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반대 누드시위에 대한 단상식물성의 저항 2005/01/08 15:15
친구 매닉이 쓴 글입니다.
피자매연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서 퍼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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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명동거리에서 두 미국 여인의 누드시위가 있었는데
몇분만에 경찰에 잡혀갔다고 한다. 엄청난 기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역시나 초점은 '둘이 벗었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쨌든 이번 시위로 내가 가진 옷들중에 동물의 가죽이나 털이 들어간 것들이 없는지
곰곰히 살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약 15년 전에는 오리털잠바, 일명 덕다운이 한반도를 쓸고 갔었다.
그때 난 중학생이었는데, 대학생인 언니만 오리털잠바를 사준다고
심하게 삐졌던 일이 기억난다. 오리털의 인기는 무스탕의 등극으로 사그라들었고,
무스탕 역시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경제 거품이 빠지면서,
무겁고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지금도 장롱에는 그떄 싯가로 20만원 했던 무스탕이 애물단지처럼 쳐박혀 있다.
이제는 무겁고 부담스러워서라기보다는 소가죽을 두른다는 심리적 부담이
나를 더 압박한다.
비록 오리털과 무스탕을 안 입어도,
따져보니 동물의 털과 가죽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나에게 아직도 많다.
우선 세무재질로 된 지갑이 그렇고, 저번에 산 구두도 합성피혁이 아닌
진짜 가죽이다. 매일 입다시피 하는 오버코트모자에 프릴장식으로 달린 털도
만져보니 느낌이 아무래도 진짜 동물털이다. 집 난방이 부실하다보니
영하 5도 밑으로 떨어지면 늘 입게되는 따뜻한 앙고라 스웨터도 토끼털 아닌가!
앗 또 생각해보니, 내가 그렇게 아끼는 5년이 훌쩍 넘은 손때 묻은 가방도 가죽가방이다.
"가죽은 오래가고 오래 쓸수록 정이 든다"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일부러 손때 묻히고 정을 들여왔던 건데,
생각해보니 동물을 죽여 그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치면, 일반 모피코트와 다를 게 없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동물의 고기를 먹고 가죽을 이용하는 것을 그만두어야할까?
이런 질문을 하면 흔히 빠지게 되는 오류가 있다.
어떻게 고기를 먹고 어떻게 가죽을 이용하는가에 대한 맥락과 상황에 대한 고찰이 빠지기 된다는 것.
대대로 그 자기가 사는 고장의 자연과 공존하며 그 균형을 지키며 살아온 농민이
집안에 경사가 생겨서 기르던 씨암탉 한 마리를 잡아 손님에게 대접하는 풍습을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다. 고원의 칼바람을 막기 위해 기르던 소나 말의 가죽으로
천막을 짓고 옷을 해 입는 유목민의 문화를 비판할 생각도 없다.
문제는 가죽과 고기가 상품으로 난무하는 이 소비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과의 균형을 파괴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체계적인 도살과 살육인 것일 터.
싯가 200-300백만원을 훌쩍 넘는 모피코트를 하나를 만들기 위해 밍크 백 마리를 죽이는 짓은
정말이지 "돈지랄"에 의한 대대적 살육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게다가 가죽을 깨끗하게 벗겨내기 위해서 동물들을 살해하는 방법이 매우 잔혹할 뿐만 아니라,
가죽이나 모피를 위해 키워지는 동물은 학대하면 학대할수록 그 모피가 부드럽고 고가라고 하니
이렇게 체계적인 살육과 고문시스템도 없을 것 같다.
할머니의 씨암탉은 그래도 살아있을 동안은 온 동네를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나름대로 자유를 누린 행복한 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잔치 때 돼지를 잡는 장면을 목격한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살육의 공포에 대한 최초의 원형으로 내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원형을 가슴속에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 소비주의 시대에 경이롭다고 해야 할 것은,
막상 소 잡고 닭 잡는 생생한 장면에 대해서는 경악하면서,
모두가 엄청난 양의 고기를 "오바"해서 먹고, 엄청난 양의 가죽을 "오바"해서 쓰고 있다.
살생과 비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사람을 넘어 동물에게까지 전이되는 이 상당히 의식화된 "인도주의"시대에
고기, 가죽, 모피에 대한 수요는 더욱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 때로는 "동물보호"라는 말이 동물이 학대받고 무차별 학살되고 있는 현실을
교묘히 가리는 "휴머니즘"의 대명사처럼 들리기도 한다.
언론들에서 떠들어대는 "동물보호"는 서구인들과 중산층의 3세계에 대한 이중 잣대를 떠올리게 해서
느끼하고 낯간지러울 때가 많다.
늘 하는 생각이고 주장이지만,
동물보호는 "서브시스턴스"라고 하는 자급과 재생의 삶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부르주아 휴머니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필요"가 아닌 "잉여"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바라보자는 얘기다.
자본주의 생산, 소비 시스템이야 말로
본디 비폭력인 자연의 체제를 폭력의 체제로 치완하며, 동시에
그 폭력을 휴머니즘으로 위장하는 "의사비폭력"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폭력인 자연, 그 스스로의 균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것도 근본적으로 "보호"될 수 없다.
그나저나 나부터 진작 했어야 할 "채식주의"를 몸으로 한번 채득해보는
한해가 되어야 할텐데...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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