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도 보수다

일상 2012/02/19 20:04

어제 늦은 밤 앤서니와 맥주를 마시면서 푸념하듯이, "한국 여성들은 연애의 목적이 결혼이야" 이렇게 말했더니 앤서니는 미국 여성들도 그렇다고 말한다. 36살인 앤서니는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물론 학원에서.

앤서니는 대학에서 International relationship을 전공했다. 세부적으로는 한국과 일본, 아르헨티나의 수입과 수출 모형을 공부했단다. 그래서 내가 한국과 일본의 유사성에 대해, 그리고 한국과 아르헨티나와 공통점으로 오랜 기간의 군부독재를 언급했더니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좀 설명해주었더니 내가 너무 정치적이란다. 미국인들은 대체적으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다른 사회체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내가 만난 젊은) 미국인들은 대체로 '사회주의=독재, 자본주의=민주주의'라는 도식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그들의 반사회주의적 성향이 때론 거북하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한국인보다 훨씬 더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다. 이성관계에서는 물론이고 동성애에 대해서 우리의 보수성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에서 만난 이들은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동양계나 흑인들과 자유롭고 편하게 잘 지내는 걸 보면 내가 어느 정도 편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특히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들 사이의 교류나 관계는 인종적 틈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다른 면에서도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친구들을 만나면서 나는 내가 가진 협소한 시각과 편견과 마주치면서 깜짝 놀란다.

 

저녁 먹으면서 우연히 읽었는데 포스팅하려고 한겨레신문 웹사이트를 이리저리 뒤져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칼럼이나 기사들은 굵은 글씨와 헤드라인으로 크게 장식되어 있는데 이 글은 어디 귀퉁이에 살짝 숨겨둔 모양이다. 이렇게 뒤져서라도 찾은 까닭은 '글이 읽기가 참 좋았다'고 말 할 수 있어서다.

 


나는 보수다, 겁쟁이다
/한겨레신문

내가 몸담고 있는 학과의 젊은 교수들의 정치적 성향은 제각각이다. 월가 시위에 동조하는 지역 시위가 내가 사는 동네에서 열릴 때, 나는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듯이 카메라를 둘러메고 학생들과 쏘다니며 모처럼 흥에 겨웠지만 의외로 동료 교수들 반응은 썰렁했다. 공화당 티파티랑 뭐가 다르냐며 못마땅해하는 축도 있었고 그래 봤자 소용없을 거라고,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냉소주의자도 있었다. 정치적 외향만을 따져볼 때 동료들 가운데 나는 분명 진보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나 가족과 사적 영역으로 들어가 보면 나는 여전히 고루한 보수, 혹은 겁쟁이 소시민에 가깝다.

내 동료 중 한명은 아이 셋 딸린 이혼녀와 결혼했다. 그에게는 초혼이었다. 2남1녀 중 딸아이는 지적 장애를 가졌다. 좋은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총각 교수가 아이 셋 딸린 이혼녀랑 결혼을 하는 건 한국에선 매우 이례적인,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설정 아닌가. 가족을 동반한 식사모임에서 그가 딸아이랑 즉석에서 지은 노래를 흥얼흥얼 부르는 걸 들었다. 사뭇 감동적이었다. “넌 정말 훌륭한 아빠다” 했더니 “아빠가 다 그렇지 뭐. 특별할 게 있나” 하는데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명 내 감동의 코드는 “자기가 낳은 자식도 아닌데…”라는 고정관념에서 나왔을 터. 그는 딸아이를 돌보기 위해 모든 수업을 오전에 마치고 오후 두시에는 칼같이 퇴근을 한다. 목요일 저녁은 가족과 텔레비전 보는 날이라며 약속도 잡지 않는다.

