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읽기 좋은 '좋은 칼럼'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뒤적거리면서도 마땅한 칼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좋은 칼럼'의 범위를 너무 제한했기 때문일까? 아이들과 부담없이 읽기 위해서는 현실 정치가 소재가 되면 곤란할 거라고 생각한 내가 문제가 있는 걸까? 아무래도 정치는 부담스러울 게 분명하다. 그러다 박노자의 칼럼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신문 칼럼은 정치적인 이슈에서 자유롭지 않다. 더욱이 그 박노자가 아닌가?
박노자의 이 칼럼은 2007년 3월 한겨레신문에 실린 글이다. 학교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한 글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28년전이나 큰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문제의 원인을 짚기는 쉬우나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는 어려운 법. 그러나 박노자는 명쾌하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그런 방책을 말이다.
그러나 교육이 사라진 사회에서, 교육의 의미가 교육과 무관하게 되어버린 사회에서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교육개혁이 사회개혁이라는 말조차 부질없어 보이는 시대에 교육을 둘러싼 문제들이 교육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도 당연한 일인가 보다. 그래서 제도를 혁파하자는 박노자의 방책이 방책으로 들리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박노자칼럼] 아이들이 폭력화되는 이유(한겨레신문, 20070321 18:33)
폭력 관련 뉴스의 ‘선정성’ 때문인가? 최근에 하루가 멀다고 매체에서 중·고등학생,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의 잔혹한 친구 폭행 소식이 올라 세인들의 눈길을 끈다. 언론들은 뉴스의 충격성만을 부각시켜 폭력의 원인을 기껏해야 ‘폭력 만화의 영향’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고, 또 학교 폭력 관련 기사에 달려 있는 댓글들을 보면 ‘가해자 엄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만 높다. 아이들이 왜 ‘고문 기술자’들을 흉내 내게 되는지에는 관심이 거의 가지 않는 모양이다. 폭력을 인간의 내재적 본능으로 봐서 그런 것인가?
인간에게 폭력 능력이 부여돼 있지만 폭력성이란 인성 발달의 당연한 결과라고 보기가 어렵다. 물론 사춘기에 들어 자기 과시 욕구가 강해지지만, 이 욕구는 교육자들이 얼마든지 비폭력적으로 분출하게 할 수 있다. 1921년에 영국에서 세워진 서머힐과 같은 대안학교에서는, 학교의 모든 사항들에 대한 결정권과 이성 교제의 권리 등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폭력이 아닌 민주적 참여를 통해 인정 욕구를 분출해 왔다. 그런데 일반적 근대 교육, 특히 오늘날 한국의 교육은 과연 어떤가? 어른들을 흉내 내면서 자신들의 사회를 꾸미게 돼 있는 아이들에게는 학교는 ‘폭력 교사’ 노릇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서 폭력이란 아직도 입시 위주 교육의 현장에서 ‘학급 통제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으로 인식돼 있는 체벌이나 폭언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자기 차별화 욕구를 억눌러 결국 그 욕구가 폭력을 통해 분출되도록 유도하듯 하는 두발 규제나 교복 착용 등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훈육주의적 제도들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직접적인 폭력보다는, 학교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간접적인 폭력들은 아이들의 폭력화에 더 많은 ‘기여’를 한다.
학교에서의 전체적인 권위주의 질서와 출세주의, 철저한 위계 서열의 관계는 결국 학생들로 하여금 주먹의 서열에서 더 높은 위치를 점하려는 욕망을 갖도록 부추긴다. 예컨대 교장과 일선 교사 사이의 관계가 절대 평등하지 않다는 점, 일부의 평교사들이 교장에게 굴복함으로써 학교사회에의 ‘출세’를 꾀해야 한다는 점 등을 학생들이 과연 눈치채지 못할 것인가? 군림·굴복의 현실을 목격하는 그들에게는 ‘힘’을 매개체로 군림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이 생기게 돼 있다. 이미 중학교부터 학생들이 성적순으로 위계·서열화된다면 암기력과 인내력이 부족해서든 가정이 어려워 학습 환경이 조성돼 있지 않아서든 어떤 불가피한 이유로 하위권이라는 이름의 ‘천민’이 된 학생은 과연 자신을 폭력적으로 하위에 배치시킨 체제를 두고 복수욕을 불태우지 않겠는가? 물론 친구들에게 주먹을 휘둘러 자신의 억울함을 푸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방법이지만, 낙오자·하위자의 복수욕을 키운 것도, 학교 현실 속의 체벌과 텔레비전의 온갖 폭력적 영상들을 통해 그 복수 방법을 가르쳐준 것도 바로 이 사회다. 생활과 무관한 지식들을 아무런 흥미 유발이나 개인적인 동기 부여 없이 주입시키고, 거기에다 주입 과정에서의 ‘약육강식’ 경쟁에서 하위로 밀려나는 이들을 가장 민감한 나이에 멸시의 대상물로 만든다면 이것은 폭력의 ‘부추김’ 그 자체다.
