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당은 무엇을 해야 하나?(2013년 1월 경)
18대 대선과 진보신당의 대응에 관하여④
진보신당은 무엇을 해야 하나?
분할의 정치
앞서 진행된 3회의 분석에서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번 대선이 17대 대선처럼 특정후보에게 완전히 경도된 투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당한 힘겨루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1백만 표 이상의 격차가 났다고 할지라도 51.6%와 47.9%는 유권자를 거의 반분한 것이다.
87년 헌법체제 아래의 선거에서 양강구도의 박빙이 이번처럼 강했던 예는 2002년 대선이 거의 유일하다. DJ가 승리했던 1997년 대선에서 3위였던 이인제가 획득한 표는 492만 표를 넘었었고, 2007년 대선에서 3위였던 무소속 이회창은 360만 표에 가까운 표를 획득했었다. 또한 이 선거에서 4위를 한 문국현이 137만 표 이상을 획득하기도 했다. 즉 2007년에는 이명박에게 쏟아졌던 1,149만여 표 외에 약 5백만 표에 가까운 표가 분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보수양당체제가 고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런데 87년 이후 남한의 정치지형을 검토하자면 이러한 우려는 이미 시효가 만료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남한의 정당계보는 크게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한 축과 평민당-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민주통합당으로 이어지는 한 축이 양대 축을 이룬 채 이어져왔다.
보수양당체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타 명멸했던 충청권 지역기반의 정당들과 한때 반짝했던 개혁당과 열우당, 그리고 좌파 진보진영의 군소 정당들이 존재하기는 하나 이 양당구조 안에서 살아남기조차 버거운 실정이다. 재미있는 것은 현재의 새누리당을 축으로하는 진영과는 달리 민주통합당은 비록 양당제의 한 축으로 서 있기는 하나 스스로의 역량만으로는 새누리당에 대적하지 못하는 허약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남한의 정치지형이 이미 양당제로 고착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겠고, 다만 양당제의 틀을 유지하기엔 그 한 축인 민주통합당이 상당한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러한 현상과 연결되어 두 번째 우려가 나타나는데, 결과적으로 남한 사회에서 소위 진보좌파의 정치역량이라는 것은 기껏 해봐야 민주통합당에 수혈됨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새누리당으로 대변되는 극우의 집권을 저지하는데 장애물 정도로 취급되거나 둘 중 하나의 수준에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그런 상황이 반복되어왔다. 대표적으로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이 얻은 표는 기껏 95만 7천여 표에 불과했고 전체 3.9%의 득표율에 머물렀다. 그러나 대선 직전까지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요구하는 세력들의 준동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고, 만일 이 때 노무현이 낙선했다면 그 죄과를 고스란히 뒤집어 쓸 수도 있었다.
보수양당체제가 고착되는 것은 진보신당을 비롯한 세력에게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계개편에 관한 여러 의견 중 소위 ‘빅텐트’론은 결국 진보좌파세력에게 자유주의 보수정당인 민주당에 편입될 것을 강요하는 논리에 불과했다. 그렇게 될 경우 독자적 정치세력으로서 민주당과 전혀 별개의 전망과 정책을 가지고 있는 집단은 반드시 사멸하게 될 터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보수양당체제의 견실한 구도 안에서 진보 혹은 좌파를 이야기하는 정당, 특히 진보신당은 어떤 방식으로 독자적이면서 유효한 정치세력화를 현실화할 수 있을 것인가?
세대론, 지역론, 인물론을 돌파하자
당연하게도, 정책이라던가 투쟁이라던가 하는 지금까지의 활동방식을 보다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공자님 말씀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에서 그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진보정당에 정책이 부족했던가, 투쟁이 부족했던가?
부족하다면 한 없이 부족할 수 있겠으나,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진보정당이 지난 10여 년 간 구상했던 정책들을 이제는 양대 보수정당이 어떤 형태로든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환언하자면 어떤 보수정당들보다도 진보정당이 더욱 성실하게 정책을 제시해 왔음을 의미한다.