또다른 동료 교수는 일벌레다. 매달 논문 한 편씩을 써낼 만큼 부지런하고 재기 넘치는 젊은 연구자인데 유대인인 그는 동네 바에서 노래하는 흑인여성과 결혼했다. 둘 다 음악을 좋아하니 있을 법한 일이긴 하지만 밤무대 흑인가수와 백인 대학교수의 조합이 여전히 낯설다. 요즘엔 딸 쌍둥이를 낳고 돌보느라 코빼기 보기도 힘들다. 나보다 두 해 먼저 부임한 여자 동료도 있다. 인형처럼 또릿또릿한 외모에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해서 여자인 내가 봐도 단박에 반할 만큼 매력적인 여성이다. 그는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 아빠하고는 한집에 같이 살면서 아이를 키우지만 결혼은 안 하고 산다. 다른 이에게 소개를 할 때도 호칭은 “남편”이 아니라 “파트너”다. 사생활에 대해선 묻지 않는 게 예의기도 하지만 난 내 속에 웅크린 완고한 고정관념을 들킬까 겁나 자세한 얘기를 묻지 못한다.

내가 이십대에 배운 진보에는 빠져 있던 무언가가 그들에겐 있다. 패싸움과 체벌과 소지품검사를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한 중년세대는 일찌감치 거세당한 자유주의의 상상력. 인습과 체면의 허식에 번번이 진저리를 치면서도 못 이기는 척 적당히 타협하는 편안함에 길들여진 탓일까. 내 자식만큼은 나와 다르게 자라게 하고 싶은데 어쩜 그 걸림돌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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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9 20:04 2012/02/19 20:04

애국가 /이오덕

좋은글 2012/02/19 15:09
애국가
/이오덕

얼마 전 어느 자리에 나갔다가 '국민의례'가 있어 애국가를 부르게 되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목청을 가다듬어 부르는데, 그날 따라 나는 벙어리가 되었다. 애국가를 부를 마음이 안 났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부르는 애국가를 들으면서, 이제부터 내 입으로 이 애국가를 부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국민이면 어린아이들도 누구나 부르는 애국가, 나 자신이 50년도 넘게 불러온 애국가를 왜 부르지 않겠다고 생각했나?

그 까닭은 이렇다. 바로 그 며칠 전에 어느 일간신문에서, 애국가 노랫말을 지은 사람이 윤치호란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신문은 윤치호 자신이 지은 애국가를 손수 붓으로 써서 '윤치호 작사'라 해 놓은 것을 사진으로 공개했다. 이래서 지금까지 누가 지었는지 확실히 몰랐던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윤치호라면 세상이 다 아는 친일파로 우리 민족을 배반한 사람이다. 우리가 얼마나 부를 노래가 없어서 하필이면 민족을 팔아먹은 반역자가 지은 노래를 의식 때마다 불러야 하나? 지금까지는 몰라서 불렀지만, 그 사실을 안 다음에는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내 감정과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나는 전부터 우리 애국가를 별로 신통찮게 여겨 온 터이다. 노랫말도 그렇고, 곡도 좋게 안 보였다. 우리 애국가 노랫말이 일본 제국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닮았다고 하는 말은 진작부터 있었다. 일본의 '기미가요'를 우리말로 옮겨 보자. '우리 천황 거룩한 세상은/ 천년이고 만년이고/ 조그만 돌이 큰바위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영원하리라)'

이 일본의 국가는 '조그만 돌이 큰 바위 되어…' 했는데, 우리는 반대로 그 넓고 커다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했으니 더욱 좋지 않다는 말도 가끔 들었다. 아무튼 우리 애국가는 국민들의 정서에서 자연스럽게 안겨 들거나 가슴을 찡하게 울려 주는 것이 없는, 다만 머리로 만들어 낸 말로 되어 있는 것만은 동등하다.

