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사태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이런저런 말들을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핵심은 "종북주의"다. 그런데, 종북주의는 김창현씨 말대로 실체가 없다. 어떤 면에서 나 역시 이 문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다분히 감정적으로 접근한 면이 있다. "종북주의"는 남한 사회변혁 운동 세력 중에서 NL(민족해방)이라는 정파의 정치 이념의 현실적 경향을 말한다. 그러니 그 경향은 다양한 형태의 행위로 현상하기 마련이고 이를 뭉뚱거려 종북주의라는 표현으로 일반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들이 북한을 추종하든 김정일을 찬양하든 그건 그들의 사상이니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의 이념과 행위가 남한 전체 인민의 삶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끌고왔다는 점이다. 불과 20여년 전 그들은 한국 사회가 "반봉건식민지" 체제(혹은 식민지반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미제국주의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 반대편에는 또 하나의 편향으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있었다- 뭐 대단한 이론적 논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남한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요즘은 그런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난적이 없어서 아직도 한국 사회를 '반봉건식민지'라거나 '식민지반자본주의'라거나, 또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던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 발전의 심화로 인해 절대 다수의 인민들이 고통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 자본주의 발전의 물질적 현상이 아무리 황홀하고 휘황찬란하다 해도 이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부르주아들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물질적 풍요의 외양을 힐끔거리며 그 그림자를 밟을 수 있을 뿐이다. 대상은 욕망으로만 남는다. 그리고 욕망의 실현은 댓가를 요구한다. 그 댓가는 노동의 고통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고행이며 노동은 자기 상실이며 온갖 악덕의 근원이 되었다.

인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인민의 삶으로 향하는 길은 어렵다. 인민과 함께 하는 것은 어렵다.


제3의 길, 자주파, 그리고 가짜들

(경향신문. 08.1.16, 이대근_정치·국제에디터)

당내 대통령 경선에서 패배가 예상되자 탈당해 상대당으로 옮겨 다시 경선할 기회를 얻었지만 거기서 또 패배한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런 판단은 정치가 정상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주요 정당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 손학규가 그렇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로 선출된 그는 이 당을 살릴 구원자로 부활했다. 남들이 안 가진 무슨 기사회생의 묘약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는 남들이 안 가진 것을 가져서가 아니라, 남들이 가진 것을 안 가져서 대표가 되었다. 그는 한나라당에서 넘어왔다는 이유로 대표가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병자를 살리겠다며 내놓은 처방이 이미 이 동네에서는 말만 들어도 식상한 ‘진보의 수사학’이었다. 5년전 등장했다 사라진 가짜 진보가 이 엄동설한에 죽지도 않고 또 나타난 것이다.

그래도 초기 노무현이 진보 수사를 구사할 때는 사람을 속일 수 있을 만큼 그럴 듯했다. 그에 비하면 손학규의 진보 수사는 그냥 해보는 말이라는 게 바로 드러난다. 사실 그의 성향이 다 알려진 마당이라 그도 차마 진보라고는 말을 못하고 새로운 진보, 제3의 길을 꺼냈을 것이다.

-진보에 수식어는 필요없다-

그러나 진보면 진보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진보에 수식어가 필요없다. 새로운 진보니 제3의 길이니 하는 것 자체가 수상한 것이다. 유시민이 탈당하면서 온건, 유연한 진보를 주장하며 또 속임수를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것이 신선하게 느껴진다면 이걸 알아야 한다. 한국사회는 민주화 이후에도 시장주의, 성장지상주의가 지배했을 뿐 그 대안의 길을 밟아본 적이 없고 그 대안세력이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낸 적도 없다. 진보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해보고 나서 싫증나 제3의 길을 가겠다면 시비할 일이 못된다. 그러나 있어본 적도 없는 것을 극복하겠다면 그건 망상이다. 이런 혼돈은 열린우리당 몸통에 한나라당 머리를 얹힌 인공조합의 불가피한 결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역사 구조적 산물이다. 권위주의 시대는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상당기간 진보를 대표할 정치조직의 부재로 인해 진보는 보수정당에 진보의 대표권을 위임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보수와 진보의 미분화는 정당의 정체성 상실 등 정치를 일상적으로 왜곡해왔다.

