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의 수하한화] 더러운 채무, 더러운 조약(경향신문, 2011. 12. 2)

 

 

에콰도르는 전통적으로 전형적인 남미국가의 하나였다. 전형적이라고 하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식민지였다가 독립 후에는 군인들 혹은 귀족들에 의한 독재정치 및 그들과 결탁한 외국계 자본가가 지배하는 수탈구조 속에서 다수 민중이 노예처럼 굴종적인 삶을 강요당해온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 에콰도르가 민주적 선거에 의해서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은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자유선거제도가 도입되었다고 해서 에콰도르의 가난한 민중의 생활이 나아질 수는 없었다. 장기간에 걸친 억압과 수탈의 구조가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 엘리트들은 기득권층과 외국 자본가-투자가들의 이익을 에콰도르 민중의 이익보다 늘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그 결과, 실제로 풍부한 자연자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30% 이상이 절대빈곤 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매년 국가예산의 거의 절반을 외채를 상환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회계구조 때문에 국민경제가 회생될 수 있는 전망은 거의 없었다. 

 

그런 나라에 희망이 생겨난 것은 2006년 12월의 대통령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젊고 유능한 경제학자 라파엘 코레아는 에콰도르 경제를 짓누르는 외채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할 것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고, 결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대통령직에 취임한 뒤에 그는 자신의 공약을 실행하기 위해서 ‘공공채무심사위원회’라는 것을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1976년부터 2006년까지 30년간 에콰도르가 빚진 대외채무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성격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위원회의 객관적인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국내의 관련 전문가들 이외에 몇몇 외국인 학자들도 위원회에 참여했다. 2008년 11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채무심사위원회’는 에콰도르가 빚진 외채 중 많은 부분이 ‘정당성’을 결여한 채무임을 확인했다. ‘정당성’을 결여했다는 것은 그것들이 “이전 정부들의 부적절한 통치에 의해서 발생한 부채”일 뿐만 아니라, “과도한 이자율, 커미션, 뇌물이 연루되어” 있는 부채라는 뜻이었다. 이러한 보고서의 결론에 근거하여 코레아 대통령은 ‘도덕적 정당성이 없는’ 부채 상환을 거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당연하게도 국내외의 채권자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국제 채권시장에서 에콰도르 국채는 하루아침에 거의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코레아 대통령은 이듬해 4월, 액면가의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진 에콰도르 채권을 은밀히 헐값으로 사들였다. 그 결과, 에콰도르는 오랫동안 국민경제를 짓누르던 무거운 채무압력으로부터 거의 벗어났고, 그때까지 외채상환에 허비하던 예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정당성 없는 채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파리대학 교수를 역임한 러시아 경제학자 알렉산더 사크가 1927년에 정립한 개념이다. 사크는 <정부의 공공부채 승계문제>라는 저서를 통해서 혁명, 전쟁,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군사통치의 종식에 이은 민간정부의 성립 등등, 국가체제나 정부형태가 변할 때 그러한 국가변혁에 의해 그 이전의 국가 혹은 정부가 갖고 있던 대외채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실제문제에 관한 이론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더러운 채무(odious debt)’라는 용어가 탄생한 것이다. ‘더러운 채무’란 요컨대 독재정권이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과 측근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빌려 쓴 돈을 말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채권자는 그 돈의 용도를 알고 있거나 혹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선출된 권력일지라도 국민의 이익보다 사익을 추구하고, 기본적 인권을 유린하며, 국제법의 근본원칙을 어기는 범죄적 정권이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그러한 정권이 진 빚도 ‘더러운 채무’의 범주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이 방면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사실, ‘더러운 채무’라는 논리에 의거하여 부채 탕감을 요구하거나 부채 상환을 거부해온 실제 사례는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 체제와 싸워 흑인해방을 쟁취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를 포함한 제3세계 국가 지도자들이 옛 상전이었던 서구 ‘선진국’들에게 채무 말소를 요구했을 때, 그들이 지적한 것은 바로 식민주의 혹은 신식민주의적 지배관계에서 비롯된 부채의 ‘더러운’ 성격이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더러운 채무’는 그대로 ‘더러운 조약’의 논리로 연결될 수 있다. ‘더러운 채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면, 그 실질적인 내용이 특권층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외국과의 조약이나 협정은 ‘더러운 조약’으로 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국민적 차원에서 그 파기를 요구하는 것은 극히 정당한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이런 의미에서 가장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나는 한·미 FTA가 발효된다면 조만간 그 ‘더러운 조약’의 실체가 확연히 판명될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따져보더라도, 이 통상협정에 한·미 양국 다수 민중의 이익을 위한 진실한 배려가 털끝만큼이라도 들어가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1%를 위하여 99%를 희생시켜온 신자유주의 정책노선의 심화·확대판에 불과한 협정일 뿐이다. 게다가 인류사회는 지금 자원·에너지·환경 위기라는 전대미문의 복합적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 시점에서 자원낭비와 환경파괴를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미국식 생활양식을 더욱 강화하려는 것은 심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임이 분명하다. 

