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신나고, 질기게 싸운다 - 2차 희망의 버스를 타자!

나의 화분 2011/07/13 22:49

 

아래 글은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으로 가는 1차 희망의 버스를 타고 다녀와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 81호 (2011년 7-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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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신나고, 질기게 싸운다 - 2차 희망의 버스를 타자!

조약골 

 

내가 관심 있게 본 영화 가운데 미국 흑인영화감독인 스파이크 리의 '버스를 타라(Get on the bus)'라는 극영화가 있다. 1995년 10월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서 열린 백만인 행진(Million Man March)에 참여하기 위해 20여명의 흑인 남성들이 로스엔젤레스에서 전세버스를 대절해 6일간 북미 대륙을 횡단하는 여정을 다룬 작품이다. 자발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조직된 이 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무려 83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주로 흑인 남성들만이 참가했다는 성차별적인 행진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됐지만 게이 남성과 청소년, 해고노동자, 대학생, 경건한 무슬림으로 변신한 전직 조직폭력배를 비롯해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의 사람들이 참가한 이 행진은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 종식과 인권 신장을 외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한국에서도 전국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한 곳에 모여 목소리를 모으는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그 상상이 현실이 됐다.

 

서울 동교동에 위치한 철거농성장 두리반에서 활동하던 나는 6월 11일 서울시청 앞 재능교육 농성장을 출발해 한진중공업으로 향하는 희망의 버스를 타자는 전갈을 받고서는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김진숙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85호 크레인에 가고 싶었는데, 좀처럼 갈 기회를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가려면 아는 사람도 없고, 가서 뭘 해야 할지 몰라 부담도 있었는데, 아예 버스를 대절해 떼로 몰려가면 뭔가 신나는 일이 생길 것도 같았다. 이미 친구들은 여러 차례 그곳을 다녀온 뒤였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같이 활동하던 도영은 레이저 불빛을 이용해 85호 크레인 아래 ‘정리해고 철회’라는 큼지막한 글씨를 쏘아 보내는 레이저 태깅을 하기도 했고, 두리반에 자주 오던 달팽이공방 친구들은 85호 크레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길거리 카페를 만들어 커피를 팔고 그렇게 모은 수익금을 직접 전달하기도 했었다. 나도 이 친구들과 함께 뭐라도 하고 싶었지만 두리반 농성투쟁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어서 시간을 내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6월 8일 마침내 두리반 투쟁이 마무리되었고, 나는 마음 편히 희망의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사실 출발하기 3일 전까지도 나는 참가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참가 호소문을 여기저기 올려놓았지만 막상 너무 바빴던 나머지 신청을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4대강 사업의 부당함을 알리는 영상 작업을 하던 미디어 활동가 박채은 감독이 두리반에 찾아왔다. 그도 희망의 버스를 탄다면서 아직 신청 전이라고 했다. 그에게 나까지 껴서 신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버스에 자리가 없으면 당일에 재능교육 농성장으로 가서 그냥 서서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준비물이 뭐냐고 송경동 시인에게 물어보니 기타를 가져오라고 했고, 문화연대 신유아 활동가에게 물어보니 텐트를 가져오라고 했다. 기타와 텐트 그리고 채식주의자인 내가 먹을 약간의 견과류를 가방에 넣어 떨리는 마음으로 서울시청 앞으로 갔다. 이윽고 출발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1호차 맨 앞자리에 탑승했다. 1호차가 제일 먼저 출발한다고 해서 한시라도 빨리 한진 영도조선소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부산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진보신당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이미 원천봉쇄가 돼있던 한진중공업 공장 안에 그날 아침 어렵사리 잠입했다고 했다. 그는 공장 안에서 사측이 고용한 용역 깡패들의 폭력을 스마트폰을 이용해 널리 알리고 있었다. 그가 나올 수도, 내가 들어가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어서 만나자고 메시지를 교환했다. 하지만 같이 1호차에 탑승해 내려가는 사람들조차 '공장 안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 노조 간부는 이미 사측이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문을 컨테이너를 통해 용접까지 하면서 완전히 막아놓았고, 컨테이너 앞에는 수백 명의 용역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만날 수 있다면 그건 이산가족 상봉처럼 무척이나 감동적일 것 같았다. 서울에서만 11대의 희망의 버스가 재능교육 농성장을 떠나 부산으로 출발했다.

