) 출간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상황의 힘든 진화(The Difficult Evolution of the Proletarian Political Millieu) 파트2(주10)는 사실 23차 대회를 위한 활동에 대한 진짜 보고서와 평가서이다. 이 문서는 다양한 소위 파벌(clans)이 야기한 위기를 되돌아본다. 파벌들은 언제나 파괴되지만 지속적으로 재에서부터 되살아나, 전체 역사를 통해 ICC를 공격해왔다. 이런 방식으로 정치적 기생주의라는 혁명 그룹과 투사들에게 파괴적인 이론을 다시 소개하려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해체의 충격은 코뮤니스트 좌파의 일반 구성원들 내부에서 기생주의의 성장을 설명할 수 있다. ICC는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ICT가 된 IBRP를 포함한 좌파의 다른 구성요소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기생적 그룹에 대한] 중립성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용인에 이르고, 그 후에는 그런 요인들과 협력하는 데까지” 가 버렸다. “코뮤니스트 동지들이 (...) 그런 [그룹들]을 프롤레타리아 진영에서 배제하는 반응을 보이는 동안” ICC는, 자신의 문서에 따르면, 자신들이 고립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기생충들]의 주요한 목적은 ICC 주변에 벽을 쌓아 ICC를 다른 코뮤니스트 그룹들로부터 고립시키고 새롭게 등장한 동지들을 우리와 함께 만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 ICC가 자신 외부의 기생주의와 투쟁한 결과는 완전한 대실패였다.

 

그리고 기사는 계속된다. 따라서 이론적인, 정치적인 궤멸을 인정한다는 것은, ICC의 반응이 종파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반응의 종파주의적 측면이다. 그러나 다시, 그것은 기회주의적인 측면이기도 하다”(주11). 저자는 우리가 ICC의 기회주의적 표류를 정치적인 특징으로 묘사했던 것(주12)을 감히 받아들일 정도로 기생주의와 종파주의에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 계속 가 보자. 이 문서에 따르면 기회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반응에 충격을 주었는가?

 

“새로운 동지들[새로운 세력과 신세대 투사들]에게 우리는 종파주의가 아니라는 것을[본문에서는 밑줄] 설득하기 위해서, 2012년에는 ICT에 새로운 제안을 했었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ICT와 함께 시작한 토론은 기생주의에 대한 문제 - 어떤 그룹이나 구성요소가 코뮤니스트 좌파의 타당한 구성인가에 관한 문제 - 에 관해 지금까지 채워질 수 없는 간극으로 인해 곧 실패했다. 그리고 이것은 ICC가 이 중요한 문제를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는 경향을 보여주는 유일한 보기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세계에서 결정적으로 악평이 높았기 때문이다.”(우리의 강조). 그리고 글은 터키 분파의 통합이 실패였음을 지적하는데, 그 정확한 이유는 그들이 “기생주의의 문제에 대해 우리와 동의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문단을 읽으면서 우리는, 모두 ICC의 정치적인 기회주의와 관련된 그들의 최근 활동이 보여주려고 하는, 그리고 그 당장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모순을 보다 잘 이해한다 : 정치적 고립을 부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 지금인가? 왜냐하면 “이 새로운 세대에서 작지만 유의미한 소수들 사이에서 코뮤니스트 정치화되는 새로워지는 과정을 관찰하고 있고, 이는 종종 코뮤니스트 좌파와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의 형태이다. 설명을 요구하는 새로운 그룹과 써클뿐만 아니라 개인들이 특히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호주, 영국, 남아메리카(...)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10여 년 전 등장한 새로운 이들처럼, 지금 나타나고 있는 이들 또한 많은 위험에 직면해 있는데, 그 위험은 특정 기생충 그룹이 그들에 대해 외교적으로 공격적이라는 데서 뿐만 아니라, ICT와 같은 프롤레타리아 조직이 그런 기생충 그룹에게 보여주는 관용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외교적으로 공격적이라는 것은, ICT와 우리의 일부에 대해, 스페인 블로그 「새로운 경로(Nuevo Curso)」의 추동 아래 있는 미국의 새로운 동지들의 등장을 환영하며, 당을 위한 역사적 투쟁에서 이러한 세력들의 힘을 모으기 위해 코뮤니스트 좌파의 입장과 강령에 대한 공개적인 정치적 토론과 명확화의 과정(「혁명인가 전쟁인가」, 9, 10, 그리고 11호를 보라)을 시작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1년 반 후, ICC는 자신의 위성으로 가깝게 공생하는 사이인 기생주의적 「국제주의자 목소리(Internationalist Voices)」와 함께, 자기 자신의 언어로, 특히 「걸프만 코뮤니스트 분파(GCCF)」에 대해, 먼저 기생주의에 대해 토론하자고 설득하는 참신한 기생충스러운 공격을 시작하고 있다. GCCF가 그 입장에 반대한다는 것은 ICC에게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코뮤니스트 좌파의 경험과 강령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한 정치적인 쟁점 대신 이 주제에 관한 모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는 그 사실이 그 자체로 경험이 없는 새로운 세력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왜냐하면 ICC와 기생주의의 타당성에 대해 토론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영역, 토론과 정치적인 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고, 이는 역겹고 파괴적인, 동지들은 어떻게든 입증할 수 없고, 같은 바닥에 추락함으로써만 대응할 수밖에 없는 ‘피의자’가 되는, 개인 심리학이나 이른바 개인행동에 유리한 쪽으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생주의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이 함정은 필연적으로 닫히고, 이 토론은 혼란과 경악의 씨앗을 뿌릴 수밖에 없고, 코뮤니스트 좌파의 경험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정치적 명확화라는 본질적인 작업으로부터 벗어나 젊은 동지들, 써클, 그리고 그룹들의 열정적이고 정치적인 신념을 파괴하는 일을 착수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23차 대회의 진정한 정치적 중요성이다. 그렇다면 ICC가 그들의 자산을 역사적 원칙들과 입장들, 역사적 경로를 청산하는 데 이용했다는 것은 일시적인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23차 대회의 주요한 결과는 ICC의 남아있는 마지막 세력과 에너지를 동원하여 새로운 동지들의 정치적인 숙고와 신념을 약화시키고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 코뮤니스트 좌파와 그 입장에 대한 정치적 명확화에 대한 체계적인 재평가 작업을 방해하고 파괴하며, 혼란, 방향의 상실, 젊은 혁명가들뿐만 아니라 코뮤니스트 좌파 다른 세력들 사이 불신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기생주의에 대한 개념이 혹여 어떤 정치적인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21세기, 특히 오늘날 ICC야말로 그 가장 위험한 표현이자 화신이 될 것이다.