 

원래 무역은 호혜적 교환을 위한 것이었으나, 오늘날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이란 세계를 황폐화하고, 공공성을 파괴하며,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치명적인 메커니즘이다. 만약 한·미 FTA가 발효되어 지속된다면 그것은 다수 민중의 삶에 견디기 어려운 질곡이 될 것이다. 따라서 한·미 FTA는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더러운 조약’의 파기를 선언할 수 있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정부를 세우는 데 우리가 과연 성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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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2 16:30 2011/12/02 16:30

이 글은 "두고두고 잊지 않기 위하여"라는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어 보관할 생각이었으나, 두고두고 읽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이 시는 양성우 시인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이다. 나는 20대에 막걸리를 마시며 동료들과 이 노래를 외쳐 부르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을 생각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많은 것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삶도 시인의 삶도, 사람들의 세상살이도. 청산은 멀리 있고 이제 사람들은 흙먼지 잿더미 속에 머리 풀고 고개 꺾고 일어서지 않는다. 이제 이 노래는 더 이상 불러서는 안 된다. 희망을 꺾고 바램을 앗아가는 노래는 더는.

아래는 경향신문에 실린 양성우 시인의 인터뷰 기사다. 두고두고 잊지 말아야겠다. 최소한 5년 동안만이라도.


“김지하가 하면 민주화고 내가 하면 정치냐” (경향신문 08.02.13)

ㆍ이명박캠프서 활약 양성우 시인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겨울공화국’을 쓴 양성우 시인(65)이 이명박 캠프의 핵심인물이라는 소문이 문단에서 조심스레 돌았다. 양성우가 누구인가. 1975년 민청학련 관련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에서 시 ‘겨울공화국’을 발표해 광주 중앙여고 교사자리에서 파면되고, 시 ‘노예수첩’이 일본 ‘세카이지’에 실리면서 국제간첩단 사건으로 몰려 2년반 옥살이를 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는 운동가요 역시 그의 시에서 나왔다. 고은·이문구·조태일·박태순 등과 더불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산파역을 맡았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든 평민당에서 12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지금도 작가회의 자문위원이다.

“수많은 후배들이 찾아와 항의와 협박의 언사를 했습니다. 이명박 지지를 그만두라고. 왜 양성우가 거기 가있느냐고. 김지하, 황석영이 손학규 지지하는 것이나 백낙청이 여권후보 단일화 운동을 벌인 것은 정치가 아닌 지식인의 책무이고, 내가 하는 것은 정치냐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들과 맞설 입장은 아니지요. 대선이 끝난 뒤 서로 쌓인 감정을 많이 풀었습니다.”