이제 진보는 진보정치 조직이 대표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정치의 정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온전한 의미의 진보정당이 없다. 민주노동당? 자주파가 의미있는 세력으로 잔존하는 한 민노당을 진보당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주파는 한국의 주요 모순을 민족(분단) 문제로 본다. 분단이 해소되면 다른 문제의 해결의 길도 열릴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군사독재하의 상황인식이다. 민주화 이후 민족문제는 북한문제로 바뀌었다. 한반도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분단이 아니라 북한의 기아, 피폐한 삶, 열악한 인권, 핵무기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도 북한 경제 재건, 북한 인민의 삶 개선, 핵폐기, 평화로 변했다. 다행히 포용정책은 사회적 합의를 얻었고, 남북간 대화와 협력은 국가적 과제로 자리잡았다. 그런 과제는 김대중·노무현정부가 잘해왔고, 통일부를 없앤다지만, 이명박정부도 크게 잘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면 자주파가 따로 할 일이 없다. 억압적인 김정일 정권을 변명하고, 핵보유 정당성을 설파하며, 부족한 자원을 군비에 쏟는 선군정치를 옹호하는 게 자주파의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은 보수나 반동들이 하는 것이다. 진보는 불평등과 맞서고 억압받고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소수자를 위해 일해야 한다. 그러나 민노당 다수파인 자주파가 비밀결사처럼 활동하며 항상 당패권 장악에 골몰한 결과, 민노당 노선을 오도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당은 따분하며 낡고 진부한 집단으로 변질되었다. 이제 자주파의 시효는 소멸했다. 북한문제는 차기 정부와 야당에 맡기는 게 좋다. 모든 번뇌를 잊고 해산하기 바란다.

-서민의 고통을 끌어안아야-

진보당이라면 서민들이 지금 겪는 고통을 자기 가슴으로 느끼고, 그들의 고민을 자기 고민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과 공명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공상에 빠져 있는 가짜 진보당에 서민이 흥미를 느낄 것 같은가. 심상정 비대위가 민노당을 진보정당으로 바꾸는 작업을 떠맡았다. 진보적이지 않은 요소들을 청소하고 겉과 속을 다 바꾸는 비타협적인 투쟁을 기대한다. 우리에게도 이제는 반듯한 진보정당 하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1/30 16:01 2011/11/30 16:01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도 철모르는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웠다. 조금 나이가 더 들어서는 자랑스럽게 조국의 위대함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고,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별 고민없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부끄럽지만 이런 믿음을 깨뜨린 것은 이성적인 사고나 판단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이 말도 안되는 민족주의에 눈을 뜬 것은 학교에서 군림하고 있던 "김일성주의자들"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위 이 어처구니 없는 주사파들로 인해 민족주의에 대한 맹신이 깨졌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물론, 민족주의는 질병에 불과하다는 명석판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건 이성적 사유의 결과로소이다. 껄껄.

좀 지난 얘기지만, 많은 맑스주의자들이(사실 저들이 스스로 그렇게 자부했다. 그때는) 강단을 기웃거리다 사라져가고, 또한 많은 좌파들이 현장에서 스러져가고, 마찬가지로 많은 주사파들이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그가 되어 떠나갔다.


‘핏줄의 민족’ 버리고 ‘주체적 우리’ 고민할 때

김상봉 한겨레신문 2007. 12. 22

민족주의가 ‘집단적 자기’에 대한 집착이라면, 민족주의를 해체하는 것은 지금 한국에서 절박한 실천적 과제다. 아집이 어리석은 것은 집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집이란 자기동일성에 대한 집착인데, 살아 있는 어떤 것도 순수한 자기동일성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동일성이란 플라스틱처럼 죽은 사물의 특징인 것이다. 하물며 개인도 아닌 집단인 민족을 두고 고정된 동일성을 몽상하는 것은 계몽된 시대에 어울리는 자기인식이라 말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사회에서 민족의 구분기준은 너무도 야만적이다. 현행 중학교 도덕 교과서는 민족을 “씨족이나 종족, 부족 등의 단어와 마찬가지로 공통의 조상을 가진 한 핏줄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 정의한 뒤에 너무 자연스럽게도 민족을 “하나의 큰 가족”이라고 이르고 있다.(도덕 II, 156) 민족을 가족과 같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맞지 않은 것은 물론이지만, 민족이 핏줄로 규정되는 나라에서 민족 구성원들에게는 맹목적 충성이 강요되는 반면, 조금이라도 핏줄이 다른 사람들이 사회에서 배제되는 것은 세계화된 시대에 정말 심각한 질병이다.

