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을 기다리며
백수건달의 나날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나는 언젠가는 강물에 드리운 곧은 바늘로 세상을 낚을 것이라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뇌 안에 망상계가 아직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마저도 놓아버린다면 결국 내 모든 것이 강물에 떠내려갈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다. 그 불안을 감추고자 나는 또다시 예전의 '동지'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오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찾아 헤매고, 또는 '적대'의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의 현황을 둘러본다.
어떤 이들은 사라졌고, 어떤 이들은 달라졌다. 어떤 이들은 누가 보더라도 퇴보를 했고, 어떤 이들은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성장했고, 어떤 이들은 현상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나는 어디쯤 있는 것일까? 내 낚시바늘은 지금 저 물결 어느 즈음까지 뻗아나가 있는 걸까. 미끼조차 걸지 않은 그 바늘의 끝을 스치고 지나는 물살들은 지금 어디까지 흘러가고 있을까?
굴혈을 파고 침잠해 있는 동안 나타나는 긍정적인 증상은 스스로를 더 많이 돌아보게 된다는 거다.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부끄러웠던 일들을 하나하나 돌이키면서 반성과 회한에 사로잡힌다. 짧지만 빛났던 어떤 날들을 돌이키면서 그 성과의 근저에서 내가 한 일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본다. 잘 한 건 잘 한거고, 못한 건 또 못한 거다. 누구에겐가는 사과를 해야 할 거 같고, 누군가에게는 사과를 받아야 할 것도 있다.
부정적인 증상은 굉장히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무엇보다도 내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확신이 점점 없어진다. 책을 봐도 잘 모르겠고, 온라인을 둘러봐도 잘 모르겠다. 나이를 먹을 수록 고리타분해지는 사람이 있고 너그러워지는 사람이 있는데, 아마도 지금의 나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되지만, 그게 성숙해짐으로써 여유있어진 것인지, 아니면 점점 확신이 없어짐으로 인해 주춤거리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러한 와중에, 과거에 스쳤던 인연들의 오늘날을 살펴보면 게중에는 여전히 누구보다도 발빠르게 세상을 읽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사람들에게 내놓는 이들이 있다. 부러운 재주다. 하지만 안타깝기도 한 것이, 안팎으로 읽어들인 세상을 내놓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게 그저 시류에 따른 유행 수준에서 소비되면서, 그 스스로조차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의 체계를 제시하는데까지 나가지 못하는 그의 한계가 그렇다.
그건 그렇고, 나는 여전히 곧은 낚시바늘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끝 어느 지점에는 세계가 지금과는 달라야 한다는 이상에 동조했던 자들의 꿈과 신념이 묻어 있다. 물 속에 있는 생명체들에게 그건 떡밥조차 안 될 터이지만, 곧은 낚시바늘을 드리우고 있는 내가 차라리 그 떡밥에 낚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꿈은 사회주의라고도 표현되고 공산주의라고도 표현되었다. 또는 평등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랑이라고 하기도 했다. 나는 끝내 내가 문 그 떡밥을 꽉 문채 이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다.
함께 그 떡밥을 물었던, 아니 그게 아니라 내게 그 떡밥을 던졌던 사람들 중 중요한 사람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 사람들을 다시 소환하려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유령을 기다리는 자들. 스스로 영매가 되고자 하는 자들. 난 유물론자이므로, 유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는 입장이지만, 내가 아직 지고 있는 망상계의 작동 속에서 그들은 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유령을 기다리는 사람 중 하나, 아니 유령과 함께 하는 사람 중 하나일 터.
불러볼수록 가슴이 절절한 이름들이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얼굴들이다. 소줏잔을 쥐게 만드는 애증들이고, 다시 담배 한 대를 아쉽게 하는 노스텔지어들이다.
그렇게 나는 유령을 기다린다. 그들과 함께 꾸었던 꿈을 계속 꾸고 있다. 그 꿈을 사회주의라고도 했고 공산주의라고도 했다. 평등이라고 했고 사랑이라고 했다. 곧은 낚시바늘 끝에는 유령들이 모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