투쟁이라는 측면에서 역시 진보정당의 투쟁이 비난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모자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2004년 4대 악법 개폐투쟁에서 보았듯이 역량을 넘어서는 현장결합투쟁으로 인해 보다 장기적인 전망을 세우고 이를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는 과정을 간과한 바도 적지 않다.
이번 대선의 결과를 분석하면서 확인된 문제들 중 특히 이 시리즈에서 언급된 세 가지 문제, 즉 세대와 지역 그리고 인물 혹은 이슈라는 측면에서 진보신당의 정책과 투쟁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노파심에서 언급하자면, 세대론, 지역론, 인물론이라는 특정한 틀에 얽매여 모든 판단을 하고자함이 결코 아니라, 앞으로 진보신당의 계획과 활동에 이러한 요소들을 충분히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정도의 의미임을 밝힌다. 이제 결론을 대신하여 이 부분에 대해 간략하게 짚도록 하자.
(1) 세대 간 분할의 극복을 위해
먼저 세대의 문제다. 어느 세대든 그 세대에 맞는 필수적인 욕구가 존재한다. 예컨대 아래와 같이 분류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각 세대 별로 가지고 있는 문제가 대충 이러한 분류체계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할 때, 예를 들어 군대와 취업, 등록금 문제의 해소를 20대에 맞춤한 정책으로 만들 수 있겠고, 60대의 경우에는 은퇴 이후 생활고를 덜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정책을 낼 수 있겠다. 그런데 이게 과연 적절할까?
보수정당과 구별되는 진보신당의 정책은 특정 세대의 문제에 집중하여 착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50대를 위한 정책을 준비한다고 가정하자. 50대에게 가장 필요한 대책에는 자녀교육과 건강 및 부모봉양 같은 분야가 필수다. 그런데 50대를 대상으로 필수적으로 준비되어야 할 정책이라는 것이 실은 그대로 20대와 60대 이상 연령층의 문제와도 결부된다.
50대가 고려해야 할 자녀교육의 문제는 10대 및 20대의 진학 및 스펙의 문제와 이어진다. 또한 60대 이상 노년층의 건강문제 및 생활고 문제와도 직결된다. 결국 50대에 특유한 정책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정책은 전체 사회를 아우르는 커다란 그림을 통해서 맥락적으로 추출되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모든 연령대에 대한 대책과 전혀 별개의 차원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보수정당들과 진보신당의 정책은 달라야 한다. 그래야만, 청년문제가 튀어나오면 죄다 청년 이야기만 하다가 갑자기 50대 문제가 불거지니까 50대가 ‘개객끼’냐 아니냐 하고 따지는 짓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세대 간에 나타나는 투표의 성향을 그대로 세대 간의 갈등이나 더 나가 세대 간 전쟁까지로 비화하는 주장은 그럴싸해 보일 수도 있지만 해법을 찾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보신당은 세대 간 갈등이 아니라 세대 간의 협동과 교류가 가능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공자(孔子)의 뜻이었던 바, “나이든 사람들이 편안하고, 동년배(친구)가 서로 믿고, 다음 세대를 품어 안는(老人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정신이야말로 세대 간의 균열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정치적 이상이 될 것이다.