설 연휴 직전에 만난 그는 “은인자중(隱忍自重)해야 하는데…”라면서도 그간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후배나 옛 동지들과의 불화가 마음에 걸리는 듯했지만 “내가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처럼 내 생각도 존중받아야 하며 각자의 길이 있다”고 했다.

“이당선인과 알고 지낸 지 오래됐고, 개인적 친분이 깊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하고 이 분이 그것을 줄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대권의) 뜻을 세우는 긴 과정에 동참했다고 해야 할까요. 인간적인 면, 탁월한 경영능력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쌓여 뒷전에서 도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는 1년반 정도 캠프에서 뛰었다. 한나라당 경선까지는 대외협력위원회 문화예술담당 부위원장, 경선 이후 당 차원으로 조직이 확대된 이후에는 직능정책본부 문화예술담당 부본부장을 지냈다. 전국의 문화예술인을 끌어모으고 지지를 부탁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만큼 전국을 뛰어다녔지만 “오히려 내가 그를 지지한다는 사실이 역효과로 돌아올까봐 전혀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 대해 편협하게 생각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개 정치나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자기 예술에 묵묵히 헌신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예스’라는 말을 끌어내는 게 엄청나게 힘들더군요. 저도 시인으로서 자존심이 있는데 자존심 다 버렸습니다. 그분들이 지지의 조건으로 내건 건 딱 한가지, 기초예술을 살려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다른 대가를 바라지 않았어요.”

그는 자신이 활동해온 한국작가회의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쪽의 지지는 전혀 얻지 못했다고 자인했다. 대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나 지방의 문화조직 쪽이었다. 그러나 단체를 앞세우기보다는 사람 위주로 접근했다. 그런 그로서는 대선의 과실을 따려는 듯 일부에서 ‘문화권력’ 운운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못박았다. 더구나 ‘좌파문화세력 청산’이란 구호에 대해서는 “실체가 없는, 권력투쟁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좌파이건, 우파이건 문화로 정치하려는 사람들이 물러나야 우리 문화가 발전합니다. 예술은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고, 영혼에 속한 문제입니다. 예술가들이 단체를 만드는 건 개인의 힘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술과 상관없이 예술로 정치를 하려는 소수의 사람들이 ‘그동안 누가 했으니 이제 누가 해야지’하는 식으로 말하는 건 안됩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아직까지 우리 선거판은 기회주의자들에게는 기회의 땅”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화예술 육성지원에 대한 당선인의 의지가 매우 확고하다고 전했다. “한국경제가 발전하려면 문화로 한단계 도약해야 하고, 거기에 맞는 정책과 예산투자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며 이명박 당선인의 공약인 ‘컬처노믹스’가 단순히 문화를 통해 돈을 벌자는 수준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보통교육기관에서의 기초문화예술교육 확대, 대중과 예술의 접점을 늘리는 것 등을 구체적인 문화정책의 사례로 들었다. “최근 문화계 원로들과의 간담회에서 당선인이 청와대 바깥에서 주말을 보내겠다고 한 것은 문화현장을 직접 다니면서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지의 피력”이라고 설명했다.

양시인은 “좌우가 아니라 정책과 현장을 결합시켜 우리 문화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골몰해야 하는 시점”이라며 “그러면 한국문화의 르네상스를 기대해봄직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이명박정부의 문화부 장관은 드골 시대의 앙드레 말로 같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거기 담긴 뜻은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말로는 앙코르와트 도굴사건으로 악명을 얻었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알맹이 없이 명망으로 수십년간 대접받아온 문화계의 ‘행세주의자’들이야말로 물러나야 할 때”라고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그는 선거운동으로 바쁜 와중에도 지난해 여름 ‘길에서 시를 줍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다. 그 시집을 건네면서 특히 ‘청와대 앞길에서’라는 시를 읽어보라고 권한다.