오늘날 우리 학교는 기회주의, 출세주의를 가르치는 동시에 수많은 아이들을 폭력자로 만든다. 피해자와 가해자들의 망가진 인생들에 대한 책임은, 학교를 ‘우승열패’의 지옥으로 만든 학벌 카스트 제도와 이 제도의 폐단을 다 알면서도 혁파시키려 하지 않는 우리들 모두 같이 지게 돼 있다.
어제, 그리고 오늘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데 나는 불현듯 푸른 바다를 떠 올렸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방파제에 올라 서서 바다를 보면 푸른 바다가 어떻게 보일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동시에 최백호의 청사포가 생각났다. 그런데 나는 청사포에서 푸른 모래를 본 기억이 없다. 푸른 바다와 푸른 모래. 최백호의 노랫말처럼, 청사포에는 푸른 모래가 없다.
해운대 지나서 꽃피는 동백섬 해운대를 지나서 달맞이 고개에서 바다로 무너지는 청사포 언제 부터인가 푸른 모래는 없고 발아래 포구에는 파도만 부딪치어 퍼렇게 퍼렇게 멍이 드는데 ...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내일이라고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년이라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시답잖게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수년이 지났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경우 산다는 게 뭘까, 이런 시답잖은 생각도 하게 된다. 살아간다는 것.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 관성의 법칙이 삶의 법칙이 되어 버린 것일까?
지난학기 학생들에게 "여러분들은 매일매일이 새롭고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간다."고 말했더니 썰렁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마지못해 인간 수명이 80년 정도라면 40부터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거라고 덧붙였더니 더 썰렁해졌다. 다들 눈알 굴리는 소리가 자갈 구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밤에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달라도 매일 동일한 일과를 반복한다. 나처럼 특수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일반화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하루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일상의 아주 미세한 순간들을 우리의 '정상적'인 눈으로 포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주 가끔 이런 반복을 벗어나기도 한다. 아주 아주 아주 아주 가끔이라고 해야겠다.
들뢰즈라면 우리가 일상의 정상성에서 벗어난다면 새로운 어떤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뻔한 짓은 술을 마시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데 이는 우리의 감각이 일상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다음으로, 연애를 하면 된다. 그 사람은 그 누구와도 다른 사람이다. 그 사람은 토마스의 말처럼 "백만분의 일의 상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가 매번 새로운 여자를 발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토마스는 매번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토마스는 수많은 여자들에게서 그녀들만의 특이성을 발견하는 재미를 알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물론 토마스처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특별한 감성을 소유하거나 스스로 계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오래전에 로버트 실버버그의 <다잉 인사이드>를 읽고 메모 해 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애시드가 자신의 신경계를 통과하면서 벌이는 작용에 대해 그때그때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녀가 종이에 연필을 긁적대는 것이 정신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지적할 때가지 메모를 계속했다. 시각 효과가 진행되고 있었다. 벽이 약간 오목하게 파인 것처럼 보였고, 벽토의 홈들이 예사롭지 않은 질감과 복잡함을 띠기 시작했다. 모든 사물들의 색채가 비현실적일 만큼 밝았다. 더러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한 줄기 햇빛은 무지갯빛을 띠며 마루 위에 분광을 흩뿌려놓았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반들로 체인지에 걸어둔 음악은 묘한 강렬함을 새로이 얻었다. 그녀는 선율 라인을 잘 따라가지 못했고, 마치 턴테이블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듯 보였지만, 사운드 자체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밀도와 손에 잡힐 듯한 현실감으로 그녀를 매혹했다. 또한 그녀의 귀에 마치 공기가 뺨을 스치고 휙 지나가는 듯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생소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다른 행성에 와 있어." 그렇게 두 번 말했다. 그녀는 홍조를 띠었고 흥분되면서도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