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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서

'영화와 인문' 강의가 끝났다.

마지막 강의였던 지난 토요일, 그동안 겪었을 일을 한꺼번에 겪느라 그랬는지

엄청나게 많은 일을 겪었다.

일단 진행을 맡은 담당학생 석호필이 10분 전에 도착했다.

보통은 30분 전에 도착했었는데....

그런데 마침 복지관의 선생님들은 모두 워크숍을 떠났고

프로젝트는 잠겨있는 방 안에 들어있었다.

석호필이 어찌어찌하여 열쇠 꾸러미를 구해왔으나

열쇠꾸러미에는 엄청나게 많은 열쇠들이 달려있었고

일일이 다 맞춰보는 동안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원래는 <봄날은 간다>를 발췌해서 보고

영화 이야기를 하고 할머니들이 가져오신 사진을 같이 보기로 하였으나

잡담을 좀 하다가 뒤늦게 가져온 프로젝트를 설치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노트북이 DVD를 인식하지 못했다.

원래 쓰던 노트북은 복지관 직원들이 워크숍에 가져가버렸다고 하고.

석호필이 애를 먹는 동안 나는 카메라를 프로젝트에 연결해서

할머니들이 가져오신 사진을 찍어서 함께 보았다.

할머니들은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시다가

원래 한 장이었는데 더 많이 가져온 다른 할머니를 질투도 하시다가

너무너무 재미있다고, 영화는 보지 말자고 하시며

그냥 마지막인데 이야기나 좀 나누자신다.

 

그동안 석호필은 다른 노트북을 가져오고 또 다른 노트북을 가져오고

그래도 안되어서 데스크탑 두 개를 가져오고....

그리하여 겨우 DVD가 나오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프로젝트로 연결이 안되었다.

순간, 할머니들 말에 따라서 사진보고 이야기나 나누다 끝낼까 싶었는데

어수선한 틈을 타서 옆에 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다.

"내가...화상 때문에....나, 옛날 사진 다 태워버리고 싶어."

그러고서 책상에 조용히 엎드리신다.

 

 



시간이 자꾸 흘러버려서 결국 <봄날은 간다>는 포기하고

<엄마...>를 보았다. 프로젝트 연결은 끝내 하지 못해서 그냥 컴 모니터로 봤다.

다 보진 않았고 그저 지나간 사진으로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말씀을 드렸고

그러니 절대 사진은 버리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렸고...

할머니들은 급 명랑해지셨고

내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1. 원래 남도 사람들은 흥이 많아.

바가지 엎어서 두드리기만 해도 춤을 추는 사람들이야.

우리도 다 그렇게 춤추는 거 좋아하는 걸.

 

2. 그 영감(엄마 남자친구)이 돈은 좀 있나?

아무래도 못 쓰겠구만. 엄마한테 빨리 헤어지라고 그래.

 

3. 그런데 우리도 저렇게 할 얘기가 많은데 한 번 해보면 좋겠구만.

 

어쨌든...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고 언제일지 모르지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처음에 무서웠던 할머니들.

사소한 일로 싸우시다 다시는 안나올 거라고 뛰쳐나가려 하시고

손을 잡고 애원을 하면 다시 자리에 앉아계시던 분들.

누구 한 사람이 안나오면 온통 그 사람 흉으로 강의실 안을 꽉 채우시던 분들.

나는 그 분들이 무서웠고 어려웠는데...

어느 순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서

아니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나는 관계맺음에 대해서 좀더 배워야할 필요가 있다.

교육이라는 것이 점점 그런 의미로 다가오는 것같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그렇게 규정되는 관계 말고

어쩔 수 없이 만나야하는 그런 관계 말고

드라마곡선이 존재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리하여 나를 돌아보고 상대방에게 눈을 맞추는

그런 관계.

나는 앞으로도 더많이 경험해야할 것같다.

 

오늘은 동네분들과 함께했던 미디어교육 후속모임이 있었다.

교육 주최자들이 아닌 참여자들의 자발성에 의해 흘러가는 후속모임은

꾸리기도 쉽지않고 지속되기도 쉽지 않다.

교육은 총 여섯분이 함께 하셨는데 결국 오늘 세 분이 주축이 되기로 했다.

한다고 하지만 자꾸 그날 일이 생기시는 분들은 모임이 절실하지 않다는 판단.

그리고 두 명이라도 큰 거라는 위로를 하면서

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열심히 잘 하기로 했다.

 

원래는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로 했는데

아이들 교육이며 미국 대선, 그리고 나쁜 이명박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두 시간을 훌쩍 넘겼고 오늘은 모임을 정비했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헤어졌다.

나는 이 모임에 기대가 크다.

그동안 나는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본 적이 없었고

후속모임을 꾸려본 적도 없었으며

잘 모르는 사람들과 이렇게 잡담을 나눠본 적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이래저래 내게는 생소한 경험들이 많을 것같아서 자꾸자꾸 기다리게 된다.

 

지난 토요일에는 예전에 미디어교육을 했던 00여고 특수학급 아이들을 만났다.

이제는 졸업을 해서 다들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아, 한 명은 졸업반)

안타까웠던 건 졸업하고 나니 그냥 섬처럼 지내고 있다는 것.

그중에 한 아이가 그랬다. "선생님, 다시 미디어교육 하면 안돼요?"

그애가 다시 미디어교육을 받고 싶은 건 아닐 것이다.

학교를 떠나고나니 끈 떨어진 연처럼 그렇게지내고 있는 것이다.

취직을 했다고 하지만....그 곳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 장애인센터 선생님들에게 그건 너무 한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복지관과 연계해서 취업을 하고 복지관에서 케어하는 시스템이어야하는데

일선 담임들이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개별적으로 취업을 시키는 게 문제라고 한다.

특히나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곳은 대부분 파트타임인데

계획없이 쓰이다가 그냥 버려질 수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알면 알수록 구멍이 많이 보이는 것같다.

 

내 인생에서 교육을 통해서 알게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교육기간 끝나면 땡! 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이리저리 찾아가며 근근히 이어가고 있는데..

좀더 생각하고 좀더 계획해야 할 것같다.

아기가 깨어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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