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의 석양에 물들다
떠남과 돌아옴 2010/02/15 19:01둘째날 목표지점인 고레파니(해발 3천미터)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안나푸르나 산들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푼힐에 올랐다.
트렉킹 첫날이었던 어제 무리하게 트렉킹을 해서 울레리(해발 2천미터 지점)까지 올라온 덕분에 오늘은 좀 일찍 끝난 셈이다.
해가 지기 시작할 때의 안나푸르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내가 서있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닐기리, 안나푸르나 I, 안나푸르나 사우스, 히운출리 그리고 마차푸차레가 줄지어 서있고, 왼쪽으로 시선을 던지면 담푸스픽, 투룩체 그리고 다울라기리로 연봉이 이어진다.
석양으로 물드는 봉우리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노란색으로, 황금색으로 그리고 강렬한 붉은색으로.
내가 마지막으로 석양을 본 것이 언제였던가?
용산참사 현장에서 매일 정면에서 마주 보던 시티파크 빌딩들.
자본주의의 황금욕망을 상징하듯 누런 황금색으로 세 건물들이 물드는 것을 보며 나는 분노에 치를 떨었었다.
저주 같은 것을 하는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초고층 빌딩들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같은 태양이 만드는 같은 작업이 하나는 치를 떨게 하고, 다른 하나는 황홀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석양에 관해서라면 대추리 평화동산에서 바라보던 황새울 들녘의 석양을 또한 잊을 수 없다.
이건 워낙 유명해서 노을이라는 노래로까지 만들어졌었지.
나는 매일 집앞에서 황새울 들녘을 붉게 물들이며 저멀리 고압선이 지나가는 조그만 송전탑들 너머로 기울어가는 하루의 해를 때로는 착잡한 심정으로, 때로는 서글픈 마음으로 지켜보곤 했었다.
복잡한 마음이 들어 석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또 어느새 그 모습에 빠져들어서 멍하게 서있곤 했는데, 지킴이집에서 나던 뚝딱거리는 소리들과 대추리 마을회관에서 들리던 분주한 소리를 들으며 또 힘든 하루를 정리했었다.
석양이 제일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계화도 살금 갯벌에서였다.
그것이 처음 경험한 붉은 노을이어서 나는 이후로도 그곳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던 것이다.
마음을 빼앗겨버렸고,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나도 자연을 가슴이 떨리도록 흠모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그런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 갯벌이 참 고마웠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석양들, 이제는 나는 저 설산이 물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감기 증상이 있다.
카트만두에서부터 포카라까지는 목이 아팠었다.
매연 때문인지 아니면 감기 때문인지 몰랐었다.
안나푸르나 지역으로 들어와 트렉킹을 시작하니 목이 아픈 것은 나았는데, 연신 콧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알레르기 증상 같기도 한데, 기침도 나온다.
고도가 3천미터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디디는 약간의 고산증 증세가 있다고 했다.
날씨가 춥다.
네팔에 살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음식도, 자연도, 사람들도 좋다.
처음 네팔에 왔을 때는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스와얌부나트와 사랑코트에 갈 때마다 비가 많이 내렸고, 안개까지 짙어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트렉킹을 시작한 날부터 날씨는 거의 최고였다.
구름마저도 없는 파란 하늘이다.
아무런 고민없이 안나푸르나의 설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기도 하고, 참 다행스런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그 많은 고민을 뒤로 하고 여행을 가자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지친 나를 돌봐야겠다는 절실한 마음 때문이었을텐데, 사실 나는 여행을 통해 내가 휴식을 취할 수 있을지, 나를 돌볼 수 있을지 몰랐다.
어떻게 하면 나를 치유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냥 떠나면 된다고 했다.
디디가 말한 휴식이 이것이 아닐까, 잠깐 푼힐에 앉아 무나와 함께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사이 느끼게 된다.
명상을 하는 기분이다.
오랫동안 이어왔던 연애 관계를 안나푸르나 트렉킹을 시작하기 전에 정리하고자 했던 것도 아마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생각, 다른 고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고민과 아픔으로 충분했다고 믿었다.
그저 이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푹 빠지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한동안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를 잘 이해한다.
고레파니에 며칠 더 머물고 싶다.
하지만 내일은 트렉킹 3일째, 가장 긴 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식당에서 값은 비싸지만 저녁은 좀 푸짐하게 시켜서 먹었다.
애플파이도 디저트로 좋았다.
난로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산장에서 따뜻한 곳은 난로밖에 없다.
젖은 마음을 바삭하게 말리고 싶다.
* 네팔에서 신성시되는 산 마차푸차레(6,997M)의 모습. 신성한 산인만큼 옛날부터 입산은 전면 통제다. 네팔에서는 외화벌이를 위해 관광객들의 마차푸차레 입산을 허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관광객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면 이 산도 몸살을 앓게 되겠지. 멀리서 바라볼 때가 좋다.
마차푸차레는 포카라 시내에서 피라미드처럼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솟아있는 모습이 어느 곳에서건 잘 보인다. 포카라의 상징과도 같은 산으로, 물고기 꼬리(fish tail)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뾰족한 삼각형의 모습만 보면 왜 이 산을 물고기 꼬리라고 부르는지 알 수가 없다. 트렉킹을 시작하고 안나푸르나 안쪽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물고기 꼬리 지느러미처럼 생긴 산의 뒷옆모습을 보게 된다. 태양이 이 산을 가만두지 않는다. 불을 일으키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뒤흔든다. 가만히 서서 마음도 조용히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