다음은 곡이 또 문제가 된다. 이 곡은 우선 크고 무거운 느낌을 주어서 점잖고 엄숙한 몸가짐으로 부르게 된다. 우리가 부르고 들어온 의식 노래는 일제시대부터 '기미가요'를 비롯해서 으레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거나 굳어지게 하는 것이었기에 애국가도 당연히 그래야만 된다고 여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노래와는 반대로 사람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고 피어나게 하는 노래, 따뜻하고 기쁘게 해주는 노래, 또는 가슴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듯한 노래는 애국가나 국가로 될 수 없을까? 민주주의로 살아가는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서 부르는 노래라면 당연히 이런 노래라야 참된 나라 사랑의 노래가 되고, 땅 사랑, 사람 사랑의 노래가 될 것 아닌가? 나는 세계의 다른 많은 나라의 노래를 그다지 알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처럼 꼿꼿하게 '차려'를 해서 한결같이 굳은 표정으로 애국가나 국가를 부르는 사람은 우리 말고는 일본 사람들밖에 없는 줄 안다.

무슨 일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먼저 애국가를 부르고 나면 그만 자리가 아주 차가워지고 흥이 나지 않아서 그 일이 제대로 안 되는 수가 많다. 의논을 할 때는 딱딱한 말, 형식으로 꾸민 말, 겉도는 말부터 나온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실에서 어린이회나 학급회 회의를 할 때 먼저 애국가를 부르고 나면 그만 아이들 마음이 얼어붙어서 말이 잘 안 나온다. 선생님이 언제나 지시하는 말을 흉내내고 되풀이하다가 끝내기가 보통이다. 이것이 애국가의 효용성이다.

좋은 애국가를 새로 만들 수는 없는가?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참된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마음을 일으키려 한다면 차라리 '아리랑'이니 '고향의 봄'을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다. 이런 노래라면 부르는 사람 모두가 저마다 가슴속에서 조국과 고향을 생각하는 뜨거운 마음이 터져 나와, 그 자리가 모든 사람을 하나로 이어 주는 참으로 바람직한 자리가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애국가와 국가를 견주어 보면 두 나라가 어떤 점에서 아주 닮았다는 느낌이 들면서, 며칠 전 신문 <아침 햇살>에 쓴 논설주간의 글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글의 중간 제목이 '한·일, 비겁한 동반자'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에 맺은 말이 다음과 같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침략 전쟁을 반성하지 않은 일본과, 식민지 청산을 주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혈손이 정신적 후손이 강고히 권력을 붙잡고 있는 한국은 사실 정신적으로 동반자 관계에 있다. 그 비겁한 관계를 이제껏 지속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뒤에도 군사 정권의 잔재가 여전히 활개를 치는 것을 보면서 더욱 착잡해지는 것은, 그 연유가 어제오늘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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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9 15:09 2012/02/19 15:09

"폭력은 사회적 모순이 논리적으로 표출된 것일 뿐이다." 이 말을 누가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폭력에 대한 이 짧은 명제는 마치 "국가는 경제적 지배계급의 정치적 지배도구이다."라고 말한 레닌의 이 말만큼이나 명료하게 들린다. 학교나 직장, 그리고 여타의 공동체에서 자행되는 물리적 폭력이나 비물리적인 폭력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가장 일반화된 억압이자 일종의 공포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 맺음은 필연적으로 억압적이다.

미국처럼 나라가 부유해도 부가 골고루 돌아가지 않으면 가난함만 못하다
/경향신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2005년 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들이닥쳤을 때, 미국 뉴올리언스는 아비규환이었다. 사망자가 최소한 1836명, 실종자는 700명이었다. 인명사고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그때 뉴올리언스에서는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이룩했던 문명이 사라졌다. 카트리나 이후 수주 동안 약탈, 살인, 방화, 강간, 기아가 이어졌다. 투입된 군대는 사람을 구출하거나 구호품을 전달하는 대신, 약탈자를 찾는 데 집중했다. 그것이 21세기의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의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미증유의 자연재해 때문이었을까.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2008년 중국의 대지진, 2011년 일본의 대지진도 상상하기 어려운 재난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엔 문명, 질서, 신뢰가 남아 있었다. 미국은 일본, 중국과 무엇이 달랐을까.

