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운동을 하면서 내가 바라는 평화에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들이 있음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먼저 탈민족 평화여야 한다.
민족이라는 가치를 중심에 두고 벌이는 평화운동이 있다.
이는 타민족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무조건 배척한다.
평택 팽성 주민들이 300일째 촛불시위를 서울 광화문에서 크게 벌일 때였다.
당시 동북아시아 평화 국제회의를 위해 한국에 와있던 파란눈의 평화활동가들이 이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진관스님은 그중 한 백인 여성활동가에게 폭언을 하면서 '너는 양키니까 이곳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 여성활동가는 미국인도 아니고, 설령 미국인이라고 해도 평택 투쟁의 중요성과 미군기지의 폐해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진관스님의 이 말에 크게 당황했다.
그는 스님에게 자신은 양키가 아니며 평택 주민들의 투쟁을 지지한다고 말했지만 민족(또는 인종)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해버리는 스님에게 이런 설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것은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예에서 민족 중심적 평화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다.
한민족은 모두 피해자이고, 백인은 모두 가해자라는 편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언급하는 평화는 일말의 가치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구나 한민족이 타민족에 대해 저지른 만행과 학살에 대해서 민족 중심의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눈을 감는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병사 뺨칠 정도로 또는 이들 보다 더욱 폭력적이었던 한국 병사들의 잔혹함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베트남 인들이 '당신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평화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쩔 것인가?
마찬가지이다.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강자 중심적이고, 차별적이며, 억압적이기 때문에 민족과 평화는 서로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약소 민족이 강대 민족에 대항해 민족적 평화를 외칠 수는 있다.
미군기지 반대운동에서도 이런 외침들이 자주 들린다.
하지만 민족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지 않는 한 그것은 평화를 짓밟고 억누르게 되고 만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다음으로 내가 만들어나가는 평화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풀뿌리, 비국가 평화라는 것이다.
평화운동의 주체가 풀뿌리 주민이 아니라 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 또는 정부가 나서서 벌이는 평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마치 총을 쥔 자가 평화를 외치는 것과 같다.
국가란 조직적인 무력을 법이라는 힘을 빌려 담지하고 있는 집단이다.
국가의 핵심은 군대와 경찰과 감옥이다.
국가의 평화란 체제의 안정적 유지에 다름아니다.
군대가 평화를 지킨다는 것 역시 국가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밑거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땅의 군대는 젊은이들을 모두 긁어모아 손에 총을 쥐여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희들은 조국을 지키는 최전선에 서있다. 너희들이 이땅을 지키지 않으면 평화는 곧 붕괴되고 만다'는 것이다.
끌려온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이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을 끊임 없이 주입시키지 않는다면 징병제는 곧 붕괴할 것이다.
월급이라고 할 수도 없는 터무니 없이 적은 금액을 받으며 대다수의 병사들이 버티는 몇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애국심이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내가 고생을 한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들이 이런 자긍심을 알아주지 않을 때 군인들은 자신들의 고생이 헛된 것이 아니었나 느끼며 분노하게 된다.
군가산점이 위헌이라고 판결났을 때, 군대를 가지 않는, 그래서 그놈의 고생을 알 리가 없는 여성들이 명확한 의견 표명을 할 때--특히 이화여대로 대표되는 잘난 엘리트 여성일 경우에--, 개인들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다고 할 때 등등 군인들은 그 잘난 단결력을 과시하며 집단 분노에 빠져든다.
국가의 평화란 실은 전쟁준비이다.
한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국가가 있어야 하고, 타국가가 잠재적인 위협이 되어야 한다.
잠재적인 위협으로서 타국가가 없어진다면 그 국가의 국경은 의미가 없어진다.
전쟁이라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국가는 군대를 유지하며 막대한 돈을 무기를 개발하고 사들이는데 지출한다.
이것은 국가의 역할인데, 국가의 평화란 국가가 제대로 역할을 다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전쟁에 대한 대비란 전쟁준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들이 중앙의 간섭을 받지 않고 풀뿌리 자치를 통해 삶의 터전을 지켜나가는 것이 풀뿌리 평화다.
삶의 터전인 땅을 지킨다는 것은 주변의 땅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군기지를 몰아내는 것을 말한다.
평택으로 집중해 들어오는 주한미군은 이제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를 포괄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효율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려고 한다.
평택의 풀뿌리 평화운동이 국가와 민족의 틀을 뛰어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는 미군을 막아내고, 있는 미군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풀뿌리 주민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바라는 평화는 비폭력 평화다.
비폭력이란 단순히 총과 쇠파이프를 들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철저히 준비하고 단련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비폭력이다.
우리는 조직적 폭력을 담지한 자들, 즉 경찰과 군대에 맞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방식으로는 결국 '조직폭력'을 이길 수 없다.
이들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서있지 않으면 안 된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란 비폭력을 견지하는 것이다.
방패를 들고 날뛰는 전경들에게 뺨을 내밀며 날 내리치라고 살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총과 진압봉을 들고 설쳐대는 것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으로 보이는가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 자각하게 하는 것이 비폭력 평화다.
이번 7.10 평택 평화대행진에서는 비폭력 평화에 대한 철저한 준비 없이 평화대행진을 하다가 경찰이 시작한 폭력에 의해 금새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즉자적 분노가 평화대행진의 이름을 더럽히고 말았다.
평소 비폭력 평화에 대해 실천하지 않으면 이렇게 쉽게 폭력에 이용되고 만다.
우리들이 평소에 비폭력 평화를 실천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몇 가지만 꼽자면 비폭력 대화법을 사용하기, 채식하기, 화석연료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을 버리고 자전거나 도보에 의존하기, 이밖에 군사주의로 물든 일상의 실천들을 바꾸기, 비폭력 트레이닝 등이 있다.
쉽사리 폭력에 물들지 않고, 견결하게 비폭력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치밀하고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비폭력 평화가 얼마나 적극적인 것인지 나는 요즘들어 새삼 느끼게 된다.
나의 몸을 비폭력 평화로 채우기 위해서는 개인적 차원에서 비폭력 대화, 채식, 자전거 타기, 군사주의 거부하기 등을 실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자체가 매우 폭력적인 것이기에 이를 바꾸지 않고서는 개인들이 온전히 비폭력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폭력 평화의 가치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단지 나 자신만을 단련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폭력을 조장하는 이 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평화활동가라고 부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