 

2019년 7월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그룹(IGCL)

 

 

<주>

 

[1]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702/reports-and-resolutions-23rd-congress-icc

 

[2] 국제 상황에 대한 결의, 계급 간 힘의 균형에 관한 결의, 그리고 계급투쟁에 대한 보고서

 

[3] 「국제 평론」, 130호, 2007년 17차 대회의 국제적 상황에 대한 결의

 

[4] 이러한 정치적 기회주의의 천국에 도달하기까지의 역사를 알고 싶은 독자는 ICC의 내부 분파가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로만 작성된 작성한 이 글을 참고할 수 있음. http://fractioncommuniste.org/ficci_fra/b49/b49_5.php. 비록 모든 글이 영어로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보다 광범위한 요약은 http://fractioncommuniste.org/index_eng.php?SEC=b00 참고.

 

[5] “강력한 최루탄 폭격에 반격하기 위한 페탕크 공과 다른 투척물은 전혀 효과적이지 않으며, 폭력의 심화, 사회적 혼란, 그리고 경찰국가의 강화에 기여할 뿐이다”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621/police-violence-riots-urban-guerrillas-looting-real-cause-chaos-and-violence).

 

[6] 프랑스판에서는 해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 부패라는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다. ICC 이론에서 그것들은 자본주의의 다른 단계이다. 변화는 ‘우연’일 수 없다. 특정 영어 ‘기회주의자’ 양보는 해체가 “다른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에 의해” 거부되었기 때문인가?

 

[7] ICT가 역사적 과정 개념을 거부한 금융 위기 이후 10년 문서와 우리의 응답인 역사적 경로에 대한 물음 두 문서는 혁명인가 전쟁인가 11호에 게재되었고, 계급투쟁의 역동성에 대한 분석 방법을 다룬 문제에 대한 유일한 토론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독자들이 그것을 참고하길 바란다.

 

[8] 어떤 동지들은 왜 우리가 ICT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각각 ICT와 ICC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지에 대해 자주 묻는다. 비록 우리가 그들이 기회주의로의 문을 열었을 때(보기를 들어 아나키즘에 대한 특정 입장을 보라)를 포함하여 그들의 몇몇 성명에 대해 비판을 했었을지라도, 이들 가운데 ICT는 언제나 코뮤니스트 강령의 근본적인 원칙들에 충실했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9] 여기서 우린 각각의 지점들을 발전시킬 수 없다. 우리는 IFICC의 「국제 코뮤니스트 회보(International Communist Bulletin)」를 참고한다.

 

[10]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688/fifty-years-ago-may-68-difficult-evolution-proletarian-political-milieu-part-2#_ftn1

 

[11] 오늘날의 ICT인, IBRP의 파괴를 요구하는 지점까지 : << 만약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정치 지형(Proletarian Policial Milieu) 그룹들이 파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정치적으로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 중요한 것은 IBRP 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 그것은 정치적 수준에서 사라진다. 만약 이 정책이 물리적인 소멸과 함께 끝난다면, 그것은 훨씬 나은 것이다.“(‘비밀’이어야 했던, 2005년 ICC의 16차 대회 결의안에서 발췌.: http://fractioncommuniste.org/eng/bci07/bci07_8.php)

 

[12] 2000년대 ICC의 국제 분파의 성명과, 지속적이고 다양한 경고뿐만 아니라 「혁명인가 전쟁인가」 1호, 5호를 보라(See Revolution or War #1 et 5).

 

<출처> Revolution or War 12호(특별호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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