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레이 북친, 세상을 떠나다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6/09/03 00:53
사회생태주의 이론가이자 에코아나키스트였던 머레이 북친이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방금 접했다.

대추리에 살면서 인터넷을 잘 하지 않았더니 외부에서 들려오는 중요한 소식들을 바로바로 듣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앓아오던 심장병이 악화되어 2006년 7월 30일 일요일 새벽 미국 버몬트 주 벌링턴 자택에서 영면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8월 13일 벌링턴에서 열렸단다.
http://nefac.net/node/2118 에서 그의 사망소식을 처음 들었다.
 
50년 넘도록 아나키스트 운동가이자, 교수 그리고 저자로 활동하며 많은 저작을 남긴 머레이 북친은 특히 에콜로지(생태주의)와 변증법 철학 그리고 좌파 자유급진주의(libertarianism)를 바탕으로 반(反)권위주의 사상을 새롭게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환경의 세기, 반문명적 생태 사상에 반성을 촉구하는 머레이 북친의 메세지

 

머레이 북친은 모든 지배에 반대하여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아나키즘을 바탕으로, 환경 문제를 사회 문제로 인식한 최초의 에코 아나키스트이다. 그는 자신의 노선을 사회 생태주의social ecology라 규정짓고, “인간의 자연 지배는 인간의 인간 지배에서 비롯된다.”는 기본 사상을 바탕으로 생태 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환경 문제에 대한 그의 논의는 단순히 환경오염을 줄이자는 구호에 그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식 구조를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통찰에 이른다.


이 책에서 그는 인류사를 개관하면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잠재력, 즉 우리를 다른 동물종과 달리 인간이도록 만들어주는 이성적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가이아 이론, 신맬서스주의, 심층 생태론, 기술 공포론, 포스트모더니즘 등 생태 운동에 널리 퍼진 갖가지 반인간주의와 반이성주의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리하여 환경오염으로부터 인류의 삶을 지키는 일이 지고한 가치로 자리매김 된 오늘날 생태, 환경 사상 전반의 이데올로기적 허구, 사회적 허약함을 반성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날카로운 분석력과 탁월한 말솜씨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북친의 비판적 사상

 

각 장에서 논의되는 사상은 크게, 인간 경시, 문명 경시, 이성 경시로 분류된다. 북친은 탁월한 수사학적 기교와 현란한 말솜씨를 바탕으로, 각 분야의 해당 서적들(국내에 널리 소개된 책들도 두루 포함되어 있다.)을 인용해 가며 그러한 사상들이 갖고 있는 허점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또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상가답게, 직관적이고 추상적인 학자들의 이론에 때론 야유를 보내고 때론 사정없이 질타를 가한다.

 

1. 사회 생물학, 가이아 이론, 신맬서스주의 - 인간 경시

북친은 우리가 한눈을 파는 사이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잠식해 가면서 과학임을 자처하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며, ‘사회 생물학’과 ‘가이아 이론’을 제시한다. ‘사회 생물학’은 윌슨의 『사회 생물학』(1975), 『인간 본성에 대하여』(1978),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5) 등의 저작으로 대표된다. 이들은 인간의 행위는 유전적 요인에 좌우된다는 생물학적 환원주의를 주장하는데, 북친은 이들이 본질적으로 온갖 인격적 특성, 의지와 열정, 지성을 지닌 인간을 자기 목적을 따로 가지고 있는 DNA 분자들의 집합으로 환원하여 인간을 유전자의 통제에 따르는 기계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가이아 이론’(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을 의미한다.)은 인간을 ‘어머니 대지’에 기생하는 ‘지적인 벼룩’으로 격하시킨다.


