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희망, 새로운 전망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윗세대들하고 이야길 하다보면 가끔은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지만, 그 향수의 언저리에 나름의 수긍할 부분이 하나 있다면 그건 어쩌면 '희망'일 듯 하다. 지지리 궁색에 배 곯는 게 일상 다반사였던 그이들에게 조금만 더 허리띠를 졸라매면 이밥에 고깃국 먹는 날이 올 거라는 어떤 전망.
지금의 수준에서 보면 민주주의의 가능성이나 인권존중의 가능성 같은 희망이 아니라 기껏 먹고 사는 수준에서의 희망에 목매다는 것이 답답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흘 열 끼를 굶어 보면 그런 말 나오기 쉽지 않을 거다. 배 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 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비장한 각오는 아직 배가 덜 고프기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지.
어쨌거나 박정희 때가 그래도 나았다는 어른들이 그 희망을 성취하여 잘 먹고 잘 살게 된 경우는 내 주변에서만큼은 보질 못했지만, 이분들 공유하는 정서는 그래도 이만큼 먹고 살게 된 게 다 박정희 덕분이라는 거. 어찌보면 이건 자신의 희망이 그릇된 것이 아니었다는 일종의 자위인 듯도 한데, 그러한 생각 속에서 그들은 배고팠던 시절에 허리띠를 졸라맬 수 있었고, 남는 거 없는 인생의 종반부에서 그 시절을 잘 버텨 오늘 그래도 밥술이나 뜰 수 있다는 범위 안에서 소기의 목적달성을 확인한다.
공부를 하게 된 이래 확인한 건, 87체제니 97체제니 하는 체제분석보다도 이 사회는 아직까지 유신 체제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이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보면 당시에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희망'을 대체할만한 어떤 전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큰 그림도 그렇고 작은 그림도 마찬가지다. 일련의 비분강개가 그것만으로 행동을 유발할 수는 없다. 타이느이 마음을 얻으려면 분노에 기댈 것이 아니라, 왜 그리 해야 하는가의 당위를 넘어서,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된다는 전망을 보여주어야 할 터. 나는 그런 의미에서 전망을 기획하는 능력이 모자랐고, 전망을 통해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능력의 한계가 여실한 지금, 뭔가 더 노력을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이제 손을 털어야 할 것인지 판단해야겠다.
전 늘 행인님 글에서 희망을 보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