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넷 20주년
돌이켜보면 어른들의 뻥구라는 마빡에 새똥도 벗겨지지 않은 꼬맹이에겐 완전 그 격이 달랐다. 예를 들면 어른들이 '뼈가 시리다'라는 말씀을 하시면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뼈가 시린 걸까, 적이 궁금하기도 했었다. 펄펄 끓는 국물을 들이키면서 "어, 시원하다"라고 하거나 살이 고대로 익어버릴 듯 김이 오르는 열탕에 몸을 넣으면서 "어, 시원하다"하는 말을 들을 때도 이렇게 어른들 뻥은 개뻥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거다.
그러다가, 내가 그 어른들의 나이쯤 되고 나니 그 말들이 다 기냥 몸에 쩍쩍 달라붙는다는 거. 밤을 새워 뱃속에 술을 집어넣으며 간을 혹사시킨 후 그 새벽녘에 마주한 해장국. 그 해장국의 뜨끈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 영락없이 내 입에서도 "어, 시원하다"는 말이 저절로 우러나왔다. 이건 그나마 아주 일찍이 느끼게 된 공감이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술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
공장에서 며칠을 철야하던 시기에, 기숙사에 욕탕이 있음에도 기어이 동인천 시내까지 나가 목욕탕을 찾았다. 그리고는 그 뜨거운 물에 몸을 집어 넣었고, 온 몸의 피로감이 일시에 녹아내리는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역시 저절로 "어, 시원하다"는 말이 목을 넘어 튀어나왔다. 힘겨운 노동의 뒤끝에 간혹 향유할 수 있는 호사라는 생각이 있었고, 언젠가 목욕탕이 아니라 싸우나를 가잤더니 그건 부르주아지들의 사치라고 처절히 거부하던 선배 생각도 나고. ㅎ
민주노동당이 문래동 당사로 옮긴 그해 겨울에, 난 거처를 잡지 못해서 당사에서 겨울을 났다. 그러던 중 며칠 오살하게 추운 날이 있었는데, 전기장판 하나를 둘둘말고 잤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는데 온 삭신이 쑤시기 시작했다. 뼈마디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어떤 뻐근함과 통증이 밀려오는데, 그제서야 나는 아, 이게 어른들이 "뼈가 시리다"라고 하시던 그거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이갸... 뼈가 시린 게 이런 정도였다니... 암튼 그로부터 온 몸이 거의 줄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되자 이를 보다 못한 연구원 동지들이 자신들의 자취방에 거처하도록 배려해주기도 했고.
어른들 말씀 중에 진짜 과장도 과장도 이런 과장이 없다고 여겼던 말씀 중에 하나가 시간이 쏜살 같이 흐른다는 거였다. 우와, 이건 뭐 뻥도 이정도면 신급이 아닌가 했더랬다. 어릴 때는 다 그런 건지, 아니면 나만 좀 성질이 괴이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땐 뭔 우라질놈의 시간이 이렇게 안 가는지 짜증이 났더랬다. 난 빨리 커서 집을 떠나고 싶었고, 얼른 커서 돈을 벌고 싶었고, 얼른 커서 내 맘대로 살고 싶었다. 학교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울 수 있는 유일한 합리적 방법은 나이를 먹는 거였다고 생각했으니.
그렇게 안 가는 게 시간인데, 어른들은 뻑하면 아우,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냐, 눈 깜빡 할 사이에 시간이 가네, 시간이 좀 안 갔으면 좋겠네, 이런 개소리들이나 하고 계셨으니 그 정서는 도저히 공감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른들의 이런 뻥은 운치가 있어보였다. 그래서 난 이 말이 현실적인 말이라기보다는 어떤 문학적인 과장법의 한 종류라고 여겼던 것이다.
오늘 진보넷 20주년 기념 후원의 날 행사가 있다. 벌써 20주년이라니. 우와, 우와, 우와... 말 그대로 시간이 화살같이 흘렀구나. 참세상 들락거리면서 투쟁속보 찾다가 회원이 되었고, 그후 어찌어찌 지금까지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는데, 그게 벌써 20년이라니. 시간이 살처럼 흐른다는 말이 이런 거였구나.
아, 물론 이 말의 의미를 오늘에서야 처음 안 건 아니다. 여담이지만, 시간이 살처럼 흐른다는 말은 남들이 군대갔다가 제대할 때 이미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군복무할 때는 지랄맞게도 안 가던 시간인데, 딴 넘들은 어쩐 일인지 엊그제 입대한 것 같은데 고개 한 번 돌리면 제대더라... 시간이 쏜살처럼 지난다는 말을 또 실감하는 건 애들이 클 때다. 뉘집 자식인지 태어나서 응애거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아니 벌써 무슨 결혼을 한다고 청첩이 날아오고... 그럴 때면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간다는 걸 느끼게 된다는 거지.
하지만 진보넷 20주년은 좀 감회가 다르다. 뭔가 잘못된 것에 대항하고, 그걸 넘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나름의 삶을 살게 된 데에는 진보넷의 힘이 엄청나게 컸다. 처음 진보넷과 함께 이런저런 일을 할 때는 나도 참 생기발랄하고 무서운 게 없었는데... 그렇게 하다 화들짝 돌아본 나는 이제 인조인간의 길을 걸어야 할만큼 신체기능이 저하되었고, 머리도 잘 안 돌아가고, 이젠 뭐 그닥 뭘 하겠다는 의욕 같은 것도 잘 안 나는데, 아니 그런데 진보넷이 20주년이라니. ㅎㅎ...
자자, 소회는 이정도로 마무리 하고, 얼른 하던 거 마저 치우고, 일찌감치 행사장에 가야겠다. 총회도 있다고 하니. 아무튼 진보넷 20주년 일단은 축하하고 볼 일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일을 해주면 좋겠다. 거기 나도 좀 묻어가고. ㅎ
더 많은 분들이 진보넷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주시면 좋겠다. 표시나지는 않지만, 오늘날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음으로 양으로 진보넷이 해놓은 일로 인해 요모조모 혜택을 보는 게 많다. 진보넷 만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