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와 최소주의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5/08/05 23:40노엄 촘스키라는 유명한 학자/활동가가 있다.
그는 아나키즘에 관해 유명한 글들도 많이 쓴 활동가이기도 하다.
지금도 촘스키는 Znet을 비롯한 인터넷 토론장에서 아나키즘을 비롯한 흥미로운 주제들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과 열정적인 토론을 벌인다.
촘스키는 특히 한국에서는 미국의 제국주의와 군사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훌륭한 저작들을 활발히 쓰는 실천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인으로 꼽힌다.
그런 촘스키는 언어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언어학의 대부'로 통하기도 한다.
언어학계에서 촘스키는 거의 신적인 위치에 올라 있는데, 그것은 그가 현대 언어학의 뼈대를 세웠고, 지금도 일선에서 활약하면서 최신의 언어학 이론을 선도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언어학자들은 촘스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마치 기독교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듯 새기고 또 새긴다.
촘스키는 2000년대 이후 언어학에서 이른바 '최소주의'라는 이론을 세우고 그것을 발전시켰는다.
최소주의는 기존에 촘스키 자신이 세웠던 현대 언어학의 몇 가지 기본적 전제들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수정, 또는 폐기해서 세운 이론 체계다.
그를 따르는 언어학자들은 최소주의가 올바른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다른 획기적인 언어학자가 나타나 확 폐기시켜버릴 수도 있는 모순투성이 이론인지 꼼꼼히 짚어보지 않은 채 촘스키의 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아나키스트로 비판적 지성인으로 그리고 신적인 추앙을 받는 언어학자로, 촘스키는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곤 한다.
그런데 내가 본 어느 누구도 촘스키의 이런 상반된 모습들을 두루 살펴보지 않으려 한다.
언어학을 전공하고 특히 촘스키의 최소주의 이론에 대해 박사학위 논문을 쓸 정도로 빠삭하게 알고 있는 많은 학자들은 그의 아나키적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거나 아니면 아예 알지도 못할 정도로 관심이 없다.
촘스키의 지극히 실증적인 미국의 대외 정책 비판을 줄줄 외는 사람은 촘스키의 언어학에 대한 정열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이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내가 알기로 촘스키는 아나키적 활동과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활동 그리고 언어학 연구자로서의 활동들 사이에 어떤 심연에 흐르는 공통점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대답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그 매개점을 그는 인간의 창조성에서 찾는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보다 깊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공부를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이 내 골똘히 생각을 좀 했을 뿐이다.
차근차근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기 보다 나는 내멋대로 사색을 통해 어떤 것에 접근하는 편이다.
촘스키가 언어학에서 최소주의를 말하기 이전에 나는 아나키즘은 그 근본을 따지자면 '최소주의'라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나는 최소주의자에 가깝다.
이 때의 최소주의는 촘스키가 언어학에서 말하는 그런 것과는 아예 관련이 없는데, 나에게 최소주의란 '최소한의 타협' 정도를 뜻한다고 보면 과히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나의 고민은 출발한다.
그런 가운데 최소주의란 나에게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일종의 생활지침과도 같다.
즉 지금 우리의 시대적 상황에서 나는 임금노예로 살지 않을 수 없고, 생존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어떤 선까지 나는 타협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물음에 나는 이미 '최소한의 타협'이라는 해답을 스스로 내려놓은 상태다.
그 최소한이라는 것이 어디까지인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최소주의의 원칙을 지키면서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전거를 타고 다니게 되고, 고기를 먹지 않게 되고, 폭력을 거부하게 되고, 소비를 최소화하게 되고, 거의 돈을 벌지 않고 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 최소주의적 삶은 참 자연스럽다.
하긴 누가 나에게 억지로 이렇게 살라고 시킨다고 해서 이렇게 살 수는 없을 테니까.
부안에 내려와 자려다 일어나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