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의 노래를 부르자!”
나의 화분 2012/01/06 15:36
경향신문 2012년 1월 5일자 칼럼입니다.
[녹색세상]평화의 노래
황대권 | ‘야생초 편지’ 저자
입력 : 2012-01-04 21:14:13ㅣ수정 : 2012-01-04 21:14:14
며칠 전 국회에서 제주 해군기지 사업에 대한 내년도 예산의 90%가 삭감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많은 시민활동가들이 그 소식을 듣고 환호성을 질렀지만 결코 경계의 눈초리를 늦춘 것은 아니다. 이 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평화활동가들이 모여들었는데 참여자의 면면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활동의 양상도 다양했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인 것이 현지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다 만난 세 젊은이가 밴드를 만들어 신명을 돋구기 시작한 것이다. 이름하여 ‘신짜꽃밴드’. 신나고 짜릿한 꽃밴드란다. 어찌 보면 철없는 아이들 같은 이들의 공연을 보고 있노라면 흥겹게 몸을 흔들며 따라 하다가도 가슴깊이 파고드는 진실성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야말로 투쟁의 현장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평화의 노래’이다. 이 젊은이들은 아마도 어떠한 투쟁이고 간에 재미가 없으면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재미 때문에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 속에서 재미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젊은피인 것이다.
지난달에 보름에 걸쳐 일본강연여행을 다녀왔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인들의 인식변화도 확인할 겸 한국 생명평화운동가의 경험을 들려주기 위해서다. 확실히 일본은 변하고 있었다. 탈원전, 생태계 보전, 전쟁이 아니라 평화, 이것이 변화의 주된 흐름이었다. 가는 곳마다 생태문제와 평화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또 사람들은 ‘생명평화’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여행의 마지막 날 나를 초청한 단체가 운영하는 ‘슬로카페’에서 작은 만남이 있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키가 훤칠한 한 일본여인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슬로카페 홈페이지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찾아 왔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은 스즈키 시게코이며 노래하는 가수란다. 재즈풍의 노래를 즐겨 부르는데 요즘은 세계의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며 ‘평화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귀국한 지 며칠 되지 않았고 얼마 안 있으면 다시 가야 한단다. 두 손을 합장하듯 모으고 말하는 품새가 어찌나 다소곳하고 진지한지 얼굴에서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침 카페 한 쪽에 마련된 작은 갤러리에서 작고한 한 여류화가의 전시회가 있어서 모두 그 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화가가 마침 잘 아는 분이라며 몹시 흥분하는 것이었다. 그렇담 여기서 돌아가신 분의 혼을 달래는 노래나 하나 불러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환상이었다. 청중이라곤 다섯밖에 없었지만 모두들 넋이 나간 듯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나 역시 감동한 나머지 그녀를 영광 산속에서 매년 열리는 자연음악회에 초청하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그러마 한다.
돌아와서 그녀가 준 명함을 보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세상에나! 그녀는 일본의 톱가수였다. 요샛말로 ‘개념 있는’ 유명가수였던 것이다. 작년부터 그녀는 ‘평화의 숨결’이라는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무엇이냐 하면 세계의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민초들에 의해 불리는 평화의 노래를 수집하는 일이다. 안전한 녹음실에서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라 처절한 전쟁의 현장에서 부르는 평화의 노래야말로 진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 노래를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부르고 또 여기저기 다니면서 퍼뜨리는 것이다. 그녀는 이 일을 전쟁이 사라지는 날까지 계속 할 것이라고 한다.
나 역시 지난 10년간 생명평화운동을 하면서 ‘생명평화의 노래’를 수집해 왔다. 그러나 운동의 역사가 짧고 오지랖이 넓지 못하여 그렇게 많이 모으지 못했다. 보급 작업도 단체 내부에서 소통하는 정도이다. ‘신짜꽃밴드’와 ‘스즈키 시게코’는 내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현장에서 기도하고 주먹만 쥘 줄 알았지 노래할 줄은 몰랐다. 이제부터는 구호를 좀 바꾸어야겠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의 노래를 부르자!”
원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1042114135&code=9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