한편에서는 차라리 감옥에 갈지언정 군대 가서 총을 들 수 없다는 젊은이들은 핏줄이 같다 해서 군대에 끌려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태어나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음식을 먹고 살면서 이 사회에 동화되어 살고 싶어도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군대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다. 새로 결혼하는 일곱, 여덟 쌍 중의 한 쌍이 국제결혼을 하는 나라에서 계속 이런 식으로 핏줄의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린다면, 머지않아 우리 사회는 이 사회의 주류에게 까닭 없이 배제되고 차별받은 소수자들의 좌절과 증오가 집단적으로 분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근절되지 않는 까닭은 민족주의 없이는 개인을 국가의 부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으로 훈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 교과서의 첫 페이지에 실린 국기에 대한 맹세는 우리에게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조국은 언제나 민족을 팔아 충성을 강요한다. 그렇게 홀로주체로서 군림하는 조국과 민족 아래에서 개인은 주체성을 빼앗기고 전체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런즉 민족주의는 개인의 주체성을 억압하고, 타자와의 참된 만남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타파해야 할 이데올로기이다. 더러는 계급이 민족과 만나야 강해진다거나,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그나마 민족주의가 자기를 지키는 방파제가 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질병을 다른 질병을 통해 고치겠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 사회의 도를 넘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이제는 노골적인 인종주의로까지 타락한 상태이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호히 국가주의에 저항하고 민족주의를 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민족주의를 비판할 뿐 그것의 존재 근거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질병을 결코 치유할 수 없다. 민족은 실체가 아니라 주체이다. 주체성은 자기인식에 존립한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스스로 욕구할 줄 모르면서 주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꿈과 동경 속에서 이상적 자기를 욕구하는데, 안정된 자기인식은 기억 속의 자기와 동경 속의 자기가 조화를 이룰 때 형성된다.

이 기억과 동경의 내용이 무엇이든지간에, 자기인식은 필연성과 자유라는 두 계기 사이에서 생성된다. 필연성은 고정성으로서 이를 통해 나의 존재는 안정성을 얻는다. 반면 자유는 유동성이지만, 이것이 없다면 나는 노예 상태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오직 자유로운 필연성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긴장 속에서만 자기를 주체로서 인식하고 실현하게 된다. 고정되어 주어진 나의 존재로부터 자유롭게 나를 형성할 때 비로소 나는 자기를 온전한 주체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주체성은 결코 고립된 홀로주체성일 수 없다. 나의 기억과 동경은 언제나 너의 기억 및 동경과 맞물려 있다. 그런즉 나는 오직 너와 더불어 우리가 될 때, 참된 주체가 된다. 이것이 서로주체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체성의 현실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연성과 자유가 같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가족은 필연적 공동체일 뿐 자유의 현실태는 아니다. 반면 정당이나 기업 같은 사회적 결사체는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공동체이지만 필연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는 계급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가족 속에서는 자유의 결여 때문에, 그리고 계급 속에서는 필연성의 결여 때문에 참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한다.