미국은 부유한 나라다. 지난해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4만8000달러로 세계 7위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살기 좋은 사회는 아니라는 점이 카트리나 때 입증됐다. 아울러 세계은행이 발표한 가장 부유한 50여개 국가 중에서 미국은 정신질환 환자, 기대수명, 신생아 1000명당 사망한 유아수, 비만율, 수학과 읽기 평균 점수 등에서 최악의 수치를 보인다.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을 연구해온 영국의 역학자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은 유엔개발계획의 인간개발지수가 보여주는 소득 불평등에 주목했다. 상위 20%와 하위 20%를 비교해 소득 불평등의 정도를 나타낸 것이다. 나라 전체가 아무리 부유해도, 그 부가 골고루 돌아가지 않으면 가난함만 못하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미국의 소득 격차는 책에서 제시된 23개의 부국 중 싱가포르에 이어 가장 크다. 일본, 핀란드, 노르웨이 등은 상위 20%가 하위 20%보다 4배에 못 미치는 부를 갖고 있는 반면, 미국은 9배다. 즉 불평등이 문제고, 평등이 답이다.

여전히 가난한 제3세계 국가들이 있긴 하지만, 지금 인류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지는 않다. 경제성장이 인류의 평안과 행복을 보장하는 시기는 지났다. 저마다 다른 경제 발전 단계를 거치고 있는 나라들의 기대수명을 비교해보자. 가난한 국가에서는 경제 발전 초기 단계에서 기대수명이 빠르게 증가하지만, 중진국 수준에 이르면 증가 속도는 감소한다.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의 수도 마찬가지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5000달러 수준에 이르면 수명과 행복의 그래프는 평평해진다. 2만5000달러를 번다고 짧게 사는 것도, 10만달러를 번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부유한 국가에서 건강문제와 사회문제는 국가 평균 소득과 관계가 미약하다(그림1). 그러나 소득 불평등은 관계가 있다. 미국이나 포르투갈처럼 불평등한 사회에서 건강과 사회문제는 나빠진다. 일본과 북유럽 나라처럼 평등하면 문제가 좋아진다(그림2). 미국의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는 “가난은 재화의 양이 적다는 뜻이 아니다.… 가난은 무엇보다 사람 사이의 관계다. 가난은 사회적 지위며(…) 계급 간의 불쾌한 구별이 되었다”고 말했다. 가난과 불평등 중에 더 나쁜 것은 불평등이다.

불평등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민감할까.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 와중에 자부심이라는 방어기제를 강화시킨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자부심이란 사실 불안정한 자기도취의 다른 이름이다. 과거의 가족, 이웃 중심의 안정적인 공동체가 붕괴하면서 사람들은 익명의 사회 속에 내던져졌다.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빠른 시간에 남의 시선을 끌고 자의식을 강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낯선 관계일수록 사회적 지위는 그 사람의 유일한 특징이 되기도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적 지위를 둘러싼 경쟁도 심해진다.

불평등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들이 있다.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불평등한 포루투갈에서는 10%만이 ‘그렇다’고 답했지만, 평등한 스웨덴에서는 66%였다. 평등한 노르웨이의 카페에서는 테이블과 의자를 거리에 내놓고 그 위에 손님이 따뜻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담요를 올려놓는다. 고객이나 행인이 담요를 훔쳐갈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반면 불평등하고 신뢰 수준이 낮은 미국에서는 카트리나 이후의 뉴올리언스와 같은 혼란이 일어났다. 때로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생명을 구하기도 한다. 1995년 미국 시카고에서 폭염이 발생했을 때, 신뢰도가 낮고 범죄율이 높은 흑인 지역에서는 사망률이 높았다. 사람들이 문을 열어두는 것을 두려워했고, 집을 비우기가 겁나 시에서 설치한 냉방 지역에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흑인 지역만큼 가난하지만 신뢰도가 높은 히스패닉 거주지에선 사망률이 훨씬 낮았다.

