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목요일 오후였다. 참여연대에서 있었던 회의를 마치고 당사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자리가 번잡하진 않았지만 맨 뒷자리 바로 앞에 혼자 앉는 자리가 있길래 냉큼 그 자리에 앉았다. 회의 자료를 보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는데 갑자기 시끌법석하다. 뭔가 싶어서 봤더니 종로로 진입하는 부근의 정류장에서 여자 애들 3명이 부리나케 버스에 올라타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제 고등학교 1~2학년쯤 되었을까한 또래의 이 애들은 후다닥 뛰어들어오면서 바로 행인의 뒷자리, 즉 맨 뒷자리에 쪼르륵 앉기 시작했다. 얼핏 본 앳된 그애들은, 그러나 매우 질서와는 관계 없는 짙은 화장에 속칭 '거지머리'라고 하던 그 바삭바삭하게 구워내린 머리에 희안하게 생긴 옷들을 줏어 입고 있는, 속된 말로 '날라리'의 그것에 다름 아닌 외관이었다.
뒷자리에 앉아 입도 걸게 수다를 떤다. 말의 시작과 끝은 '존나', '시발'로 이루어졌고, 대화의 중간중간에 추임새처럼 '존나', '시발'이 이어졌다.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귀에 계속 그런 말들이 들려왔다. 기억을 돌이키자면 뭐 이런 내용이었다.
"아, 존나, OO가 XX오빠하고 사귄다며?"
"시바 OO 그년이 XX오빠한테 어떻게 한거지."
"근데 XX오빠가 OO에게 존나 잘해준데."
"원래 그 오빠, 사귀는 애들한텐 존나 잘해줘."
뭐 이런 식이었다.
행색과 말투가 이렇다보니 행인, 속으로 아 이거 참 뭐 이런 애들이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지는 예전에 안 그랬던가... -.-)
그러면서 이 나라의 교육문제와 아이들의 감수성과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배려 뭐 이따위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하여튼 꼴에 별 우주적 생각을 다 하고 자빠졌다는... -.-;;;)
아이들은 계속해서 '존나', '시발' 하고 있었고, 이야기는 기껏 해봐야 누가 누굴 사귀니, 뭘 얼마에 샀느니 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좀 조용히 해달라고 말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괜히 잘 놀고 있는 애들에게 분위기만 망쳐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 암튼 이래 저래 짜증이 나고 있었다.
버스가 시청쪽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진행이 잘 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뒷자리의 소음으로 인해 귀가 멍멍할 정도였는데, 차까지 막혀 가질 못하니 들여다보던 회의자료가 눈에 찰 리가 없다. 해서 다 접어놓고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조금 더 가니 차가 막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집회가 있었던 거다. 행진하는 인파가 어찌나 많은지 한 차선만 빼고는 한쪽 차선이 다 막혀있었고, 순경들이 나와서 교통정리를 하고는 있었지만 차량들이 계속 밀리고 있었다. 전국빈민대회가 열리는 중이었다. 연도에 나와 있는 사람들만 따져도 대략 3000명에 가까운 숫자로 보였다.
이들은 손에 손에 "노점상 생존권 보장", "강제철거 반대"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고, 지역 노련깃발과 빈민단체 깃발을 들고 있었으며, 강제철거를 규탄하고 노점상 생존권보장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투쟁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반드시 승리하시라는 마음 속의 격려를 보내는 행인이었다.
그런데 그 때, 뒷자리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면서 서로 떠들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리 막혀?"
"어, 데모하나봐. 무슨 일이야?"
이러면서 창 밖을 쳐다보기 위해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 또 쭈르륵 몰려간다. 순간, 행인, 속으로 아, 얘네들 또 집회하는 사람들이 길 막고 불편하게 한다고 또 뭐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번뜩 들었다. 그런데, 집회장면을 보던 이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행인, 뒤통수를 망치로 강타당한 느낌을 받게 된다.
"어, 노점상들 데모하는 건데?"
"그래서 길이 이렇게 막혔구나."
"그런데 저 사람들 저거 할 만해. 노점상들 강제로 쫓아내면 저사람들 다 굶어 죽어."
"맞아, 맞아."
