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 어느 가트에 앉아
떠남과 돌아옴 2010/02/19 20:55고생 끝에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힌두교도들이 강가에 정성스레 몸을 씻는 모습을 보며, 나도 그들처럼 저 강물에 몸을 씻고 나면 내가 지은 죄가 모두 씻겨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돈을 잃는 것?
두유와 우쥬가 낯선 곳에 내던져졌을 때 기분이 어떨지 알 것 같다.
극도의 불안.
하지만 이곳에 차츰 적응이 되어간다.
아침을 먹으러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겨우 벵갈리토라를 발견했다.
여행자들의 거리라는 곳.
마침 괜찮은 식당을 발견, 들어가보니 한국 사람들이 많았다.
저들은 내 등을 처먹지 않으리라는 안심이 들었다.
약간 경계를 풀어도 좋겠지.
그러다 은영을 만났다.
그림을 그리는.
예전 내게 선물을 준 적도 있는.
그림을 척 보면 그가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런 우연도 있나?
반가운 마음에 인도가 지옥같이 싫어졌던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도 하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것도 바라나시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라고 사람들이 말한다.
이른바 강가 가트에 앉아 멍때리기를 하며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다.
바라나시에 오기 전에는 난 여행은 항상 더듬이를 쫑긋 세우고 낯선 곳을 두더지처럼 최대한 많이 돌아다니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포카라에서도, 카트만두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여행.
난 항상 바빴고, 모든 것을 계획했고, 그대로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은 삶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무슨 재앙이 닥치고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던 것이다.
나는 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의 지성이 무시되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다.
반면 내가 무엇을, 남이 모르는 것을 알려줄 때 나는 즐겁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항상 지식과 정보에 목말라하고 있나보다.
나는 예술을 하기도 하는 딴따라인데, 왜 이리 지식과 정보를 갈구하는 것일까?
은영처럼, 그냥 느끼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일까?
네팔과 인도에 와서 나는 완전히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여기는 밤문화가 별로 없다.
대부분 저녁 10시면 문을 닫는다.
대신 사람들은 일찍 일어난다.
오전 7시면 벌써 일을 시작한다.
그래서 나 역시 여행이든 관광이든 아침에 시작하게 되고, 저녁 8시가 넘으면 피곤해진다.
무나는 그렇게 살아야 건강하다고, 이것이 자연의 리듬에 맞는 생활습관이라고 말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는 것.
뭐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서울에 돌아가면 아마 다시 밤생활로 돌아갈 것 같다.
자유롭다는 것은 외롭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외로움은 평생을 함께 할 친구인 것이다.
바람 부는대로, 발길 닿는대로 살아오지 않았나.
바라나시에서도 그렇게, 돌아가도 그렇게 살면 된다.
가트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좀처럼 느껴보지 못했던 평온함을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야 비로소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별빛도, 길거리에 누워 자는 개들도, 바닥에 질펀하게 널린 소똥도, 형형색색의 빨래도 모두 평온하다.
소용돌이가 치지 않아 좋다.
혼자서 떠나오길 잘했다.
여행으로 어떻게 날 치유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는데, 그냥 남은 시간 이렇게 가트에 앉아 있으면 될 것 같다.
나머지는 햇살과 음식과 강물이 알아서 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