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똥살리기 땅살리기'를 읽고 있다.
보통은 책을 잘 읽지 않고 지내다가도 하는 일들이 바빠질 기미가 보이기라도 하면 괜히 없는 시간을 내 빈둥거리며 책을 읽게 된다.
막연히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잘 정리된 책으로 읽으면 새삼 느낌이 달라진다.
이 책을 허겁지겁 마치 누가 빼앗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읽고 있다.
'手不釋卷'을 연상하면 될 듯.
어제는 만나다 환송회가 있어서 수원에 내려갔다.
오며 가며 이 책을 읽으려고 일부러 지하철을 탔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 좋긴 하지만 이동할 때 책을 읽는 즐거움이 줄어든다는 조그만 단점이 있다.
내가 버스를 잘 타지 않는 이유는 버스에서는 책을 읽을 수가 없기 때문.
2. 떠나는 사람들과 돌아오는 사람들.
만남과 헤어짐은 계속된다.
나도 가슴 설레는 사랑을 할 수가 있을까?
3.
토리가 수원 시내는 대부분 걸어다니겠다고 한다.
참으로 기특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힘든 결심을 한 토리를 옆에서 많이 지원해줘야 한다.
내가 어디든 걸어다니기 시작한 것은 2001년 무렵이었다.
그전에도 물론 잘 걷긴 했지만 보통 사람들이 걷는 거리보다 훨씬 먼 거리를 걷게 된 것이 그때쯤이다.
밤에 홍대 근처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다가 막차를 놓치고 말았었다.
헤어지며 다른 친구들은 택시를 잡았다.
난 '걸어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다들 반응이 '너 미쳤니? 그 먼 거리를 어떻게 걸어가려고?'
걸어다니려면 이런 반응은 가볍게 듣고 흘려버려야 한다.
어제 밤에도 환송회를 마치고 수원 북문에서 화서역까지 걸어오는데, 처음 걷는 길이어서 그런지 길을 약간 헤맸다.
거리에서 마주 친 사람에게 화서역 어떻게 가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정확히 어디를 가시는데요?"
"화서역에 가요."
"거기는 너무 먼데... 버스타고 가셔야 해요."
"가는 길만 가르쳐주세요."
"저쪽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가서 쭈우우우우욱 걸어가셔야 해요."
실제로 걷다보면 별로 먼 거리는 아니다.
걸어보지 않아 멀다고 느낄 뿐이다.
문제는 거리가 아니다.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거리가 멀거나 힘든 것은 일단 시작한 뒤에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어가는 것도 그렇다.
출발하기 전 '내가 저 험한 산들을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불안감만 극복하면, 실제로 길 위에서 자전거를 타고 갈 때는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
애써 마음을 잡아놓았는데, 주변 친구들이 지지를 해주지 않으면 풀이 꺾이고 만다.
그래서 옆 사람들의 지원이 필요한 것이다.
토리 힘내!
4. 사탕 언니가 토리와 별이아빠와 날 묶어서 '꽃미남 3인방'이라고 불렀다.
누가 날보고 꽃미남이라고 부른 적은 이번이 두번째다.
1990년대 말에 캐나다에 사는 친구가 날 그렇게 부른 적이 한 번 있었으니까.
수원 지역엔 남자 활동가들이 부족한 편인가?
내가 꽃미남 대열에 끼다니 말이다.
영광이다.
5. 생태화장실과 푸세식 변소의 차이는 뭘까?
질소 덩어리인 똥과 오줌에 탄소가 가득한 톱밥이나 왕겨를 넣고 미생물에 의한 분해작용을 거쳐 퇴비가 되면 그것을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생태화장실이다.
푸세식 변소는 그냥 돈을 주고 똥을 퍼가게 하는 것이고.
수세식 화장실은 먹을 수 있는 깨끗한 물 18리터에 매번 똥과 오줌을 섞어 버리는 낭비가 심한 장소다.
먹는 물에 일부러 똥을 섞어 버리다니, 이것이 인간이 이룩한 산업자본주의 문명이란다.
똥은 훌륭한 재활용 자원인데도 말이다.
이젠 수세식 화장실에서 똥을 누기가 미안해진다.
알면서 아는 것을 아는대로 실천을 할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먹을 수 있도록 정화한 물에 다시 똥을 풀어 버리는 미친 짓을 당장 멈추고 싶지만 당분간은 참아야 한다.
그래서 요즘은 똥짐을 져나를 각오를 다지고 있다.
언젠가 나도 똥짐을 지고 걸어가 퇴비장에 뿌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퇴비를 텃밭에 뿌려 작물을 키워먹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