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글쓰기는 한 번 버릇을 들이면 계속 이어지지만, 한 번 마음이 멀어지면 글쓰기도 점점 멀어진다. 마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블거그뿐만 아니라 홈페이지건, 다른 웹사이트의 게시판이건 온라인에서의 글쓰기는 노트에 끄적거리는 글쓰기와, 또는 노트북에 저장해둔 일기 파일을 열고 자판을 구들기는 것과는 사뭇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개인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이 블로그를 시작한 것은 좀 덜 사적인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주제를 정하고 주제에 따라 마음이 가는대로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사실, 대학의 신문이나 이러저러한 매체에서 청탁을 받고 쓰는 글과 이런 종류의 글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어떤 글이 더 나은 글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내킬 때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블로그는 편하다.

나는 여기 알라딘에서,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중요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주제별로 정리하여 제공하고 있는 블로거들을 알고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노고를 가상(嘉尙)하게 여기기는 하지만 그렇게 칭찬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의 개인적인 일들을 세세하게 올리고 있는 블로그를 접하게 되면 묘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아마 일종의 노출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어떤 편인가? 나의 블로그는? 나의 글쓰기는? 아, 나는 잡종이 아닌가? 아직 진화하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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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6:05 2012/01/09 16:05

파괴가 없으면 생성도 없다. 이 말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파괴가 긍정될 수도 있는가? 생성은 반드시 파괴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가? 파괴는 나쁘고 생성은 좋은가? 이런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단순한 생각이 어느새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언젠가, 아마 10년도 더 전에, 잘 알고 지내던 전교조 선생님들과 저녁을 겸해 담소를 나누던 중, "학교가 무너져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나왔다. 좀 썰렁하던 상황에 내가 아마 이런 말을 덧붙임으로써 완전히 분위기를 망치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공교육이 죽어야 학교가 산다."

물론 내가 공교육을 무너뜨리고 사교육을 육성해야 한다는 의미로 했던 말은 결코 아니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이 말은 사실, "교육개혁은 사회개혁이다"는 말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고 세월이 좀 흘러 나는 생계를 핑계로 한쪽 발을 사교육 시장에 담그고 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우연이었을까, 그 때 험악한 분위기에서 상황을 부드럽게 정리해준 선생님을 만났을 때 이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허허 이거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이시는구만" 하고 껄껄 웃었다. 나는 이미 학교가 무너지고 교육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그만 선생이 되고 말았다. 대학에서 비정규교수로 학생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강의를 하면서도 나는 자꾸 방향을 잃고 만다. 나는 여기 왜 이렇게 서 있는 것일까? 이 모순덩어리의 현장에 나는 왜, 무슨 열망으로 존재하는가? 나는 답을 찾고 싶다.


시간강사 처우개선 외면한 대학자율화
(경향신문 입력: 2008년 09월 18일 00:11:57)

대학에 개설된 모든 강의의 셋 가운데 하나는 ‘시간강사’가 맡는다. 학생들은 “교수님”이라고 부르지만 대학은 교수로 보지 않는 경계인이 시간강사다. 학자로서 이 대학 저 강의실을 전전하며 대학생을 가르치는 게 본업인 이들에 대해 교육법은 대학교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박사학위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비정규직 보호법에서도 제외됐다. 전임교수 임금의 20%를 받으며 전체 대학 교양강좌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박사 시간강사가 5만명이 넘는다. 세계적인 대학육성이 요란한 요즘에도 이들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엊그제 확정 발표한 대학자율화 2단계 1차 추진과제에서도 시간강사의 처우 문제는 어디에도 없다. 교과부는 교원 직급을 조교수·부교수·정교수의 3단계로 줄여 ‘전임강사’를 없앴다. 전임교수인데도 ‘강사’라는 명칭이 ‘시간강사’란 오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을 배려한 것이다. 교과부가 교수 사기 진작 차원에서 정책적 배려를 한 것은 가상하다. 문제는 그들이 없으면 대학이 굴러가지 못하는 시간강사의 사기 진작에 대해선 왜 이처럼 무심한가 하는 점이다.

시간강사 처우개선을 위해선 그들에게 교원 지위를 부여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대가 마련돼 있다. 단지 ‘돈 타령’에 진전을 보지 못할 뿐이다. 대학은 인건비 줄이기에 혈안이고, 정치권은 사학 눈치보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시간강사는 결코 돈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안전망의 문제이자 우리나라의 지적 수준에 관한 문제로 접근해야 마땅하다. 시간강사를 지금처럼 방치하고 외면한다면 젊은 지성은 학문의 길을 멀리하게 되고, 지식의 곳간은 바닥을 드러낼 터이며, ‘세계수준 연구중심 대학 육성’(WCU) 사업은 쭉정이 구상이 될지 모른다. 시간강사의 처우개선과 사기 진작을 우리 사회가 시급하고도 절실한 교육투자로 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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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6:04 2012/01/09 16:04

서울에서 나이트클럽 화재로 소방관 3명이 숨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형 참사건 소형 참사건, 인재라고 부르든 뭐라 부르든 적어도 한국에서 죽음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런지 어제 경향신문의 <여적>을 읽다, 갑자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의 제목은 "소방관"이었다. 나는 소방 공무원의 급여 수준을 잘 알지는 못하는데, 이들이 화재 1건당 받는 수당이 불과 3,600원이라고 한다. 필자인 김학순 기자는 "목숨을 걸고 화마와 사투를 벌이는 이들에 대한 예우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사실 나도 믿어지지 않는다.

