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돈이 최고다”라는 가치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노무현 정부는 이에 한 술 더 떠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논리를 정당화시켰다. 그리고 막 출범한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는 한마디로 ‘나에게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다’는 생각을 실제로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것을 말한다. 실용주의를 국제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하면, 국익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원칙를 확고하게 관철시키는 것을 말하지만, 사실 이와 같은 논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국익’이라는 주어를 특정한 ‘지역’이나 ‘집단’, ‘개인’과 같은 명사로 대체할 수도 있다는 논리로 비약될 수 있다. 공적 영역에서 정당화된 가치는 언제나 개인에게 행위 규범으로서 내면화의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실용주의로 이득을 보는 사람이 있는 반드시 손해는 보는 사람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기주의가 덕목으로 확립된 곳에서 인간은 서로에게 단지 수단으로서만 취급된다. 자본주의 체제의 제일의 가치는 이윤창출이다. 이 사회에서 인간은 자본의 이윤을 창출하는 수단으로만 고려된다. 사실 자본가들은 인간보다 기계가 훨씬 더 이윤 창출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자본을 위해, 정의가 아니라 이윤을 위해 삶의 방식을 계획하고 조직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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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구분되고, 구분이 차별로 자리 잡게 되면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자신의 안전판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비정규직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갖게 되고 그 차이가 특권 의식을 낳는다. 자본가들이 틈만 나면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提高)를 강조하는 것은 노동자들을 아귀다툼의 상태로 몰아넣음으로써 인간을 짐승의 차원으로 타락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노동은 노동하는 사람의 신체와 분리되어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노동자는 노동하는 동안 일정한 공간과 시간에 자신의 신체를 묶어 둘 수밖에 없다.

그런데 폴라니의 말처럼 인간은 육체적, 심리적, 도덕적 실체로 규정된다. 이것들은 따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칼 폴라니는 노동력을 구매한 자본가가 ‘노동자’라는 인간을 마음대로 처리하게 되면 노동자들은 온갖 악덕과 인격 파탄, 범죄, 굶주림 등을 거치면서 격동하는 사회적 혼란의 희생물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노동을 노동자와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하여 고용하는 것은 노동자를 인격이 아니라 수단으로, 단지 기계의 부품처럼 교체 가능한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노동자들은 일터에서는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지워져지고 물권으로서의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인권은 출근할 때 가슴에서 떼고 퇴근할 때 다시 붙이는 명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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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4:37 2012/01/09 14:37

페이퍼의 제목을 세 번째 수정했다. "처음에는 생각 없이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였는데, 가만 생각하니 뭔가 전달하고자 한 의미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고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로 다시 고쳤다. 그런데 어제 밤늦게 오래된 메모장을 뒤적이다 이 제대로 된 문장을 발견했다. 사실 이 말은 몇 년 전 소녀 같은 여자애가 내게 들려준 말이었는데, 나는 그 아이의 통찰이 너무 심오하여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나 자신이 영 생각 없이 살다보니 그 통찰도 잊고 그 표현도 잊어 버렸던 것이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나는 살아오면서 인생은 무계획이란 말을 자랑처럼 지껄이고 계획 없이 사는 게 당연한 것처럼 살아왔다. 자신은 늘 오늘을 즐기길 바라는 쾌락주의자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생각과 삶의 표현이 영 다른 웃기는 놈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긴 계획을 세우고 사는 것과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은 좀 다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대로 살아가지 않는다. 삶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 말은 너무 중요하고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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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어떻게 살고 싶었을까? 지금 내 삶이 내가 그렇게 원했던 것일까? 불현듯 관금붕의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가 생각난다. 딱 한 번 보았을 뿐인데, 나는 혼자 이 영화를 보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네이버를 뒤져 찾아보니 그 내용이 아련히 생각날 뿐인데도, 지금도 젠 바오를 떠올리면 눈물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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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4:34 2012/01/0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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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니 낮게 빗소리가 들렸다. 커튼을 살짝 걷어보니 창밖이 밤처럼 어두웠다. 일어날 것인가, 다시 잘 것인가. 나는 다시 자리에 누워 머리까지 이불을 둘러쓰고 몸을 움츠렸다. 빗소리, 크릉크릉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 일어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수만 가지나 되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이불을 갠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잠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마당을 가로질러 탁 트인 넓은 논과 마을을 둘로 가르는 대나무 숲, 그 너머 멀고 깊은 지리산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제 여기 오래된 아파트에서 음습한 동굴 속에 숨어든 쪽제비(족제비)처럼 살고 있다. 그런 느낌이 든다.

소를 먹이러 산으로 가면 산토끼와 노루를 볼 수 있었다. 재수가 좋은 날은(?) 사촌 형님들이 쳐 놓은 덫에 노루 새끼나 산토끼가 걸려들곤 했다. 나는 그 때도 그 짐승의 눈을 잘 보지 못했다. 집에서 기르는 염소를 닮은 눈이었고 구부정한 다리는 막 태어난 송아지를 닮았던 듯하다.

<어느 날 그 길에서> 다행히 부산에서도 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마음이 약해져서 쉽게 가슴이 멍해지곤 한다. 곤란하다. 냉정해지지 않으면 쉽게 무너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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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4:31 2012/01/09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