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채 냄새와 후각을 발달시키는 법식물성의 저항 2006/08/05 21:35얼마전, 장마가 한창일 때 서울 집에 급하게 올라갔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빗물이 새고 있었다.
한 군데, 두 군데도 아니고 무려 일곱 군데에서 빗물이 새고 있었다.
고무다라를 3개를 구해서 받쳐놓았었다.
새는 빗물은 밤새 떨어져서 하루가 지나면 물을 비우고 다시 받쳐놓아야 했다.
빗물이 새는 서울 녹번동 집을 떠날 수가 없었는데, 마음을 두고 온 대추리 옆집 생각이 간절했다.
옆집은 천정에서 비가 새지는 않았지만 바닥에서 습기가 계속 올라와서 마루와 부엌과 온방안이 척척한 상태였다.
마른 걸레로 닦아도 닦아도 바닥은 다시 물기가 흥건했다.
습기를 빨아들일 가구가 하나도 없어서인지 다른 집들에 비해 옆집은 더욱 습했다.
장마철은 어느 곳에 있든 견디기가 힘들었다.
녹번동 집에 급하게 올라와서는 얼른 양동이와 고무다라를 구해서 비가 새는 부엌에 받쳐 놓고, 물바다가 된 바닥을 훔쳤다.
한 시간 가량 물바다가 난 곳을 정리하고보니 이제는 몸에서 비오듯 땀이 흐르고 있었다.
찬물로 대충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해야 할 일들은 많은데 몸이 젖은 스폰지처럼 무거웠다.
텔레비전을 켰다.
대추리 옆집에 살면 텔레비전도 없고, 인터넷도 없어서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게 제일 답답했다.
인터넷은 솔부엉이 도서관에서 사용할 수 있지만 왠지 컴퓨터를 오래 사용할 수 없다.
뉴스 같은 것만 훑어봐도 한 시간이 금방 흘러가는데, 그러고 나면 끝이다.
하여간 녹번동 집에서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켰더니 '세상에 이런일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오는데, 거기 늑대인간이 나오는 것이었다.
늑대인간은 늑대들과 같이 살아가는 어떤 남성인데, 늑대들과 같이 먹고 자고 목욕도 하면서 그 사회에 거의 동화되어 살아가는 듯 했다.
늑대인간이 6주만인가 사람 가족들이 사는 집에 돌아와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야채 반, 고기 반의 식사를 하는데, 늑대인간은 거의 고기만 먹고 있었다.
이를 궁금하게 여긴 제작진이 왜 고기만 먹냐고 물었다.
늑대인간 왈,
"야채를 많이 먹으면 몸에서 야채 냄새가 나고, 야채 냄새가 나면 늑대사회에서는 약한 동물로 취급받습니다. 그래서 늑대사회에서 내 서열이 내려가지요. 그래서 고기와 치즈, 단백질 등을 주로 먹고, 야채는 거의 먹지 않아요."
놀라웠다.
그의 말이 맞다면 난 3년 가까이 야채와 곡식, 과일 등 식물성 음식만을 먹어왔으니 지금쯤 야채 냄새가 펄펄 나야 한다.
(과연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왜 마늘을 많이 먹는 한국인들에게서 마늘 냄새가 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버터를 많이 먹는 서양인들에게서 빠다 냄새가 난다고도 하고.
한 백인 친구에게 진짜 한국인들에게서 마늘 냄새가 나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그렇다'고 했다.
그럼 나한테 야채 냄새가 나냐고 물었다.
그는 모르겠단다.
왜냐면 자기도 채식주의자여서 잘 구분하지 못하겠단다.
늑대인간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별로 놀라지 않으면서, 자기가 먹고 쓰고 가까이 생활하는 것의 냄새가 자기의 몸에서 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뭐, 그렇겠지)
그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화학제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아나키스트 생활공동체에서 장기간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곳에서는 샴푸도, 비누도, 세제도, 치약도, 모기약도, 체취제거제도, 린스도, 향수도, 섬유유연제도, 자외선 차단제도, 화장품도, 선크림도 그 어떤 화학제품도 사용하지 않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살아간다.
몸에 화학제품을 전혀 뿌리지 않고 그대로 각자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퐁퐁 풍기며 사는 것이다.
그게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더러운 일도 아니란다.
그저 이따금씩 물에 씻기도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살다보면 일단 후각이 발달한다고 한다.
화학제품의 자극이 없어지기 때문에 둔해지거나 억압되었던 몸의 감각들이 살아나거나 다시 깨어나게 되는데, 특히 자연스럽게 나는 냄새들만 맡고 인공적으로 제조해낸 냄새들을 맡지 않게 되니 특히 후각이 '동물적으로' 발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인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후각이 발달하게 되면 보지 않아도 뒤에 누가 왔는지 알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게다가 나중에는 사람의 감정까지도 냄새로 알아낼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즉 어떤 사람이 왔는데,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라면 그의 몸에서 스트레스의 냄새가 풍긴다는 것이다.
어떤이가 슬프다면 슬픔의 냄새가 나고, 우울하다면 우울의 냄새가 자연스럽게 나게 된단다.
그리고 사람들은 냄새로 그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평소에 나지 않던 어떤 냄새가 나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짐작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도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의사소통이라는 것이 단지 언어를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다른 동물들이 인간처럼 복잡하고 정교한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의사소통의 수준이 낮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들은 소리나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기도 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예를 들면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거나 또는 서로 냄새를 맡는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느끼고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만들어낸 화학제품들은 실은 우리의 감각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한번 화학제품에 길들여지면, 이것은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거기서 빠져나오기는 참으로 힘들다.
샴푸를 쓰며 매일 머리를 감는 사람이 샴푸 없이 맹물로 머리를 감기 힘들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해보면, 화학제품을 쓰지 않고 살아보면 또 그렇게도 살아진다.
나는 대추리에서 보내는 이 여름 치약과 비누말고는 다른 화학제품은 전혀(또는 거의) 쓰지 않고 살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도 차츰 줄여서 화학제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지내보려고 한다.
하지만 내 주변에 화학제품을 덕지덕지 바르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으니 나 혼자 쓰지 않는다고 해서 내 감각이 원천 회복될지는 의문이다.
최소한 내 몸에서 화학제품의 냄새는 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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