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의 과잉과 무성애, 또는 금색(禁色)
나의 화분 2011/03/23 19:352002년 12월에 제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조이씨네>라는 곳에 올렸군요.
무성애, 저는 여전히 지지합니다.
원문은 http://www.joycine.com/service/article/media/media.asp?id=4663 에 있습니다.
우리는 혹시 섹스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포르노를 광고하는 쓰레기 이메일은 연일 홍수를 이루고 인터넷에서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적나라한 섹스 장면이 담긴 사진도 손쉽게 구해볼 수 있다. 스포츠신문을 채우는 섹스 스캔들도 지겹지만 이젠 길바닥에 나뒹구는 명함 크기의 찌라시들에서까지 여성의 나체가 등장하니 말이다. 섹스가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영화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의 한국 영화가 주로 결혼 전 젊은이들의 호쾌한 섹스와 기혼자들의 불륜을 중심으로 한국인의 성애, 즉 섹스와 사랑을 그려왔다면 이제 그 섹스의 주체로 나선 이들의 나이의 폭은 더 이상 확장이 불가능한 곳까지 확장된 듯 하다. 즉 이제 막 이차성징이 시작된 청소년들의 몽정에서부터 환갑을 훌쩍 넘긴 노년층의 죽어도 여한이 없을 잠자리까지 섹스는 연령과 조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친근해진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카메라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하며 섹스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던 청소년, 장애인, 고령자들의 성적 욕망 역시 비장애인이나 젊은이들 못지 않게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시각을 심어주는데 기여한 바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섹스 과잉의 시대에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질문도 가능해지게 되었다. ‘섹스, 이젠 너무 지겹지 않은가?’
오랜 기간 욕망을 억압해온 한국 사회는 사실 끔찍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고삐가 풀리기 시작하더니 이젠 모든 것을 섹스라는 코드로 바라보게 된 것은 아닌가? 지워도 지워도 끊임없이 날아드는 포르노 안내 스팸메일 제목들을 읽다보면 도대체 ‘섹스가 뭐길레?’하는 의문이 증폭되고 동시에 섹스에 쏟아붇는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쓴다면 정말 뭔가 큰 일 하나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파시즘적 억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리는 어느새 섹스에 대해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진단이 어느 유명 정신과 전문의의 입에서 나올 법도 하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회에서 섹스가 과잉이라는 분석은 곧바로 경건한 엄숙주의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직도 일선 학교에서는 아예 섹스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순결서약서를 쓰라고 강제하고 있기도 하니 말이다. 남성중심적이고, 일방적인 섹스에 질렸으면서도 근사하고 로맨틱한 섹스를 언감생심 꿈만 꾸어보는 사람들에게 바야흐로 섹스가 봇물처럼 터지고 있으니 사타구니 단속을 강화하라고 채찍질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과거로의 회귀이자 가진자의 오만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특히 아직도 남성과 여성 사이에 심각한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성적 욕망의 표출은 대부분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특권층에게 독점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섹스 산업의 고객은 이성애자 남성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성애자 남성이 섹스라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섹스와는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순결’이나 ‘동정’이라는 단어 역시 이성애자 중심으로 규정되고 있어 한국 사회에서 편향, 즉 차별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민중 엣센스 국어사전 전면개정 제5판에 의하면 동정(童貞)은 ‘이성과 아직 성적인 접촉이 없이 지키고 있는 순결’을 뜻한다고 나와 있고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1999년판 국어사전 역시 동정을 ‘어떤 사람이 한 번도 이성(異性)과의 성교를 경험하지 않은 상태’로 정의하고 있다. 이 사전은 보통 남자의 경우에는 동정을, 여성의 경우에는 순결을 더 많이 사용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동성과 성적인 접촉을 아무리 많이 했어도 이성과 접촉이 없었다면 아직 동정을 지키고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호색한이나 색골 등에 쓰이며 섹스를 뜻하는 대표적 한자어 색(色) 역시 남성우월적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는 단어이다. 그 예로 여색(女色)과 남색(男色) 같은 언뜻보아 대립적 의미를 갖고 있을 단어들이 모두 남성을 기준으로 정의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즉 남자의 입장에서 섹스의 대상이 여성이면 여색이 되고 남성이면 남색이 되는 것이다.
