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성과 지적 게으름
"극우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정치적 올바름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좌파라면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의무가 있다고 느끼지 마세요.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마세요. 특히 그 생각을 안 하는 단 한 가지 대단한 방법은 누가 당신을 반대하면 ‘파시스트’라는 라벨을 붙여버리는 거죠. 하지만 그건 지적 게으름이에요. ...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거 알잖아요."
"육류와 설탕의 소비는 줄이고, 과일과 채소의 소비를 늘릴 것... 건강한 식단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는 전세계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어떤 위원회에서 발표한 '지구건강식단'은 개무시하고, 단짠단짠 고기고기로 이루어진 식단을 즐길 것 같은 지젝이 4월 19일 조던 피터슨과 진행한 대담의 마지막에 한 말이다.
2019 4 19 조던 피터슨 vs 슬라보예 지젝 대담의 마지막 발언 번역 영상
그런데 한편, 한겨레에 실린 칼럼에서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자폐성 장애의 이런 특징은 사실 우리가 기후변화에 대처할 때 견지해야 하는 태도다. 세상에는 기후변화가 과학적 근거를 지닌 현상이 아닌 것처럼 호도하는 이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런 정치적 수사들에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 그저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 결론에 따라 기후변화를 막으려는 노력만을 고집스럽게 반복해야 한다."
관련기사: 한겨레 - [세계의 창] 누가 기후변화를 막을 것인가/슬라보이 지제크
지젝은 지구를 위협하는 본질적 문제인 기후변화에 근본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강력한 행위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기껏 소비형태의 개인적 변화를 통해 부수효과로서 지구의 부담을 줄이는 '지구건강식단' 정도나 발표하는 전 세계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어떤 위원회를 조소한다.
대담에서 한 발언과 칼럼에 실린 발언은 왠지 겉돈다는 느낌이다. 아주 묘하게. 물론 방구석에 처박혀 몇 번이고 수정과 퇴고를 거쳐 나오는 칼럼의 정련된 문장과, 그렇잖아도 그냥 툭툭 질러대는 성격에 아무튼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생각의 흐름에 따라 입에서 나오는 말들의 조합이 초지일관 정합적이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괴리감이란.
지젝이 스스로를 광대의 위치에 올려놓고, 자본주의체제에서는 가장 위험한 발언이 얼마든지 가장 우아하게 물적 지위와 명예를 확보할 수 있는 방편(잘 팔리는 상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자라고 생각하다보니 일정하게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말마따나 지적 게으름을 향유하고 싶진 않다보니 그의 말을 뜯어보며 지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시시때때로 발견하게 되는 이 말들의 모순과 말과 행동의 모순은 보면 볼수록 난처하다.
자, 내가 지젝의 팬이라면, 이제 난 자폐성 태도를 견지하면서 다른 정치적 수사들을 신경쓰지 않은 채 내가 생각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고집스럽게 반복하면서 기후변화 따위는 없다는 자들을 향해 파시스트라고 규정하고 쳐 발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임을 각성하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의무감은 잠시 접어 놓은 채, 책상머리에 머리를 파묻고 지적 게으름을 통찰하면서 더 많은 고민과 더 많은 정치적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가?
아침이 되면 또 창 밖에 온갖 새들이 지젝지젝 거릴텐데, 아이구야... 시끄러워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