필연성과 고정성을 가지면서도 자유의 현실태인 공동체가 바로 나라다. 나라는 내가 그 속에서 나고 자랐다는 점에서 이미 주어진 나의 과거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내가 적극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의 현실태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다른 어떤 공동체보다 나라 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강렬하게 확인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민족이란 그런 나라를 이루는 집단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런 한에서 민족이란 인종처럼 생물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인 범주로서, 그 속에서 나는 참된 의미의 주체 곧 시민적 주체로서 나를 인식하고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을 계급적 연대나 다른 탈민족적인 만남 속에서 해체하자는 제안은 세계시민적 주체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제안이지만, 민족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이런 제안은 온전한 나라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방치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현실적으로 규정하는 국가기구와 법률을 결국은 악한들의 손에 내맡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민족과 국가가 폭력적인 홀로주체로 군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능동적으로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라를 서로주체성의 현실태로서 우리의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라를 같이 만들어야 할 서로주체인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수백년 동안 이 땅에 살아왔지만 분단되어 반세기 이상을 떨어져 살아온 사람들과 새로이 이 땅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과 이 땅에 살다가 다른 나라로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의 우리로 불러모을 수 있는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민족의 문제는 오직 이 물음에 올바르게 대답할 수 있을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민족의 역사를 개방적으로 해석하는 박노자의 상상력과 고체화된 민족과 국가를 비판하는 권혁범의 이성과 온전한 나라를 형성하려는 김동춘의 열정을 모두 필요로 한다. 그런즉 지금은 민족주의에 대한 서양 이론의 한 끄트머리씩을 붙잡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 과연 우리는 누구인지를 서로 묻고 같이 대답을 찾아나가는 것이 더 생산적인 일일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1/30 15:57 2011/11/30 15:57

이 글은 지난대선 정국에 김수행 교수가 경향신문에 쓴 칼럼인데, 지금 읽어도 여전히 답답하다. 김수행 교수가 우려했던 일들이 죄다 현실이 되었는데 작금의 상황이 그렇게 나아지지도 나아질 것 같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경향시론] 대선후보 경제철학을 비판한다 (경향신문 2007. 11. 17)

〈김수행 / 서울대 교수·경제학〉

대통령 선거가 33일밖에 남지 않은 지금 너무나 큰 일들이 터지고 또 곧 터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대통령 후보들은 선거 공약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덩달아 유권자들도 후보들의 선거 공약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누구를 지지한다”고 아무렇게나 이야기하는 것 같다.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고 신경질나서인지 유권자들이 후보들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는다.

-평등사회로 이끌 책임 막중-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대통령만큼 중요한 인물은 없다. 미국의 부시가 극우보수주의자(네오콘)들을 요직에 앉혀 미국 사회와 세계를 지금처럼 ‘엉망’으로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대통령도 한국 사회를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세계의 경찰로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적 간섭에 너무나 크게 ‘열려 있기’ 때문에 우리의 대통령은 미국 정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개선하는가’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추가적으로 안고 있다.

차기 대통령이 어떤 철학을 가져야 ‘정의롭고 평등하며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일에 공헌할 수 있는가를 따져 보려고 한다. 경제는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회가 ‘정의롭지’ 않고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친다면 경제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사회가 ‘평등하지’ 않고 빈곤화와 양극화가 지나치다면 갈등과 투쟁으로 경제가 ‘순조롭게’ 성장하거나 발전할 수 없다. 그리고 사회가 ‘평화롭지’ 않고 전쟁위험에 사로잡혀 있다면 투자와 소비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는 박정희와 영국의 대처를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국제적 표준(스탠더드)에 따르면 그들은 ‘깡패’이고 ‘조폭’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는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았고, 대처는 같은 당(보수당)의 국회의원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당수 자리와 총리 자리를 빼앗겼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민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삶을 넉넉하게 하는 것을 정책의 목표로 삼은 것이 아니라, 서민의 입과 눈과 귀를 막고 묵묵히 노예처럼 자본가들과 기업가들, 권력자들을 위해 희생하라고 총칼로 위협함으로써 재벌 중심의 비민주적이고 부패한 한국 사회를 확립한 것뿐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경제가 지속적이고 순조롭게 발전할 수가 없었고, 드디어 노동자·농민·빈민·학생·종교인·지식인의 항거에 의해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유럽에서는 독일 경제를 1930년대의 불황으로부터 회복시켰다는 점에 근거해 히틀러 정권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파시스트로 불려 ‘정신이상자’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몇몇 후보들은 아직도 재벌 중심으로 한국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간에 의한 독점은 국가에 의한 독점보다 훨씬 더 문제점이 많다는 것이 영국 대처의 민영화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정부는 주기적으로 선거를 통해 심판을 받기 때문에 국가독점체가 자기 마음대로 가격을 올리거나 서비스 질을 낮추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민간독점체가 가격을 올리고 서비스 질을 낮추더라도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항할 방법이 없다. 이리하여 전화·수도·가스·철도 등의 민영화 이후 영국 정부는 민간독점체의 소비자 수탈을 막기 위해 공공의 규제기구를 추가로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민간철도회사는 단기적인 수익성과 주식가격을 올리는 것에 열중함으로써 철도선로나 신호망의 보수와 대체에 투자하지 않아 큰 열차사고가 났고, 이리하여 민간철도회사는 파산하고 다시 철도는 국영화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재벌은 총수가 ‘황제경영’을 하고 있지만, 재벌 전체 기업의 주식 중 총수 일가의 지분은 삼성의 경우 1%도 되지 않는다. 재벌은 사실상 총수 일가의 것이 아니라 한국 국민 전체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하고 중요한 기업체들을 ‘능력’도 없는 총수가 황제경영을 하는 것은 한국 경제를 엄청난 위험에 빠뜨리고 있으며, 또한 삼성의 비자금 의혹 사건에서 보듯이 총수 자리를 자식에게 무리하게 승계하느라고 온갖 불법과 비리를 저지를 수가 있다. 재벌체제를 심각하게 검토하겠다는 후보가 차기 대통령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재벌 중심의 성장정책 문제-