"그리고 노점상들 없어지면 우리도 손해야. 저 사람들 없어지면 어디서 우리가 싸게 뭐 사고 먹니?"
"정말이야. 근데 왜 없앨라고 그러지? 그냥 둘 것이지."
오호... 이 모자란 행인아... 저 애들이 너보다 백배 낫다...
마침 얘네들의 행선지에 도착해서였는지 또 부산스럽게 후다닥 거리면서 버스를 내려버린 이 3총사. 다시 보게 되었다. 다시 보나 마나 버스 탈 때나 내릴 때나 갸들의 행색은 암만 봐도 '날라리'의 그것. 내리면서 또 지들끼리 '존나', '시발' 하면서 재잘재잘한다.
그러나 뒷자리에 앉아서 '존나', '시바'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 그 아이들을 '날라리'로 봤던 것 역시 행인이고, 그 아이들이 집회를 보면서 하는 이야기에 충격과 감동을 먹은 것도 역시 행인이다. 행인에게 묘한 거부감을 준 것도 그 아이들이고 행인에게 충격과 감동을 준 것도 역시 그 아이들이다. 이 관계는 그 아이들이 버스를 탔을 때나 버스에서 내렸을 때나 변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왜 그 짧은 몇 분 동안 행인은 거부감과 감동을 같은 존재들에게 번갈아 받았을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행인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소위 인권을 논하는 자가 겉모습과 말투만을 가지고 누군가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것. 가장 경계해야할 일을 스스로 저지르고 만 것이다. 날라리 같은 옷을 입고, 어울리지 않는 메이크업으로 안면질서를 교란하고, '시바, 존나'하고 떠들고 다닌다고 해도 그 아이들은 자신들의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고, 해야할 생각은 다 하고 사는 거다. 그런데도 왜 행인은 그 아이들에 대해 거부감부터 가져버렸을까.
아직도 멀었다... 머리속에서는 당연히 그래야할 것처럼 알고 있지만 정작 지금껏 몸으로는 체화되지 않은 것. 그런 것이 너무 많이 있다는 것을 깜짝깜짝 놀라면서 알게 되는 요즘이다.
그래야지...하면서도, 어느 순간엔가 딴 짓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가 참 많아요..그럴 때마다 스스로 깜짝깜짝 놀라곤 하죠...하지만, 전 그럴 때 기쁜 맘도 있어요...내가 긴장을 놓지 않고 살려고 하는구나...하면서요^^ 님 덕분에 저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어요^^
ㅋ 재밌다. 근데, 저아해들은 노점상 대화때 왜 갑자기 존나시발 안하는거예요! ㅎㅎㅎ
초보좌파/ 저는 언제나 초보님 글을 보면서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고 있답니다. 그리고 항상 응원하고 있구요. ^^
디디/ 비록 제 블로그 이름이 뻥구라 닷컴이지만, 쟤네들이 노점상 이야기할 때 정말로 존나시발 이런 말 한 번도 안 했답니다. 그래서 더 놀랐죠. 더 부끄러워지구요. ㅎㅎㅎ
나도 무쟈게 행인과 비슷한 선입견 가지고 사는 사람임..
허나, 이글에서는 분명히 버려야 할것을 확실히 배우고 감!!
한마디로 그 학생들에게 "쪽팔릴"뿐...쩝~
멒/ 흠... 역쉬 멒은 시원시원 하구만요. ^^
배울 걸 배워가면서, 생각속에서 거부감 가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는게 아닐까 하는. 살면서 그런 자동-관성화 과정이 없다면 이 복잡한 삶을 어찌 살아가겠슴까. 단지 그런 생각이 행동, 그사람들에 대한 어떤 행위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리고 그 생각의 위험성을 스스로 느끼고 바꾸어갈 마음만 있다면 봐줄 수 있을듯. 사실 전, "어린/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착하다"는 선입견을 깔고 시작하는데, 이게 문제 있다 싶으면서도 이 사례와 같은 오해는 생기지 않을 수 있으니 뭐 그냥 두고 삽니다. :)
지각생/ 복잡한 삶을 생각하면야 그런 자동-관성화 과정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겠지만서두, 깜딱 놀랄 정도로 뒤통수를 치는 경험을 하게 되면 한동안 반성모드로 살게 되는 것 역시 제 습관이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