약간 과장을 해서 말한다면, 이제 우리는 섹스가 넘쳐난다고 했을 때 그 주체와 객체 모두 이성애자 남성이 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섹스가 널리 퍼지면 동성애자와 여성 그리고 노인과 아이들 등이 떡고물을 얻긴 하겠지만 그 최대 수혜자는 분명히 이성애자 남성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색정광’들에게 어떻게 역전타를 먹일 수 있을까? 이성애자 남성 중심의 섹스로 가득찬 사회에서 우리는 이대로 질려가고 말 것인가? 한 쪽으로 치우친 사회의 균형감을 되찾아줄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사회 이곳저곳에서 감지되는 균열이야말로 대안적 삶이 자라날 텃밭이 될 것이다. 요즘 영화에서 동성애와 여성이 중심에 놓이는 경우가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은 이성애자 남성 중심의 섹스라는 강고한 벽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청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 종교에서는 일찍부터 섹스의 과잉을 타락으로 여기고 이에 대한 답으로 독신(celibacy)을 설파해왔다. 인간을 악의 손길로부터 구출해 그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난잡한 섹스를 금하고 욕망을 규제하며 엄격한 생활에 육체를 던져넣어야 한다는 것이 카톨릭 사제들로 대표되는 독신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언제든 진정한 짝이 나타나면 당장에라도 결혼의 나락으로 떨어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지만 지금 현재 파트너가 없기에 궁상맞고 가엾게 살고 있는 ‘싱글’은 영화에서도 단골로 등장한다. 이와는 달리 독신은 굳은 의지와 각고의 실천으로 마침내 숭고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독신은 섹스의 과잉이라는 문제에 대해 쉽사리 대안으로 제시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생긴다.
남성에 대한 반대급부로 여성을 섹스의 주체로 내세우는 경향도 있다. 결혼과 가사 그리고 육아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운 20대 후반 30대 초중반 전문직 여성이 중심이 되어 사랑이라는 복잡한 감정에 구애되지 않고 상대 남성을 골라가며 마음껏 즐긴다는 내러티브도 여전히 남성 중심의 섹스에 대한 강력한 대안으로 존재한다. 돈이든 섹스든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소위 성공한 여성이 되어 기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흔한 스토리여서 대안적 가능성이 될 징후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비로소 무성애자(無性愛者) 또는 비성애자(非性愛者)의 존재가 부각되는 문화적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무성애란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등의 단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즉 사랑과 섹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을 뜻한다. 성애라는 말 자체가 사랑과 섹스의 연관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영화에서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는 화두로 ‘사랑과 섹스는 동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가’를 꼽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갈래의 답이 나오는데, 굳이 스펙트럼을 나누어 본다면 다음과 같겠다. 먼저 사랑과 섹스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양자를 모두 추구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결혼이 있다. 그리고 이와 쌍둥이로 불륜이 있다. 사랑과 섹스를 별개의 존재로 보고 사랑을 억제한 채 섹스만을 추구하는 ‘원나잇스탠드’도 포스트모던적이고 쉬크한 것으로 중산층 대도시 인간부류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뿌리에서 태동했지만 사랑과 섹스를 나누어 섹스를 억압하면서 심각한 자기절제와 정신적 사랑으로 나아가는 경향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종교적인 방향으로 흐를 여지가 많다. 또한 보수적인 주장이 되어 순결을 강요하는 사회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무성애자가 된다는 것은 사랑과 섹스라는 화두에 대해 ‘관심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성애자는 동정을 간직한 채 님을 기다리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이미 많은 사랑과 섹스를 경험해 본 사람이 ‘이젠 화류계를 떠나겠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신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제부터 술을 끊겠다고 결심하는 것처럼 금색(禁色)을 하겠다는 것과 비슷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굳은 결심을 내려 그렇게 되는 것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관심이 멀어진 것에 더 가깝다. 사랑이든 섹스든 비성애자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무성애가 동성애, 양성애 혹은 이성애와 다른 것은 그것이 생득적이지 않다는데 있다. 무성애자는 선천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경험을 통해 결국 섹스는 관심을 갖고 추구해야 할 것이거나 아니면 절박하게 억눌러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득하면서 완성되어가는 존재다. 그러므로 이성애자 혹은 동성애자 모두 무성애자가 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한순간의 결심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성 애자의 조건에 대해 길게 서술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한국 사회가 많은 심정적 무성애자, 경향적 비성애자들을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성애자 남성 중심의 섹스의 홍수 속에서, 지나친 성적 억압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던 사람들이 사랑과 섹스라는, 어떤 신화에 의하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기간이 1년이어도 상관없고 혹은 작심삼일에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이 섹스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손가락질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무성애자들은 삶의 한 순간 무성애라는 선택을 내리고 이에 맞는 삶을 살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후천적으로 몸에 걸친 옷이긴 하지만 동성애 혹은 이성애 못지 않게 자연스럽고 꿰맨 곳 없이 몸에 잘 맞는다. 삶에서 의미있는 다른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제까지 사랑타령만 늘어놓으며 섹스에 목숨을 걸 것인가. 많은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사랑과 정열적인 섹스는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만 무성애자들은 그것이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