(2) 지역분할구도를 완화하기 위해
이 시리즈 제2편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지역적 분할구도라는 것이 정확하게 동서로 양분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먼저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경기도 선거결과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일종의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결과는 현재 보수양당의 위치와 정책, 그리고 진보신당의 방향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지방자치단체선거에서는 일정하게 그 지역 내의 사안을 그 지역이 선호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정도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많이 약화되며 대통령선거에서는 더 많이 약화된다. 결국 대통령선거의 경우에 실질적인 문제해결의 기대가 작동하기보다는 추상적이며 포괄적인 기대가 더 크게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이런 구조에서 예컨대 진보신당의 현재 상태로는 어떠한 정책과 후보를 내세우더라도 소정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여촌야도’의 심리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은 적어도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담론과 남한의 동쪽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담론이 아직까지도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같은 수도권이라고 할지라도 서울을 중심으로 방사선의 안쪽에 근접해 있는 지역과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관심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더 나가서는 똑같은 영남이라고 할지라도 대구와 부산의 관심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집권을 위해서는 이 모든 지역으로부터 일정한 지지를 얻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17대 대선과 18대 대선에서 확인된 것은 특정 지역의 몰표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승리하는 세력이 집권에 성공한다는 점이다. 결국 지역분할구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각 지역에 산재된 각각의 욕구에 대해 특유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그러한 대안을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더구나 이러한 각개전투식 지역대응은 자칫하면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정교한 틀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으로 전환될 위험이 있다. 녹색의 가치를 강원도에 강조한다는 것은 당의 방향에 근거할 때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산간오지의 주민들이 별다른 대책 없이 도시화된 삶을 포기할리는 만무하다. 결국 어느 정도 개발이 중심 되는 정책이 나오게 될 수밖에 없는데, 진보신당의 입장에서 이러한 개발논리를 적극적으로 주창할 수는 없다. 진보신당이 추구하는 녹색의 가치를 폐기하면서까지 개발논리를 따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지역분할구도라는 넘기 힘든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지역의 당면 이해와 진보신당이 추구하는 가치가 일정하게 합의될 수 있는 틀과 시간이 필요하다.
지난한 과정이 필요한 것과는 달리, 기술적으로 지역분할구도를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대통령이 되는 것만을 지상의 과제로 설정하지 않는 한, 지방정부의 구성과 국회의 구성에 방법을 달리함으로써 지역분할구도에 일정한 파열을 낼 수도 있다. 즉 정당법, 공직선거법, 정치자금법 등 정치관계법 일체를 획기적으로 개정하는 방법이다.
새누리당 정권이 연장됨으로 인하여 정치개혁의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진 것은 사실이나, 기실 이 문제는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집권을 하였더라도 쉽게 해결될 사안은 아니다. 특히 정치현실에 대해 거의 무지에 가까운 인식을 드러낸 바 있는 안철수의 경우 오히려 현상태보다 더욱 후퇴한 정치상황을 목적할 위험성까지 있었다. 어쨌거나 새누리당의 현 상황을 검토하면 이 보수세력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고양을 위한 정치개혁프로그램을 진척시킬 것이라는 희망은 지금 상태로는 접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고, 진보신당은 나름대로 주장할 것을 주장해야 한다. 간명한 논의를 위해 세부적인 사안을 다루지는 못하지만, 그동안 여러 차례 제시되었던 각급 공직선거의 결선투표제 도입, 국회의원 전면 비례대표제 도입 및 지방자치의회 비례대표제, 정당설립요건의 완화 및 정당 가입 등 정치활동의 자유보장, 공직선거법 상 각종 규제철폐 또는 완화, 국고보조금 지급방식 변경 등을 골자로 하는 정치자금법 개정 등은 공고화된 지역분할구도를 현저하게 약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정리하자면, 지역분할구도는 해소하기 어렵지만 그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속칭 ‘중앙정치’의 관행을 벗어 던지고 지역의 사안을 전국의 사안으로 만들어내며 전국의 사안을 지역의 사안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정치활동이 필요하다. 각 지역의 욕구와 이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높임으로써 수권에 대한 신뢰가 쌓이도록 하는 과정 역시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보다 근본적인 제도변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
(3) 평소에 이슈가 될 정책과 인물을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던 어떠한 정책이나 인물이 선거시기에 갑자기 화제로 등장하면서 바람을 일으키는 현상은 아쉽지만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가 없다. 이 연재물의 3편에서도 언급했듯이 2002년을 추억하는 사람들 사이에 간혹 노무현의 등장과 노란색 ‘바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히려 이 경우,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던 정몽준이 월드컵 ‘바람’을 등에 업고 대권에 도전했던 것과 노무현을 비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결론은 갑자기 튀어나와 뭔가 해보려했던 정몽준이 아니라 바보소리 들어가면서 나름대로 자기 길을 걷고 그 길 가는 곳마다 화제를 뿌리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던 노무현이 대권을 거머쥐었다는 것이다.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이번 대선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보자. 박근혜가 복지라는 주제를 자신의 전매특허처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4년이 되었다. 2007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내세웠던 ‘줄푸세’ 정책이 이후에도 박근혜 정책의 골간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전혀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반면 수구적 색깔로 인식되어왔던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유력 대권주자가 난데없이 복지라는 이슈를 들고 나온 것에 대해 반대진영은 놀라는 한편 애써 그 의미를 축소했고, 같은 보수진영에서는 배신이 아니냐는 볼맨 소리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경제민주화 또한 매한가지였다. 그 실질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를 요하겠으나, 헌법 제119조 제2항을 기초했다고 하는 김종인을 상석에 모시면서 경제민주화를 주제로 이슈 파이팅을 만들어낸 것은 박근혜의 능력이다.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는 이슈가 자유주의 세력인 민주통합당에서 더 먼저 그리고 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이 두 가지 이슈가 박근혜를 통해서 먼저 그리고 명확하게 논란거리로 등장했다고 각인되었다.