한국은 똑똑이 콤플렉스와 둔재 열등감이 지배하는 사회다. 다들 자기 아이는 영재라고 생각하거나 영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생들도 똑똑한 아이들을 좋아한다. 둔한 아이들은 상대하기가 피곤하기 때문이다. 학원 안 다니는 아이는 이상한 아이 취급받는 사회(아이 학원 안 보내는 부모는 더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다고 한다)라 누구나 할 거 없이 다들 아이들을 학원 보내는 것이 상식이 된 사회. 학교에서는 더 가르칠 게 없기 때문에 학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할 수밖에 없는 기이한 교육 현실을 가지고 있는 나라. 그래서 학원에 다니지 않거나, 못 다니는 소수의 아이들은 학교 생활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머리가 좋고 학교 공부를 잘해서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을 나와 고시라도 볼 정도가 되어야 사람 취급을 받는 나라. 그 중에서도 검사나 판사 정도는 되어야한다. 경찰 공무원이나 소방 공무원은 저 밑에 널려있는 둔재들이 그나마 악다구니 쓰며 머리 굴려야 겨우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좋은 직업이 되었다. 직업의 위계가 그 나라 정신구조의 위계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는 지극히 유물론적이다.

지난 5월인가 서울대학교에서 "인문대학 진단평가"라는 걸 실시하고 그 평가 보고서를 발표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진단평가 보고"라는 보고서의 "시간강사"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대학교에서 제공되는 학부 전공 과목에 관한 서울대 전체 만족도를 조사한 교무처 자료에 의하면, 인문대학은 2006학년도 1학기에 평점 4.08로 전체 단과대학 2위, 2006학년도 2학기에는 평점 4.10으로 3위, 2007학년도 2학기에는 만족도 평점이 4.13으로 전체 2위를 차지하였다. 이 자료는 인문학 위기론이 사회 전체에 팽배해 있는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에 맞서서 인문학 중흥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 인문대학 교수들에게 큰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문대학 교육의 상당 부분은 시간 강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자료1>을 통해 볼 때, 실제 시간강사가 담당하는 학생의 수는 전체 수강생 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행정실에 따르면, 비겸직(전업) 시간강사들은 시간당 42,500원 겸직(비전업) 시간강사들은 시간당 30,000원의 강사료를 지급받고 있다.

열악한 처우를 받는 강사들 보다는 정당하고 적절한 보수와 좋은 근무 환경을 보장 받는 강사들이 학생들의 교육에 더욱 더 헌신할 것이며, 헌신적이고 동기 부여된 시간강사들이 훨씬 더 양질의 교육을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시간강사들을 우리들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동일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이며 우리들의 학문활동의 동반자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인식에 부합하는 실제적 처우개선을 위한 제도 개발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 정도의 관점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대학에서 시간강사의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대학의 규정집에서 실려 있는 '위촉장'이다. 대학의 비정규교수인 시간강사는 대학과 공식적으로 계약을 맺지 않는다. 부산대학교의 경우 "시간강사에 관한 규정"을 보면 이런 항목이 있다.

제4조 (시간강사의 위촉) ①시간강사는 매학기마다 학과장의 추천으로 대학(원)장의 요청에 의하여 총장이 위촉한다.
②시간강사를 위촉할 때에는 [별지 1] 서식에 의한 위촉장을 교부한다.


규정집에 실려 있는 "위촉장"은 아주 단출하다. 맨 위에 "위촉장"이라고 되어 있는 그 아래 "귀하를 ○○. ○학기 시간강사에 위촉합니다. 년 월 일 부산대학교 총장" 뭐 물론 나는 한 번도 이런 위촉장을 받아본 적이 없다. 대학에 고용된 자이면서 고용과 관련한 어떤 권리와 의무 조항을 들어본 기억이 없고, 그런 규정도 없다. 경북대학교는 비정규교수노조와 학교가 단체협약을 맺어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비정규교수에게 적용되는 취업규칙을 명시하기로 했다.

한편으로, 많은 시간강사들은 자신의 고용조건뿐만 아니라 타 대학의 강의료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서울대는 시간강사의 강의료가 다른 국립대와 달리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비정규교수노조가 없는 국립대의 경우 강의료는 동일하게 42,500원이다. 다른 업종의 비정규직이 정규직 급여의 50%에서 70%를 받는 반면 대학의 시간강사는 전임교수의 급여에 비해 5배에서 8배까지 차이가 난다. 전임교수의 평균 연봉이 4천500에서 5천이다(명시된 부분만 고려할 경우). 대학 시간강사가 전임교수 급여의 50%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시간당 최소 8만5천원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지금 국립대 시간강사 강의료는 2배로 인상되어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엄청난 차별이 존재한다. 시간강사는 대학에 연구실이 없다. 공동연구실은 말이 연구실이지 독서실 수준이다. 부산대 인문대에는 300여명의 시간강사가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자재는 컴퓨터 2대, 프린터 1대, 복사기 1대에 불과하다. 서울대는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다. 서울대에서는 요즘 시간강사를 모두 1년에서 2년 단위의 계약직인 “비정년트랙”으로 전환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구체적인 안이 공개되어야 시비를 가릴 수 있겠지만 대학의 치부와 같은 문제를 또 다른 형식의 차별로 덮으려는 의도는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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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4:55 2012/01/09 1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