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것의 유리함, 사람이 문제다(2013년 1월 경)
18대 대선과 진보신당의 대응에 관하여③
낯익은 것의 유리함, 사람이 문제다
박근혜가 이긴 게 놀랍다고?
세대별 투표율 및 지지율의 문제보다 지역별 분할구도의 문제가 보다 더 심각한 상황임을 확인했지만, 이번 대선은 이것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어떤 의문이 하나 더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인물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가? 그것도 그 아비의 군사정권에 맞서 피를 흘리며 쟁취한 민주주의의 절차를 통해 그 딸이 대통령이 되는 이 상황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번 대선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문재인을 위시한 야권의 모든 후보들은 객관적인 전력 상 각각의 모든 역량을 합한다고 하더라도 박근혜를 이길 가능성이 거의 0에 가까웠다. 이 글 서두에 말했던 것처럼, 문재인이 받은 14,692,632표는 사실 그 정도의 득표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왜 그런가?
제도권 정치에서 인물이 가지고 있는 비중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렇게 중요한 요소가 좌파정당에서는 오히려 간과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 정도다. 진보신당의 경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한 인물의 명망성이라는 것을 일종의 경계해야 할 필요악으로 상정하는 운동권 진영의 우려는 도를 넘어섰다. 인물의 명망성에 대한 과도한 기피를 보이면서도 정작 운동권 진영은 수시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나 브라질의 룰라, 더 나가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수령님과 장군님을 호명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잡설을 제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면, 이번 대선은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 진행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문재인이 거둔 엄청난 득표가 놀라울 뿐이며, 이것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 일으켰던 ‘바람’과도 다른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토록 엄청난 지지를 받았음에도 문재인은 패했고, 박근혜는 그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 문제다.
상조회 정치의 한계
애초부터 2012년의 정치지형은 ‘상조회정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주요 정치세력과 그 대표 인물들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안철수가 예외적인 현상이긴 했으나, 실은 안철수라는 인물이 가진 복합적인 요소는 ‘본사 상조회’를 제외한 ‘박통 상조회’와 ‘노통 상조회’ 어느 쪽에 섞이더라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의 것이었기에 상조회정치의 틀 밖에서 분석할 여지는 별로 없다.
‘박통상조회’와 ‘노통상조회’의 대립각, 그리고 여기에 끼어 어떻게 해서든 캐스팅보트를 행사 하고팠던 ‘본사상조회’의 욕망이 2012 정치판을 해석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각각의 상조회는 나름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판촉기법으로 각각의 관장사를 했으며 지지자들을 끌어모았다. 그런데 본사상조회를 제외하고 각 상조회가 가지고 있는 대표상품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박통’과 ‘노통’이라는 상호(商號)의 차이 외에 별다른 차별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표상품에 특색이 없다는 것, 즉 양 세력이 내놓은 정책이라는 것이 거의 차별성을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요인이라는 것은 결국 인물 이외에는 남는 것이 없게 된다. 박근혜라는 박통상조회의 대표, 문재인이라는 노통상조회의 대표만이 선택을 위한 고려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박근혜와 문재인을 정밀하게 비교할 필요는 없겠다. 이미 대선과정에서 충분히 비교되고 검증된 내용을 굳이 다시 열거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논의를 위해 몇 가지만 놓고 보기로 하자. 먼저 박근혜가 2012 대선을 위해 얼마나 오랜 기간을 계획하고 준비했는지 살펴보자. 박근혜는 1997년에 이미 당시 한나라당의 선대위 고문이라는 자격으로 정계에 등장한다. 그리고 2008년 보궐선거에서 대구 달성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정수장학회 운영 등 박정희의 유산관리인으로 살아오긴 했으나 실질적인 정치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결국 박근혜의 정치역정은 개인사적으로도 이미 25년이라는 시간이 경과된 것이다.
이에 비해, 문재인이 정치인으로서 등장한 것은 불과 1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혁신과 통합의 공동대표를 맡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것일 뿐이고, 직업적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 시기를 기산하면 불과 8개월 정도가 문재인이라는 사람을 세상에 알리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선대본부장을 지내고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을 역임한 경력을 따지더라도, 이들 경력은 단지 정부의 스텝에 불과할 뿐 직업적 정치인이라고 볼 수 없다. 대중에게 자신을 직접 알릴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사람은 정치입문 이후 경과된 시간에서부터 거의 한 세대를 격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가 있으며, 대중에게 스스로를 각인시킬 수 있었던 과정 자체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엔 두 사람의 개인적 인지도뿐만이 아니라 이 두 사람의 배경이 되는 자들의 인지도가 함께 묶여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박근혜라는 인물은 항상 박정희와 육영수라는 인물이 동행을 했으며, 문재인에게는 싫건 좋건 간에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뒤편에 어른거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양 상조회의 결정적 차이였다.
먼저, ‘박정희-육영수-박근혜’라는 혈연관계의 인물들이 패키지로 묶여서 인지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박근혜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부의 적’을 만들지 않고 온전하게 피아가 구별되는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수세력 안에서는 ‘박정희-육영수-박근혜’의 구도에 대해 별다른 반발이 없었고, 오히려 이러한 구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양상이 이루어졌다.