평상시 인물의 인지도가 선거시기에도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편의 글에서 대강 일별했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어쨌든 정책이든 인물이든 갑자기 나타나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선거는 평상시의 모든 정치활동이 단 한 순간에 평가되는 과정이다. 비록 그 양상과 결과가 합리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조차도 그동안의 모습에 대한 평가이다.
민주사회에서 선거는 유권자들이 투표를 통해 어떤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의 과거를 평가하고 미래를 맡길 주체를 선별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가받는 과거는 무기한이며 맡겨지는 미래는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진보신당이 향후 노동정치와 녹색정치 등 지향하는 가치에 걸맞은 정치활동을 전개해 나간다고 할 때, 그와 동시에 제도정치권 내의 유효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평상시에 논란이 될 수 있는 이슈의 제시와 의제가 될 수 있는 정책의 생산, 더불어 대중들로부터 신뢰받으면서 당의 스피커가 될 수 있는 인물을 내놓는 것에 보다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나가며
대선 결과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멘붕’에 빠진 건 사실이다. 물론 나 역시 ‘멘붕’에 빠졌었는데, 그게 대선 후가 아니라 대선 전이라는 차이가 있다. 보수양당이 각축을 벌이는 판이 물론 진보신당에게는 고전의 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정작 대선시기에 우리 당의 후보가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나의 ‘멘붕’은 거기에서 시작했다. 이 충격이 워낙 강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대선 결과에 대해서는 그저 시큰둥할 뿐이었다.
원인의 근거가 어디 있는가를 따질 필요도 없이, 정작 앞으로 진보신당이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수한 문제들을 해소하는 과정은 지난하고 아플 것이다. 대선에 대한 평가와 당의 정치활동에 대한 평가 모두가 보다 면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평가 자체가 힘들 것이고 이를 토대로 전망과 계획을 내는 것 역시 고통스러울 것이다.
본문에서 살펴본 세 가지 지점이 진보신당의 정치활동의 결정적 ABC도 아니다. 이건 그냥 앞으로의 활동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중 몇 가지에 불과하다. 다만, 지금 이 시기에 논란이 되고 있는 세대론과 지역론, 그리고 인물론에 대해 검토하는 것이 앞으로 진행될 평가와 계획에 약간의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50대 보수화라는 근거도 없고 맥락도 없는 분석에 혹할 이유도 없고, 오로지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커다란 틀을 설계하고 그 안에서 점점 조밀하게 계획을 만들어나갈 때 세대 간의 갈등과 같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식민지가 된 지역을 해방하고, 지역정치를 살아있도록 만들어냄으로써 지난 반 세기 동안 남한 사회의 동서를 양분하고 있는 지역분할구도 역시 점차 해소될 것이다. 특히 정치적 측면에서 이러한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정치관계법의 전면적인 개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더불어 평상시에 말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고 이 말들과 사람들이 유권자들에게 널리 알려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모든 정책과 그 정책의 실현, 그리고 다방면에서 벌어질 각종 투쟁은 이러한 세 분야의 노력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진보신당이 유효한 정치세력으로 거듭나는 길이 열릴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