북친은 그러한 생물학적 사고 방식을 따르다 보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인간을 하루살이와 생물학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간주하는 ‘신맬서스주의’에 빠져들게 된다고 우려하면서, 환경에 대한 관심을 진지한 사회 비판에서 이탈시켜 생물학적인 문제로 돌려놓는 데 일조한 에를리히의 『인구 폭탄』(1968)을 비판한다. 넘치는 자동차, 공장, 합성세제 등 모든 환경 문제는 인구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며 강제적 산아 제한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에, 인간은 사슴이나 토끼가 아니라고 맞서며, 인구 문제를 야기하는 사회적 환경, 특히 성장 위주의 시장 경제를 되돌아볼 것을 촉구한다. 또한 에를리히가 인도 빈민가에서 방뇨를 하고 구걸을 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치를 떠는 것에 대해서는 그를 “캘리포니아의 학구적인 숲에서 온 고매한 곤충학자”라고 칭하며 “그들 역시 예쁜 공예품을 만들고, 사랑을 나누고, 따뜻한 온정을 나누며 서로 사귈 줄도 안다. 가난이라는 절망적인 여건 속에서도 토속적인 문화의 생명력은 여전히 그들 속에 살아 있다.”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2. 생태 신비주의, 원시주의, 기술 공포론 - 문명 경시

생태 신비주의는 자연계에 초자연적인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원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을 전면적으로 반대한다. 네스가 1972년의 강연에서 펼친 ‘심층 생태론’은 생태 신비주의의 한 분파로, 단순히 오염과 자원 고갈에 맞서 싸우고 선진국 주민들의 건강과 풍요를 보존하는 일에 몰두하는 피상적 생태 운동과 달리 모든 생명체를 생물권의 그물망에 속한 매듭들로 본다. 그리하여 인간은 다른 생명체보다 더 큰 가치를 갖지 않는다고 보며 인간의 삶과 고통에 냉정한 무관심을 보인다. 그러한 운동에 대해 북친은 그들의 철학이 널리 퍼진 이유는 단순한 설교와 은유로 제시되는 직관과 선험적 개념들이 막연히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일 뿐이라며, 그들의 반인간적, 반문명적 성향을 비판한다.


한편 구미의 원시주의자들은 토착 민족들의 생활양식을 ‘단순한 삶’과 ‘자연적인 친화성’에 대한 모델로 규정한다. 그러나 북친은 원시주의자들이 토착 민족에게 원시의 허울을 씌워 자신들의 진짜 문제와 요구, 미래 개척의 희망 따위를 경시하게 만들고 있다며, 수백 년 동안 ‘야만인’이라고 무시당하고 착취당해 온 인디언들이 이제는 너무 문명화되었다고 괄시당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문명 혐오적 성향이 강한 생태 신비주의자와 원시주의자들에 맞서 북친은 18세기 이후 계몽된 휴머니즘의 성과인 과학 기술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인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언급하며 물질적으로 곤궁한 삶을 살아가고, 힘들게 토지를 경작하며, 공장에서 새벽부터 해 질 무렵까지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라는 외침은 공허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술 공포증은 배부른 삶에서 비롯된 것이며, 과학과 기술이 없다면 일상의 삶은 오직 생존을 위해 유지해 나가는 것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항생 물질 사용 반대에 대해서도, 항생 물질이 없었다면 자신은 아마 1940년대 초 연쇄 구균 감염으로 인해 죽었을 것이라며 냉소를 보낸다.

 

3. 포스트모더니즘, 반과학론 - 이성 경시

북친에 따르면, 휴머니즘적 계몽과 이성에 대한 공격 중에서 가장 학술적 성격이 강한 것이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 푸코 등으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분열과 아노미, 진보에 대한 믿음 상실 따위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에 대해 북친은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 과학, 진보 등 계몽의 이념이 겪은 실패에 대한 허무주의적 반동일 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다양한 사회주의의 실패에 대한 문화적 반동이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은 분명히 1960년대까지의 혁명 운동이 무능력했던 데 원인이 있다고 본다. 그는 진보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잃는 정도에 비례하여 진리의 객관성, 역사의 실재성, 세계를 변화시키는 이성의 힘에 대한 믿음은 무력해지고, 그 대신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상대주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 궁극적으로는 허무주의가 들어서게 된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도로는 대중적 저항에 방향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반생태적인 다국적 자본주의에 맞설 지적 수단을 마련해 주지도 못하며 진지한 사회 변화 기획을 위한 기반은 더더욱 제공해 줄 수가 없다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입지를 부정한다.