그리스인의 평균 수입과 1년 건강 관리 비용은 미국인의 절반 정도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태어난 아기의 기대수명은 미국에서 태어난 아기보다 1~2년이 길다. 심지어 미국 할렘의 흑인 남성이 65세까지 살 확률은 방글라데시인보다 더 낮았다. 불평등은 낮은 기대수명, 높은 유아 사망률, 작은 키, 저체중 출산, 에이즈, 우울증과 관련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불평등하고 사회 신뢰 수준과 통합 정도가 낮은 사회에 사는 젊은 남녀는 평등한 사회와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에게 닥친 난관에 맞선다. 10대 소녀는 임신을 한다. 15~19세 여성 1000명당 출산한 자녀수는 미국이 50여명, 일본과 북유럽 국가들은 10명 미만이다. 사회에 안정적으로 진입할 수단이 없는 10대 여성은 엄마가 됨으로써 성인의 사회관계망에 가입하려 한다. 이는 진화론적 관점에서도 타당한 전략이다. 배우자나 다른 어떤 사람, 자원에 의지할 수 없으면 일찍 어른이 돼 자녀를 많이 갖는 게 유리하다. 그 아이들 중 최소 몇 명은 살아남기 때문이다. 반면 배우자나 가족이 도와줄 거라고 믿으면 소수의 자녀를 적당한 시기에 가진 뒤 그에게 관심을 쏟는다.

10대 소년은 폭력을 쓴다. 하버드 의대 정신과 의사인 제임스 길리건은 폭력 행위란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참을 수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수치심과 모욕감을 피하거나 제거해 이를 정반대 감정인 자신감으로 대치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지위를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을 모두 박탈당한 남성이 자신의 마지막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평등한 사회에 사는 남자는 무례한 대우를 받아도 좋은 교육, 좋은 직장, 가족, 미래의 가능성으로 이를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은 이런 보호 장치 없이 폭력에 호소한다.

불평등을 완화하면 가난한 사람들만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불평등은 사회 전반에 퍼지는 ‘공해 물질’이다. 미국인의 기대수명이 일본인보다 4.5년 짧은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빨리 죽기 때문이 아니다. 비교적 잘사는 미국 백인들의 사망률도 다른 선진국 사람들보다 높다. 평등한 스웨덴과 불평등한 영국의 직업별 사망률을 비교하면, 비숙련 육체 노동자부터 전문 직업인까지 모든 부문에서 스웨덴이 낮았다. 영국 시인 존 던은 “사람은 아무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라고 말했다. 불평등은 부자와 빈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저자들은 생물학, 인류학, 역사학의 근거를 들어 인간에겐 평등의 본능이 있다고 말한다. 근대 이후 불평등이 보편적이라는 인식이 퍼졌지만, 인간의 역사를 훑어보면 오히려 현재의 불평등한 사회가 예외라는 것이다. 인간 두뇌의 거울 신경세포는 다른 이의 특정 움직임을 관찰할 때 활동한다. 거울 신경세포의 존재가 밝혀짐으로써 인간이 서로에게 공감하는 능력, 영화 속에서 누군가 고통받는 장면을 볼 때 움찔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은 그 생물학적 근원부터 사회적 존재다.

평등한 사회를 위해 중요한 것은 정치적 의지다. 기업 최고위층에게 과도한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하고, 일터로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부자에게 높은 세금을 매겨야 한다. 마틴 루터 킹은 “도덕적 세계의 활은 매우 길지만 이는 결국 정의를 향해 굽는다”고 말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전면에 등장하자, 강한 정의감을 가진 사람들은 ‘밀실 평등주의자’가 됐다. 저자들은 “이제는 평등주의자들이 공공 영역으로 돌아올 때”라고 말한다.

원제인 ‘The Spirit Level’은 건설 현장에서 바닥의 수평도를 측량하는 도구인 수준측량기를 의미한다. 바닥이 기울어지면 건물이 무너지듯이, 불평등 정도가 심하면 사회가 망가진다. 2009년 영국에서 처음 나온 이 책은 당시 보수당 당수이자 현재 영국 총리인 데이비드 캐머런과 그와 정치적으로 반대편인 노동당 당수 에드 밀리밴드로부터 동시에 추천받았다. 지금 평등은 좌파의 표어가 아니라 시대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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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8 20:36 2012/02/18 2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