지금 한국 사회에서 서민들이 가장 뼈아프게 느끼는 것은 빈곤·실업·양극화·자살 충동 등이다. 이 문제들을 “수출 증진을 통해 경제성장률을 높임으로써 해소하겠다”고 공약하는 후보들은 전혀 이 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수출을 증진하려면, 임금 수준을 인하하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바꾸며 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어 농산물 시장 등 모든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 서민의 생활을 희생해야만 수출이 증가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내수시장이 점점 더 좁아져서 더욱더 수출 증진을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수출의 증가와 서민의 불행이 악순환을 이루고 있는 것이 외환위기 이후의 한국 사회다.

서민의 불행을 조금이나마 들어주기 위해서는 정부가 부자와 대기업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모든 서민에게 ‘기본소득’을 줌으로써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 도대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그렇게도 정의감과 동정심이 없는지 기가 막힐 지경이다.

갓난아기를 포함해 한 사람의 평균소득이 2만달러(약 2000만원)라고 떠들어대는데, 가족이 네 명인 가정 중 연간 소득이 세금 빼고 8000만원 되는 집이 얼마나 될까?

소득불평등이 심각하다는 이야기인데 부자가 세금을 내어 서민의 고통을 어루만져 준다면 매우 아름다운 사회가 탄생할 것이다.

차기 대통령은 마음이 너그럽고 성질이 인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자들이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저의 임금수준, 세계 최고의 산업재해를 견디지 못해 노동운동을 한다고 모두를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넣은 박정희나, 광부노조의 ‘버릇’을 고친다고 362일 동안 파업하게 내버려 두어 광산업과 광부들의 가정을 파괴한 영국의 대처 같은 ‘깡패’는 이제 더 이상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눔·평화 실천하는 후보라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다. 빨리 평화적으로 교류하고 통일하는 것이 분단의 상처를 다스리는 방법이고 전쟁 위험을 없애는 수단이다. 세계의 최대 강국인 미국이 북한과 화해하려는 이 기회를 틈타서 우리는 한반도에서 평화체제를 구축하려고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한다.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어렵게 벌어들인 달러를 왜 터무니없이 비싼 살상무기의 구매에 사용해야 하는가, 한창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청년을 왜 군대에 보내야 하는가 등을 깊이 생각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동북아의 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차기 대통령은 북한과 더불어 세계를 향해 ‘영구적인 평화국가’를 선언하고, 전쟁 준비에 지출하는 모든 비용을 남한과 북한의 서민을 위해 사용하자고 합의하면 어떨까?

“나는 서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선거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를 행사하기 때문이며 서민이 유권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재벌과 부자를 더 잘 살게 하겠다는 후보들이 ‘여론조사’에서는 더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

서민들이여!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큰 상처와 고통과 설움을 받았는가를 상기하면서 이번 선거에서는 진짜 서민을 위한 대통령을 뽑아야 되지 않겠는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 봅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1/30 15:52 2011/11/30 1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