 

내 옆자리에는 재능교육 유명자 지부장이 탑승했다. 나는 사실 그에게 미안한 점이 있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노래하는 가수 김성만 동지가 여러 차례 재능문화제에 와서 같이 노래하자고 나에게 제안을 했었는데, 나는 그러겠다고 해놓고는 두리반 농성투쟁에 전력을 다하느라 그 약속을 번번이 지키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세상에 사회적 약자들의 목숨을 건 투쟁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어디 있으랴. 딱 한 번 1000인 동조단식을 하던 날 겨우 시간을 내서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유명자 지부장은 약 한 달 간 이어간 단식의 후유증에서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복식 기간은 끝났지만 여전히 화학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은 먹지 못한다면서 1박 2일 동안 먹을 음식을 손수 만들어서 큼지막한 도시락을 싸들고 1호차 맨 앞자리 내 옆에 앉아 재능교육 농성투쟁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버스에 탄 참가자들의 자기소개 시간이 시작됐다. 면면은 참으로 다양했다. 하는 일도, 생김새도, 관심 분야도 천차만별이었다. 다만 모두들 어서 85호 크레인으로 가고 싶어 했다. 누가 따로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참가한 시민들이 모두 진실한 마음 하나로 뭉친 버스였다. 한진중공업에 대해서는 기사로만 접했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는 나였지만 어쩐지 다들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연대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소개 시간에 나는 공장 안에 들어갈 수 있다면 새벽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해주었다.

 

희망의 버스들이 부산에 진입하자 제일 먼저 우리를 막아선 것은 역시 경찰들이었다. 톨게이트에서 버스를 세우곤 '어디로 가냐', '몇 대가 가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경찰의 면전에 "버스가 50대가 동원되었다. 우릴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고 소리쳐줬다. 듣기론 경찰이 15개 중대를 동원해 부산대교를 막고 있다고 했다. 긴급한 문자가 날아왔다. 지금 한진중공업 안은 엄청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공장 가까이서 내려 정문까지 약 1km를 촛불을 든 채로 걸어서 행진하기로 했다. 버스에 내린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차곡차곡 모여들었다. 새까만 밤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감동의 물결이 시작됐다. 나는 기타와 텐트를 든 무거운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열심히 폰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실시간 상황을 트위터에 올렸다. "가자, 희망의 촛불을 들고 한진중공업 정문 앞으로. 우리가 강물이 되고 우리가 바다가 되자!!" "막을 테면 막아봐라, 이 물결을, 이 함성을!" 같은 트윗에 사람들은 무한RT로 응답했다. 85호 크레인으로 향하는 촛불의 물결을 경찰이 가만 놔둘 리 만무했지만 평화적이고 조용하게 진행되는 행진을 막을 근거는 희박했다. 게다가 경찰이 막으면 돌아서라도 어떻게든 공장으로 갈 촛불들이었다.

 

경찰이 물러서고 행진이 이어졌다. 나는 한진조선소가 얼마나 남은 지 몰라서 답답한 마음에 대열 제일 앞으로 나갔다. 밤이라 어두운데, 바로 앞에 노란색 모자를 쓰고 일렬로 줄맞춰 도열한 용역깡패들이 보이고, 그 앞에서 희망의 버스를 열렬히 환영하는 한진 가족대책위 사람들이 보였다. G20 쥐벽서 사건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박정수 씨도 예의 그 그라피티를 들고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평화바람의 활동가들과 꽃마차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평화바람은 밥차를 운영했는데,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200인 분의 밥을 준비했다고 했다. 구수한 밥과 찌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제 문제는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미 문이란 문은 용역깡패들과 컨테이너가 막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벽에서 사다리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사다리를 타고 공장 담벼락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양손에 짐을 든 나는 저 좁은 사다리를 어떻게 타고 올라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곧 경찰들이 몰려와 사다리를 뺏기 시작했고, 몸싸움이 발생하며 연행자가 나왔다. 그러나 정문 앞에 도열해 서있던 용역 깡패들이 물러났고 나도 안으로 들어갔다. 단결의 광장은 정말 감동의 물결이었다. 공권력의 절망의 벽을, 용역깡패의 폭력의 벽을 희망의 버스를 타고 온 촛불들이 단숨에 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마침내 그 부산 활동가 친구와도 만나 감격적인 포옹을 했다. 정문 앞 컨테이너에 올라간 문정현 신부와 송경동 시인 등이 사자후를 토해냈다. 역사를 만드는 순간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김진숙 동지를 만나기 위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여든 천 명의 사람들이 지금 85호 크레인 앞에 모여 있다! 나는 진실과 양심을 걸고 싸우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호응한다는 것을, 두리반 투쟁을 통해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작년 폭염이 한창이던 7월 21일 두리반에 불법적으로 전기가 끊겼을 때 우리는 호소문을 적어 신문광고를 내기로 했었다. 엄청난 광고비는 자발적인 후원으로 걷기로 했다. 두리반의 호소를 듣고 불과 며칠 만에 무려 573명이 후원에 참여했고, 신문광고를 할 수 있었다. 그 감동이 지금 여기서 다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희망의 버스에서 나는, 이윤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을 바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소박한 구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는가를 배웠다. 값진 깨달음이었다. 내가 현장에 가서 투쟁을 하는 단순하지만 명쾌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진이나 동영상이 아니라 가까이서 김지도를 직접 보고 싶다는 소망이 이뤄졌다. 그는 저 위에서 계속 손을 흔들어 우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나 역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절망 끝에 선택했던 85호 크레인의 그 무섭디무서운 계단을 그가 행복하고 가뿐한 마음으로 사뿐사뿐 걸어내려 오길 바랐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또 한 번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것이었다. 사실 새로운 역사니 뭐니 해도 나는 그냥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고, 가까이서 그를 본다면 설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았다. 노래라도 한 곡 같이 부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평화가 무엇이냐'를 들려주고도 싶었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다시 복직되어 공장으로 돌아갔으면 했다. 우리가 염원한 것은 참 소박한 평화였다. 그래서 우리가 외롭지 않음을 알게 하고 싶었다. 우리 투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가진 자들의 삶만큼 우리의 삶도 정당하다는 걸 모인 사람들의 몸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흥을 내면서, 재미있게 버티면서 투쟁을 해도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퍼뜨리고 싶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마음이 있는 연대가 두리반을,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을, 한진중공업을 또 하나의 해방구로 만들었지 않았나. 자본이 만든 절망의 벽은, 공권력의 원천봉쇄는, 용역깡패의 폭력은 이렇게 무너뜨릴 수 있다. 우리 그렇게 계속 나아가자고 나는 다짐해보았다.