‘저녁 어스름이 깔린 청와대 앞길을 걷는다./드높은 담을 따라 나란히 선 큰 나무들이/을씨년스럽다./웬일인지 중심에 선 사람들이 세상을 흔드니,/기우는 나라에 이미 책을 읽고 글을 쓰는/사람들까지도 그 넋을 팔았느냐?/…/전혀 터무니없이 옳지 않은 것들 앞에서는/목숨을 걸고 맞서던 젊은 옛사람들이 그립다.’

그는 30년을 ‘반골’로 살았다. 조선대부속고 2학년 재학 중 4·19시위를 주도하면서 시작된 길고 긴 ‘반체제 시인’의 길은 1987년의 민주화이후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 듯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도 저항해야 할 대상이 남아있다. “민주화운동이나 진보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도둑질한” 지난 10년간의 정권도 거기 포함된다. 그의 남다른 선택이 많은 생각거리를 남겨준다.

〈 글 한윤정·사진 우철훈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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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30 16:17 2011/11/30 16:17

사우스 캐롤라이나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버락 오바마가 힐러리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다는 기사에 네이버 파시스트 한명이 "흑인은 절대 안됩니다"라는 댓글을 달았길래 보니, 내용이 이러하다. "미국내 흑인들은 반한 감정이 드높습니다. la폭동때도 한국인가게만 골라서 습격했죠. 만일 흑인이 당선된다면 대미관계는 소원해질겁니다." 네이버는 댓글 단 사람의 이전 댓글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았기 때문에 이 친구의 이전 글들을 보니 자기주장은 하나도 없고 조선일보와 한나라당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옮기는 수준이었다.

생각난 김에 경향신문에 올라와 있는 박홍규 선생님의 글을 옮긴다. 요즘은 신문 기사를 전재(全載)하는 행위가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일부만 옮긴다.


... 최근에는 한국제 차나 가발을 팔아 돈을 버는 한국인이 특히 문제여서 더욱 가슴이 쓰리다. 킹의 오랜 친구로 애틀란타 시장과 유엔 대사를 지낸 앤드루 영이 얼마 전, 흑인을 상대로 돈을 벌면서도 흑인을 위해 조금도 봉사하지 않는 한국인을 맹비난해 문제가 됐다. 물론 모든 한국인이 그렇지는 않다. 가령 흑인혼혈 풋볼 영웅 하인즈 워드가 태어난 이곳에서 그의 어머니는 지금도 수 십 년 째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군부대가 많은 이곳에서 그 어머니 세대가 시작한 한국인 이민은 벌써 10만명 정도에 이르러 동양계로서는 일본인은 물론 중국인까지도 능가하고 있는데 이는 훨씬 늦은 출발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규모다. 그러나 주한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이 이곳에 오자마자 대부분 이혼을 당하면서 시작되었고, 특히 워드를 비롯한 흑인혼혈들이 흑백 인종차별이 극심한 이곳에서 자라 훌륭한 사람들로 성장한 것은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지만 그 혼혈을 한국인이 차별한다는 이야기에 더욱 가슴이 아프다.(전체 내용은 여기)

사실 나에겐 흑인들을 상대로 돈을 버니 흑인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말은 익숙하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봉사의 개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라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곳에 슈퍼마켓이 하나 있었다. 그리 크지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언제나 그 슈퍼를 이용했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그 슈퍼의 아저씨가 인색하고 고약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불친절했고(애들한테 뿐만 아니라) 전혀 인간미가 없었다. 일례로 지폐를 들고 가서 동전으로 교환을 부탁하면 인상을 찌푸리며 교환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슈퍼의 아저씨는 동네 사람들 덕에 돈을 벌면서도 동네 사람들을 위해 전혀 봉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봉사하고 있는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봉사라.... 며칠 전 대학원 학생이 학과에서 태안에 봉사활동을 가려고 하는데 정규교수와 비정규 교수들도 참여 해주십사한다고 연락을 해왔다. 머뭇거리며 생각해보겠다고 했는데, 여전히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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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30 16:06 2011/11/30 1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