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았던 해방의 감격

뒤바뀐 현실 2006/09/05 18:23
짧았지만 대추리 주민들은 해방의 감격을 맛보았었다.
9월 1일 아침이었다.
 
곤히 자고 있던 나는 이른 아침부터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하게 온마을에 울려퍼지는 커다란 마을방송 소리에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7시 30분이었다.
마을방송의 요지는 이랬다.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이 마을에서 쫓겨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지금 신문 1면에 기사가 실려 있어요. 마을 분들은 다들 마을회관 앞으로 나와주세요..."

 
세상에, 이런 기쁜 일이 다 있을까?
방송을 듣자마다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을회관 1층에 가보니 아직 사람들은 별로 없는데 사무실 바닥에 조선일보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몇몇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1면 기사를 읽고 있었다.
곧이어 마을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미군이 기지확장 계획을 전면 재검토한다고 합니다. 이제 마을에서 떠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감격에 우리는 서로를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오랫동안 국방부와 정부의 모진 압력과 회유와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질기게 질기게 싸우다보니 고진감래로구나.
승리의 기쁨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항상 빼앗기고, 당하고, 얻어맞고, 쫓겨나기만 했던 이들.
가슴 속에 단단한 응어리로 뭉쳐진 저 회한과 원망의 세월.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저, 이땅에서 이대로 살게 해달라는 소박한 소망을 산산히 짓밟은 정부와 미군.
그러나 우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쫓겨나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이내 흐르는 눈물을 연신 소매로 닦아내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주민들은 만세를 부르고, 눈물을 흘렸다.
 
"이제 김지태 이장님만 나오면 됩니다. 보류가 아니라 미군기지 확장 계획을 완전히 철회할 때까지 더욱 질기게 하나되어 싸웁시다!"


 
"질긴놈이 이긴다!"
"대추리, 도두리 주민 만세!"
 
누군가 소리를 질렀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외쳤다.
그날은 마침 주민들의 팽성 땅을 지키기 위한 촛불행사가 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2년간의 마음 고생이 이렇게라도 잠시나마 풀리는 순간이었다.

 
감격적인 장면을 놓칠 수는 없는 법.
해방의 기쁨이 온몸을 휘감겨오는 가운데서도 들소리 방송국 친구들은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 자들만이 나눌 수 있었던 순수한 승리의 열락.

 
지킴이들도 함께 기뻐하고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이제 마을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커다란 불판집에서 계속 살아도 되는 것인가?'
물론이다.
 
그날은 가게에서 아이스크림도 공짜로 나눠주고, 맥주도 나눠주었다.
떡도 나눠먹었다.
밥집에서는 밥도 공짜였다.
 
매일매일 이런 일들만 벌어지기를 바랬다.
 
결국 국방부가 나서서 이 조선일보의 기사는 완전히 오보였다고 서둘러 해명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민중의 질긴 투쟁으로 미제국의 군사패권 전략을 막아내겠다고 더욱 굳게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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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5 18:23 2006/09/05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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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괭이눈 2006/09/05 20:32 Modify/Delete Reply

    그때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같이 들썩이다가,
    오보라는 사실에 글이 어떻게 마무리될까 두근거리며 스크롤바를 내렸다오;;
    이상하게도 그 기쁨의 여운이 가시질 않으며 같이 주먹을 쥐게 되는군요~
    그래,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하자! 짧지만 엄청난 이 기쁨을 다시 맛보기 위하여,,라고 다짐 + 다짐
    돕~ 곧 보오-^

  2. 紅知 2006/09/05 21:06 Modify/Delete Reply

    저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고 속상해서 눈물이 나올라 그러네요. 그간 많이 무관심했던 것 정말 죄송스럽구요...

  3. ScanPlease 2006/09/05 23:33 Modify/Delete Reply

    저는 조선일보도 못 믿지만, 국방부도 못 믿기 때문에...
    아직까지 국방부의 서두른 해명을 완전히 믿지는 않아요.

  4. 디디 2006/09/05 23:56 Modify/Delete Reply

    에구. 정말 속상하네요. 그러나, 다시 굳게!

  5. achim 2006/09/06 15:11 Modify/Delete Reply

    이 사진을 보니 정말로 이길 것 같아. 저 기쁨을 기억하는 한 우리가 더 강할테니 말야...

  6. 상진 2006/09/06 21:56 Modify/Delete Reply

    지금 방금 하연씨가 찍은 '아무것도 아닌 일' 캡쳐하면서 듣고 있어요.. ㅠㅠ

  7. 2006/09/07 00:42 Modify/Delete Reply

    괭이눈/ 진보넷 블로그 만들어서 써보삼. 더 자주 만날 수 있다오.
    紅知/ 다들 뭔가 마음에 빚진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시 힘을 모을 때가 된 것 같네요.
    ScanPlease/ 조선일보든 국방부든 미군이든 믿어서는 안 되죠. 우리의 힘으로 미군기지 확장계획을 전면 백지화시킬 때 진정으로 기쁠 수 있겠지요.
    디디/ 항상 굳게 지내면서, 뭘.
    아침/ 해방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한 우리는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거야.
    상진/ 녹음해서 올린 버전도 들어보삼.

  8. outwhale 2006/09/07 12:34 Modify/Delete Reply

    아무것도 아닌 일, 짤렸어요 ㅠㅠ 음.. 의도한 것은 아니고 밤샘 편집을 하다보니 똑 빠뜨렸네 어허..... 그치만 조만간 아무것도 아닌 일 뮤비를 제작하고 싶다는 굳은 소망이 ^^ 아마도 담주 이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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