반면, ‘노무현-문재인’이라는 패키지는 밖에서는 물론이려니와 그 안에서조차도 분란의 씨앗으로 작동하고 만다. 이미 4.11 총선에서 벌어졌던 친노와 반노간의 알력, 그리고 이와 더불어 벌어진 친호남계와 친영남계의 분란, 거기에 더해 열우당 386들과 구 민주계의 반목이 대선정국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노무현-문재인’의 구도는 제대로 된 상조회조차 만들어내지 못한 채, 한편으로는 2002년의 ‘바람’을 기대하는 수준에 머무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무현을 대체할 안철수라는 인물에 대한 의존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박근혜가 비록 회고와 추모를 등에 업은 박통상조회의 적통으로 세간의 비난을 받았으나, 실제 2004년 이후 박근혜의 행보는 박정희와는 별개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거듭되는 한나라당의 위기 속에서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능력을 과시하며 보수세력의 결집을 시기마다 이끌어 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는 선대의 후광이 아닌 스스로의 캐릭터를 쌓았으며 특히 선대와의 차별화에까지 성공했다.
반대로 문재인은 짧은 시간이 물리적 한계로 작동했다고는 하나 어찌되었건 자신만의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데에 실패했다. 오히려 안철수가 없었다면 대선과정에서 양강구도를 만들어낼 가능성조차도 희박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안철수의 ‘바람’이 문재인이 거둔 엄청난 지지표의 상당수를 차지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안철수는 양날의 칼이 되는데, 한편으로는 문재인의 지지율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놀라울 정도의 보수결집을 유발하는 역할도 했던 것이다.
문재인의 14,692,632표가 더 놀랍다
바로 여기서, 선택을 해야 할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독재자의 딸이 되었건 뭐가 되었건 간에 선대의 18년과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중들의 인식에 선명하게 각인된 박근혜와, 기껏 해봐야 1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뭘 했는지도 모르는 문재인,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정치입문이 불과 반년 밖에 되지 않는 안철수와 내용도 없는 단일화 운운하면서 혼란양상을 보이고 있는 민주통합당의 후보 사이에서 결정을 해야 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혹자는 유권자가 이성적인 판단을 한다면 과연 박근혜가 이길 수 있었을까라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이성적 판단을 하는 유권자들이라면 문재인을 찍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더 강하다. 어차피 박근혜나 문재인이나 만나서 소주 한 잔 한 사이들도 아닌데다가 각각의 정책을 일일이 살필 만큼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다. 그 판단이 이성적이냐 아니냐는 의문은 이 상황에서 사치에 불과하다.
이러한 인물론에 대하여 유일하게 반론을 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호남의 투표성향에서 확인된다. 사실상 구 열우당계에서부터 현재의 민주통합당 주류에 이르기까지, 호남은 어떤 면에서 배반을 당한 입장이었다. 4.11 총선에서조차 민주통합당은 자신들의 지역적 기반인 호남을 거의 내팽개친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등한시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에서 호남은 눈물이 날 정도의 단결력을 과시하면서 문재인을 지지했다.
호남의 표는 문재인 개인의 명망에 대한 것도 아니고 민주통합당의 지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독재의 망령이 다시 육화되는 것에 대한 반발 그 자체였다. 따라서 호남의 투표성향이 인물론을 지양하기 위한 근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1997년 대선에서 DJ를 선택한, 그리고 다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을 선택한 호남의 경향이 오히려 인물론에 대한 적합한 근거가 될지언정.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 선거 때의 ‘바람’이 예상외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낙관이다. 예를 들어 기반도 없었던 노무현이 2002년 ‘노풍’을 통해 당선될 수 있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뜬금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상황을 판단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2002년의 ‘노풍’ 역시 무명의 노무현을 갑자기 대권의 주인으로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불만했기 때문에 불었던 것이었고, 갑자기 불어 닥친 바람 한 점으로 인해 스타가 될 정도로 노무현의 정치역정이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인물이 되었든 정책이 되었든, 선거라는 특정 시기에 그것이 이슈가 되고 인구에 회자되기 위해서는 이미 평상시에 그 인물과 정책에 대한 설왕설래가 충분히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평상시에 유권자에게 인식되지 않았던 인물이나 정책이 선거시기에 갑자기 폭발적인 관심을 끌고 모든 상황을 장악한다는 것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아닌 말로, 오세훈을 서울시장에서 끌어내리게 된 무상급식이라는 주제는 이미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슈가 될 만한 사회적 배경을 만들어왔던 주제였다. 서울시장자리 놓고 각축을 벌이는 과정에서 갑자기 생겨난 이슈가 아니었던 것이다.
인물이나 정책이나 ‘갑툭튀’의 한계
마찬가지로, 실상 문재인이나 안철수라는 인물 역시 현직 서울시장인 박원순보다도 유권자들에게 알려진 기간이 적었고, 이들은 그동안 어떤 이슈의 중심에도 서 본 적이 없다. 노무현 정권에서 문재인의 역할도 그랬고, 기껏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야권주자들의 경선에 처음으로 깜짝 등장해 ‘아름다운 양보’를 보여줬던 안철수도 그 인지도라는 것이 유권자들의 인식 속에 각인될 만큼의 시간을 가져본 바가 없다.
물론 민주주의의 문제를 인물의 문제로 등치시킬 수도 있는 위험이 인물론에 잠재되어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변혁을 지향하는 사람들일수록 이러한 위험성에 과도하다싶을 정도로 경계를 하는 것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물이라는 측면을 검토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 역시 추상적인 측면의 논의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선거에 연연하지 않고 근본에서부터 세상을 뒤집겠다는 결기는 가상하나, 제도정치권 안에서 유효한 정치세력으로 기반을 잡지 못하는 한 혁명 이외에는 이 구도를 뒤집지 못한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한 것일지언정 버려야 할 폐단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의 간략한 분석을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이러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저 추운 철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하거나 스스로 목을 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권리를 우리의 권력을 통해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