 

날이 밝아오는 새벽, 날라리 외부세력이 트로트 메들리를 부르며 신나는 무대를 열어젖혔다. 나는 이어서 기타를 들고 낮은 무대로 올라갔다. 이미 한진중공업 공장 안은 광란과 흥분의 도가니였다. 사다리를 타고 금지와 폭력의 담을 넘어 그 안 친구들과 감격적인 해후를 한 순간부터 우리는 막을 수 없는 물결이 되었다. 바다에 이른 우리들이었다. 뉴스에선 우리를 ‘폭도들’이라고 매도했지만 우리는 무기 대신 악기를 들고 노동자들과 연대했다. 김진숙 동지가 듣고 있는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희망의 버스를 타고 모인 사람들과 다같이 '평화가 무엇이냐'를 부르던 순간은 나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살면서 이런 순간들이 있기에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현장에서 연대하는 활동가로 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다.

 

곧이어 아침이 밝아오고, 한진 가족대책위 분들이 정성들여 만든 밥과 김치를 먹으며 고픈 배를 달랬다. 그런데 날라리 김여진 씨가 공장 문을 나서다 연행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어 공장 안에 있던 우리도 모두 강제연행 한다는 방침이 발표됐다고 했다. 해볼 테면 해봐라! 영도조선소 안은 무척 넓었다. 나는 처음으로 조선소 안으로 들어가 봤는데, 거기서 만들고 있는 배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저 멀리 바다가 부산항으로 이어져 있어서 경찰이 잡으러 오면 나는 바다로 들어가 헤엄을 쳐서라도 빠져나갈 수 있겠다 싶었다. 조금 후 '전원 연행' 방침은 '전원 연행, 신원 확인 후 즉각 훈방' 방침으로 완화됐다는 소식이 또 들려왔다. 여전히 우리들을 범죄자로, 혐의자로 몰고 있는 일방적인 발표였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빗방울이 조금씩 듣자 나는 느긋하게 잠을 청했다. 피곤했고, 또 잡아가려면 잡아가라고 했다. 어차피 법은 가진 자들의 편이고, 나는 그것을 어기며, 또는 것을 거부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법 따위는 조롱하며 그냥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공장 안에서 맛본 승리는 달콤했고, 이제 우리는 이 집단적 희망의 기억을 안고 다시 버스를 타고 우리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꿀 같았다.

 

서울로 돌아와 김진숙 지도위원이 희망의 버스가 한 번 더 오면 살아서 내려갈 수 있겠다고 트위터에 올린 글을 읽었다. 나는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보신각 화요문화제에서 노래를 하고 뒤풀이를 하며 만난 사람들과 아예 이번엔 버스 2백대를 조직해보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제 7월 9일 출발하는 2차 희망의 버스에는 두리반에서 함께 농성을 했던 식구들을 모아 두리반 버스로 내려갈 작정을 했다. 지금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연락을 하고 있다. 자본가들이 맘대로 노동자를 해고하고, 비정규직을 만들어 차별하는 세상을 끝장내기 위해 모두들 이 버스를 타자고 꾀고 있다. 반응들이 좋다. 너도나도 가겠다고 한다. 막을 테면 막아봐라. 이번엔 더 큰 물결이 되어 모여들 테니!! 우리는 지금 즐겁고, 신나고, 질긴 투쟁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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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3 22:49 2011/07/13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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