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이름

1.

코흘리개 적 촌에서 친구넘 집 뒷방에 틀어박혀 꼼지락 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집 뒷집 사는 형님이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고, 공부도 썩 잘하더니만 집안사정은 아랑곳 없이 그만 대학에 턱 붙어버렸다. 살림살이 뻔한 지경이라 동네사람들이 돈푼이라도 모아 대학을 보내보고자 했으나 이집저집 다 털어봐도 입학금 마련할 분수도 되지 않는 지경이라...

 

그날도 한 겨울, 따땃한 아랫목에서 고구마 삶아 놓은 거 까먹고 있는데, 아들 대학문제때문에 그 형님의 부모님들이 벌인 설전이 담 너머 친구넘 뒷방 구석까지 몰려들어왔다. 요는 이런 거였다. 어머니가 "한 돈 30만원만 있으면 서울 보낼 건데..."라고 하자, 아버지가 역정을 내며 "돈 30만원이 뉘집 개 이름이여?"하는 소리.

 

어린 깜냥에 돈 30만원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 아저씨 말씀을 들어볼 때 무척 큰 돈이라는 것만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개 이름값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다는 거 아닌가. 철딱서니 없는 행인과 그 친구넘. 그 말을 듣고 계산 시작. 돈 30만원이면 20원짜리 뽀빠이를 몇 개나 사서 먹을 수 있는 거얌??

 

2.

마빡에 털이 좀 벗겨졌을만한 때였는데, 친구넘 집에서 기르던 개가 새끼를 낳았다. 다섯마린가 낳았는데, 두 마리는 어디 벌써 주고, 세 마리 강아지를 집에서 키우고 있었다. 어찌나 귀여운지 매일같이 그넘 집에 달려가 강아지랑 놀았다. 그 집에 몇 살 위의 고등학교 다니던 형이 있었는데, 이 형이 강아지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침, 점심, 저녁...

 

왜 그런 이름을 붙여주었냐니까 애들은 몰라도 된단다. 그래도 알고 싶다고 성화를 부리니 한다는 이야기가 나중에 복날 되면 한마리는 아침에 먹고 또 한마리는 점심에 먹고 남은 한마리는 저녁에 먹겠다는 이야기란다. 어린 마음에 그 귀여운 강아지들이 한 끼 식사거리가 되어 죽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안쓰러워 괜히 눈물을 찔끔거리며 잡아먹지 말라고 한 거 같다.

 

그 강아지들 무럭무럭 크는 가 싶더니 두어달 되지도 않아 전부 다른 집에 넘겨졌다. 어느 집 밥상에 기어코 고기가 되어 올라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침, 점심, 저녁이 그 흉악한 형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에 안도를 하는 행인이었다.

 

3.

늦게 들어간 대학에서 어린 동생들과 함께 농활을 가게 되었다. 아주 어릴 적에 동네 어귀에 텐트를 치고 마을 어른들에게 빨갱이들이라고 욕을 먹으면서 농활했던 어떤 학생들을 아련하게 기억하고 있던 행인. 설레임을 가지고 간 농활은 뭐 별로 그렇게 인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일은 쎄가 빠지게 했고, 술도 잘 마시고 그래서 동네 아자씨 아짐씨들에게 인기는 좋았다만...

 

숙소로 쓰고 있었던 이장어른 집에 강아지 세 마리가 있었다. 완죤 토종 변견들인데, 귀엽기는 변견들이 훨씬 더 귀여운 거 같다. 그런데 얘네들 이름이 또 가관이다. 초복이, 중복이, 말복이... 한 넘은 초복에 잡고 한 넘은 중복에 잡고 한 넘은 말복에 잡겠다는 쥔장 어른의 강한 의욕이 담긴 이름이었다.

 

당해 여름이야 이제 갓 난 새끼들이니 무사히 넘겼겠지만 이듬해 농활을 갔을 때는 세 마리 중 한 마리만이 남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바뀐데다가 덩어리가 커져서 그런지 이넘이 초복이였는지 중복이였는지 말복이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머지 두 마리는 복날도 되기 전에 밥상에 올라간 건지 아니면 다른 경로로 어찌어찌 살아남았는지 알 길이 없다.

 

4.

