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
"검찰은 고도의 정책적 판단 사항이라 할 수 있는 '탈원전'의 문제를 수사의 칼을 들어 대통령을 겨냥한다. ... 과거 고도의 정치적 재량 행위는 사법 심사의 대상에서 자제해야 한다는 전통도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 같다."
[왜냐면]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를 비판한다 / 박지웅
'정치의 사법화' 그리고 '사법의 정치화'에 대해 말들이 제법 많이 나온다. 지난번 링크 건 임재성 변호사의 글도 그렇고 이번 박지웅 변호사의 글도 그렇고. 그러고보니 죄다 한겨레네. 뭐 다른 매체나 논문에서도 이 주제가 많이 다루어지니 한겨레만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고.
먼저, 검찰이 감사원 감사결과를 바탕으로 산업부 공무원들의 자료은폐를 수사한 행위를 두고 "검찰은 고도의 정책적 판단 사항이라 할 수 있는 '탈원전'의 문제를 수사의 칼을 들어 대통령을 겨냥한다"고 할 수 있는 건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 건은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따라서 '정치의 사법화'의 사례로 들기에는 적합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렇고, 내 기억에 '정치의 사법화'를 가장 극명하게 현실화했던 사례는 아마도 대북송금사건이 아닐까 한다. DJ정부가 남북정상회담실현을 위해 현대를 통해 조선에 4억 5천만 달러를 불법적으로 넣어줬다는 게 사건의 요지다.
이것도 감사원 감사결과로 촉발된 사건이었는데, 껀수 잡은 한나라당이 특검을 요구했고, 정권말기 DJ정부와 여당이 쌩까는 상황이 이어지다가 2002년 대선을 지나면서 상황급반전 되어 2003년 2월에 특검법 통과된다.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이 때 대통령이 된 노무현이 왜 환부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대북관계는 한국상황에서 가장 고도의 정치적 판단사항이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련의 문제들은 사법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판단으로 부칠 수 있었어야 하는데말이다.
이후 상황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박지원 등 당시 주요 역할을 했던 전 정부의 관료들이 사법처리되었고, 현대 비자금 문제로 비화되자 정몽헌이 투신했고, 남북관계는 경색되기 시작했으며, 동교동계 중심의 민주계가 열우당과 척을 짓게 되고, 급기야 대통령 탄핵사건으로까지 이어지는 등의 사태로 번져갔다.
한편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통해 사법의 힘을 강화해준 대표적 사건으로는 통진당 해산 사건이 있다. 정권의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검찰을 동원하고 법원과 헌재를 동원하면서 통진당이 공중분해되는데, 기실 이런 과정들이 쌓이게 되면 정치권의 모든 정보는 검찰로 넘어가게 되고, 사법부는 상황과 경향에 따라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명분을 쥐게 된다. 검찰의 힘과 사법부의 명분이 임계를 넘어서는데 검찰과 사법부에게 정치질 하지 말라고 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지.
"고도의 정치적 재량행위는 사법심사의 대상에서 자제해야 한다는 전통"이 과연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문민정권 이전의 정권에서 일어난 '고도의 정치적 재량행위'라는 게 얼마나 민주주의적 가치, 인권적 가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정치행위는 분명히 있는 거고, 사법심사를 자제해야 할 '고도의 정치적 재량행위'를 판단할 주체는 여전히 정치주체들이다.
어쨌든 그런 '전통' 있었다는 전제하에, 그 '전통'을 확실하게 깨버린 사건은 내 입장에서는 여전히 대북송금사건이었다. 그때 피박쓴 박지원이 현 정권에서 중용되는 거나, 그때 노통 탄핵을 주도했던 추미애가 현 정권에서 법무부장관까지 하는 거 보면 과거 따위 뭐 대술까 싶기도 하다만.
생각난 김에 한 마디 더하자면, '고도의 정치적 판단' 중의 하나가 바로 정치범의 사면이다. 그런데 정치범도 정치범 나름이다. 가끔 이거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양심수'라고 별칭될 수 있는 정치범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정치적으로 교정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국가보안법 피해자들. 가장 좋은 방법은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을 하루 속히 폐지하는 거지만, 현행법에 따른 사법적 판단의 불가피성을 인정은 하되 그로 인한 피해가 지속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사면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필요한 것이 바로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다.
반면 가끔 벌어지는 혼동의 양상이 바로 죄를 지은 당사자가 정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범 취급하는 경향이다. 이건 범죄자가 정치인이라는 것일 뿐이지 정치범이라고 할 수 없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전두환 노태우. 쿠데타가 아니었다면 정치인조차도 될 수 없었던 자들이긴 한데, 어쨌든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 출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자들을 사면하는 방식이 바로 정치범 사면에 준하는 것. 여기서 명분이 되는 게 바로 '국민통합' 같은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다. 이게 어떻게 '국민통합'의 명분이 될 수 있는지는 오로지 차기 대권 정도는 넘볼 수 있는 위치의 현역 정치인들만이 안다.
상식적인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행위가 오히려 '국민통합' 같은 대의을 저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쿠데타를 저지르고 동족을 학살해도 대통령만 해먹으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사인을 전달함으로써 향후 국법체계따위 힘만 있으면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인식을 확산하는 이런 행위가 결국은 사회불안을 조장하게 되는데 거기서 무슨 '국민통합' 같은 게 나오겠나?
정치인 범죄자들에 대한 사면과 같은 이러한 '고도의 정치적 판단'은 사법부의 권위를 붕괴시키는 첩경이 된다. 그러니 사법부는 더욱 더 '사법의 정치화'를 꾀하게 되고. 이낙연은 과거에 대통령 사면권을 제한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했던 걸로 아는데, 이건 뭐 입장 바뀌면 과거고 나발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