또한 북친은 반과학론자들에게도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와 반인간주의자의 공격에 큰 힘을 실어주었던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비판하며, 진리에 개한 과학적 이해와 그 발전은 범형적(이 책의 역자는 지난 40년간 번역하지 않은 채 사용해 온 쿤의 개념 ‘패러다임’을 ‘범형’이라고 번역하였다.)이라는 그의 주장을 반박한다. 북친은 과학자가 자신의 신조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가설이 과학계에서 받아들여지려면 증명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에, 과학은 오늘날 이설에 대한 관용에 있어서 어떤 사상보다도 민주적이며 증명을 위한 기준에 있어 어떤 사상보다도 자연주의적이라며 과학의 객관성을 지지하는 입장에 선다.

 

자유로운 사회를 가능케 할 인간의 이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

 

북친은 수십 년을 억압과 통제, 위계 제도, 계급 지배, 그리고 삶을 사적인 치부와 탐욕의 수단으로 타락시키는 현실에 맞서 싸우면서 사회 비판적인 세계관을 고수해 왔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은 이성을 바탕으로 언젠가는 합리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굳건한 믿음을 놓지 않는다. 북친은 인간종이 지적 능력을 발휘하여 이성적인 사회를 창조할 경우,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으며,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존경심을 표한다. 그가 말하는 “이성적”이라는 것은 세련되고 추상화된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생태계에 대한 책임감, 공동체, 연대라는 개념을 포함하는 살아 있는 합리성을 뜻한다. 물론 북친도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회를 이루는 것이 허공을 향해 돌팔매질하듯 쉬운 일이 아님을 인정한다. 야만과 공포로 얼룩졌던 역사의 실체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혹독한 윤리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노력할 수 없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될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머레이 북친 Murray Bookchin

 

1921년 뉴욕에서 러시아계 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십대에 주물 공장,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눈뜨게 되었고, 에스파냐 내전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아나키즘에 경도되었다. 그는 1950년대 초부터 환경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1952년 『음식물에 포함된 화학 첨가제의 문제점The Problem of Chemical in Food』을 발표했으며, 그 글은 미국보다 생태 문제에 관심이 높았던 독일에서 3년 뒤 번역되었다. 1962년 영어로 간행된 그의 첫 저서 『우리의 종합적 환경Our Synthethic Environment』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보다도 반년이 앞선 역사적인 문헌이었다. 이 책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으나 르네 뒤보스 같은 석학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는 “인간의 자연 지배는 인간의 인간 지배에서 비롯된다”는 인식하에 사회의 위계적 지배 구조를 파괴해야만 인간과 자연의 정상적인 관계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1970년대 이후에는 ‘사회 생태 연구소’의 명예 소장으로 있으면서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는 『도시의 한계The Limits of the City』(1974), 『자유의 생태주의The Ecology of Freedom』(1982), 『도시화의 발생과 시민 정신의 몰락The Rise of Urbanization and the Decline of Citizenship』(1987) 등이 있으며, 『사회 생태주의란 무엇인가Remaking Society』(1989), 『사회 생태론의 철학The Philosophy of Social Ecology』(1990)은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 http://www.minumsa.com/store.php?pg=&menu=100&bookid=3742452&page=1134 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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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3 00:53 2006/09/03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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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헌석 2006/09/04 10:36 Modify/Delete Reply

    안녕하세요.. 종종 블로그에 들어와 보는데, 오늘은 슬픈 소식이 있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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