쬐끄만 애완견을 기르던 조카녀석. 거 뭐 이름을 들었는데, 도대체 무슨 종륜지 잘 모르겠고, 암튼 흰 색에 털이 보실보실한 녀석인데 다 커도 진짜 한 줌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 크기의 개였다. 이 애완견이 새끼를 낳았는데 또 3마리. 이넘이 이름을 붙여줬는데, 도/시/락/이란다. 허걱. 이녀석이 개 키워서 끓여먹을라고 그러나 했더니 그건 아니고, 개가 다 커봐야 한입거리도 되지 않는다고 이름을 그렇게 지었단다.

 

신기한 게 이 강아지들이 좀 크더니 지 이름을 제각각 알아 듣는 거다. 세 마리 한꺼번에 부르면 "도시락" 이렇게 되는데, 그 뜻을 알고 있는지 어떤지 세 마리 다 뛰어 오고, "도"하고 부르면 도가 오고 "시"하고 부르면 시가 오고 "락"하고 부르면 락이 뛰어온다. 그거 정말 재밌다.

 

애완견들인지라 복날 복땜용 음식으로 변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예전 어릴 적 그저 시골에서 누렁아, 검둥아 하던 개들을 생각해보면 이 애완견들 팔자가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도/시/락/은 곧 그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방구석에서 개들 뛰어다니는 꼴에 질려버린 형님이 조카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 저곳에 죄다 분양을 해버렸다. 조카넘은 며칠 동안 지 아버지에게 "도시락 내놔, 도시락 내놔"하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는...

 

5.

열우당이 창당 3주년 기념 행사를 했다. 안 봐도 그림이겠지만 망해가는 집구석, 잔치를 해도 먹을 넘이 없어 음식이 썩는다. 100년 가는 정당 어쩌구 하면서 쥐랄 용트림을 하던 노무현은 덜렁 화한 한 덩어리 보내는 것으로 입 씻었고, 복작복작거리던 그 많던 청년당원들은 먹고 살기 바쁜지 별로 오지도 않았다더라...

 

상황이 이렇다보니 당 의장인 김근태, 씁쓸한 분위기나마 뭔가 그럴싸한 국면전환용 멘트를 하나 날려야 되는데, 마침 열우당 당사에서 키우는 개가 새끼 낳은 것이 화제가 되었다. 열우당에서 키우는 개 이름은 '우리'란다. '우리'가 새끼를 낳았는데 3마리를 낳았단다. 김근태는 이걸 화제 삼아서 '우리'가 창당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강아지를 순산한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3마리 강아지들에게 "평화, 번영, 통합"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단다.

 

해체를 코앞에 두고 있는 열우당의 당의장으로서 그래도 뭔가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노심초사하고 있을 김근태가 처연해보이기도 한다. "평화, 번영, 통합"은 열우당의 창당정신이란다. 강아지들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가면서도 열우당의 의미를 부각시켜보려는 김근태의 노력이 오히려 슬퍼보인다.

 

그나저나 "평화, 번영, 통합"이라는 강아지들의 이름을 보면서 왜 갑자기 물경 30년 전 시골 어느 아저씨의 말씀이 떠올랐을까? 그 아저씨, 지금 이 사태에 대해 물정을 안다면 혹시 이렇게 고함치지 않았을까?

 

"평화, 번영, 통합이 뉘집 개 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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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1 16:33 2006/11/1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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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지막 반전이 압권이군요, 열우당에서 나서 이름까지 붙였다니 평화, 번영, 통합이라는 개(념)들이 불쌍할 따름입니다. ㅎ

  2. rudnf/ 아무튼 그 아저씨라면 분명히 저렇게 말씀하셨을 거 같아요.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아직 살아계신지 어쩐지 모르겠네요...

  3. ㅎㅎ...내가 아는 개 이름중에 압권은 보신이었습니다. 그럼 다른 개는 사철이냐고 했더니 어찌 알았냐는...

  4. 비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5. 허허...근태아저씨...시쳇말로 안습 지대롭니다....

  6. 안티고네/ 오옥... 안티고네다~~~!!! 방가우이~~~!! 고생 넘 많았삼. 그나저나 근태아자씨, 안습은 안습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