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2일 조약골의 현장일기
나의 화분 2013/12/12 20:08힘든 하루다. 눈이 펑펑 내리는데, 우리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밀양 유한숙 님 영정 사진을 들고 경찰들과 대치해야 했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보냈던 2009년이 생각났다. 나중에 서울시청 본관 1층을 점거하며 정영신, 이충연, 김일란 등과 둘러앉아서는 지금이 2013년인지, 2009년인지 헷갈린다고 이야길 나눴다.
눈이 쏟아지는데 나도 아이들처럼 눈썰매를 신나게 끌고 싶다. 집이 언덕이라 오늘 같은 날은 아이젠이 있어야겠다....
오전 11시 서울시청광장에서 밀양 기자회견으로 시작한 하루였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기자들도 많이 왔고, 이 정도면 분향소를 차리고 운영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핫핑크돌핀스 활동가답게 나는 고래 모자를 쓰고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사실 오전 11시 30분에 광화문에서 거제씨월드 규탄 기자회견에도 참가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고래 모자를 쓴 채로 단 3분만에 뛰어서 서울시청광장에서 광화문광장에 도착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래 모자를 쓴 채 뛰어가는 저 사람은 뭔가' 하고 쳐다보는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광화문광장에 동물단체 활동가들과 모여서 기자회견 시작하려고 현수막을 펼치는데, 경찰들이 다가온다. 잠시 후 VIP가 이곳을 통과하니 현수막을 잠시 접어놓고 있다가 VIP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 기자회견을 하면 안되겠냐고 협조 요청을 해온다. 그래 박근혜가 여길 지나간단 말이지...
얼마 전에, 대통령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현수막들을 경찰이 나서서 무리하게 떼어낸 것이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누가봐도 공권력 남용인데, 그 경찰의 변명이 웃겼다. 현수막 뒤에 숨어서 테러를 가할 위험이 있으니 테러리스트가 현수막 뒤에 숨지 못하도록 범죄예방 차원에서 미리 현수막을 떼어냈다는 것이 그 경찰의 주장이었다.
어이가 없었는데, 경찰이 우리에게도 현수막을 들지 말고 있다가 VIP가 지나간 다음 들라고 한다.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다. 내 반론으로 아예 그 경찰 입을 봉해버리고, 그냥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박근혜가 지나간다면 이 현수막을 그도 봐야 한다.
핫핑크돌핀스 할 일이 너무 많다. 국회에서 동물원법 통과를 위한 캠페인도 해야 한다. 올해 정기국회는 물건너 갔으니 내년 2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활동을 해야 한다. 게다가 거제씨월드 대응도 해야 하고, 환경부 낙동강유역환경청 항의방문도 해야 하고, 거제시청도 가서 따질 것들이 많다. 서울대공원은 또 어떤가. 몰수한 남방큰돌고래 태산이와 복순이를 내년에는 다시 제주도 바다로 돌려보내는 준비작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서울대공원은 요즘 호랑이 사육사 문제로 정신이 없다. 내년엔 지방선거가 있어서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텐데... 남아 있는 돌고래들이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까?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밀양 분향소가 마련된 시청으로 돌아왔다.
이미 경찰들이 난입하고 있다. 남대문경찰서는 또다시 직권남용을 저지른다. 그 와중에 서울시청 청원경찰들이 달려와 분향소를 철거해버린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도 황당해서 믿을 수가 없다. 눈은 펄펄 날리고, 분향소는 개판처럼 망가져 국화꽃이 길바닥에 흩뿌려져 있다.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짓인가?
서울시청 본관 건물로 향한다. 뭐라도 항의해야겠기에. 그 청원경찰들이 다시 다가와 영정을 빼앗고, 분향물품을 부수고, 피켓도 완전 산산조각을 내 쓰레기통에 쳐박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활동가들을 강제로 끌어내지 않나, 갖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나.
기자들이 몰려든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경찰이 쓰레기통에 쳐박아 놓았던 피켓을 조심스럽게 꺼내서 더러운 것들을 닦아내고 다시 가져 나왔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보여준다. 이것이 경찰의 행패입니다!
책임자를 찾았다. 그는 서울청원경찰은 분향소를 손댄적이 없다고 딱 잡아뗀다. 하승수 변호사가 물어도 마찬가지다. 헐. 그 자리에서 내가 찍은 동영상을 페북에 올려 공유하고, 긴급 대책회의를 한다.
경찰들은 급기야 서울시청 본관 정문을 폐쇄해버리고, 시민들 통행을 가로막는다. 졸지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더니 더많은 경찰들이 몰려와 영정물품을 탈취해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이거야말로 절도다. 도둑 잡아라! 서울시청 본관 건물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청경이 뺑소니치고, 우리가 뒤쫓는 청사 건물은 아수라장이 됐다.
남대문서 경찰들이 한쪽에 수백명 진을 치고 있게 최영성 경비과장에게 얼른 가서 시민들의 물품을 탈취한 도둑을 잡으라고 닥달했다. 본체만체.
그러더니 청경들은 우리보고 청사를 불법점거중이라고 몰아붙인다. 뭣이라? 불법점거? 우리는 폭력을 행사한 서울시청원경찰의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민원을 제기하러 온 것이다. 불법점거라... 후후, 그래 나 불법점거 많이 해봤지. 인생이 불법점거였어. 길바닥을 불법점거하며 살아가는, 그러나 어떤 저항의 현장이든 반드시 가서 빼앗긴 자들 힘을 모아야 하는 가난한 아나키스트. 후후. 경찰의 멸시와 공무원들의 눈흘김에도 당당해져야 한다.
긴 하루. 그저 눈썰매나 타고 놀았으면 하는 하루. 그러나 도처에서 사람들이, 동물들이, 생명이 죽어나가고 있다. 노예가 돼가고 있다. 죽지 않으려면, 살아내려면 투쟁해야 하는 살벌한 폭력의 시대.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한지 15년이 되는데, 아직도 그대로라니. 참,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