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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의 추억

국민학교 3학년 때 여름방학 숙제가 맥주컵 한 개 분량의 잔디씨를 구해오는 것이었다.

집앞 방죽둑에 가서 하루종일 잔디씨를 훑어보긴 했으나

동네에 아이들도 많고 잔디는 그리 많지 않았던 터라 정말 불가능한 숙제였던 거다.

그 해 여름, 우리 집은 참외, 수박농사를 지어서 원두막을 지었고

나는 낮이면 원두막을 지키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참외나 수박을 팔곤 했었다.

원두막 근처에 벽돌집이 있었다.

공장이라고 하긴 그렇고 벽돌을 찍어서 말리느라 집앞 터가 넓어서

이동영화관이 오면 꼭 거기서 판을 벌렸다.

그래서 그 집은 영화터집이라고 불리곤 했었다.

아무튼 그 영화터집에 사는 오빠가 원두막에 와서는

자기가 잔디씨 숙제를 해주겠으니 참외 한 개만 달라고 그랬다.

나는 아버지한테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 걱정은 했으나

그 힘든 잔디씨 숙제를 해주겠다고 하니 너무 좋아서 얼른 참외를 건넸다.

 

내가 "잔디씨는 다른 애들이 다 뽑아버렸는데 어디가서 할거야?"라고 물으니

자기가 아는 곳이 있다고 했다. 참외 한 개를 더 줬던가, 아무튼 그랬다.

그 오빠는 자기집에 동화책도 많다고 그걸 보여주겠다고 해서 꿈에 부풀었었는데....

제목에서 짐작하겠지만 그건 사기였다.

방학이 다 끝나가도록 잔디씨는 오지 않았고 동화책 또한 없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몇 번이나 재촉을 했고 그때마다 그 오빠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다.

방학이 다 끝나고 개학이 코앞에 다가오자 나는 필사적으로 그 오빠를 믿고 싶었다.

우리 담임은 엄청 무서웠었고 악행의 달인이었다.

체육 선생이었는데 숙제 안 해온 애들을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몇 바퀴 돌게도 했고

가장 숙제 안 해온 아이한테 권총을 들이댄 적도 있었다.

달리기 신호용 권총이었지만 우리는 그 때 정말 그 애가 죽는 줄 알았다.

필사적인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 오빠의 말은 짐작대로 거짓말이었다.

끝까지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데....



이상한 데에 마음을 쓰다가 거기에 폭 빠져버릴 때가 있다.

요즘 그러고 있는데 미디어교육후속모임에 쓸 노트북이 없어서 노트북을 살까

어쩔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몇달 동안 사무실 Moon은 HDV편집이 가능한 맥북프로를 사라고 노래를 불렀었다.

아무튼 그래서 맥북프로를 사려고 마음을 먹고 Moon과 함께 게시판 검색에 들어갔다.

적당한 중고가 나오면 블로그에 카피를 하고 그걸 Moon이 보는 방식으로 여러 건의

게시물들을 살펴보다가 적당한 게 나왔다.

Moon이 통화를 하고 130만원까지 깎은 후 하루만 더 생각해보자고 해 하루를 보냈다.

수요일 아침, 일어나서 게시물을 검색해보니 이미 사라져버린 후였다.

 

아, 어제밤에 산다고 할 걸.

나는 뒤늦은 후회를 하다 문자를 한 번 보내봤다.

그랬더니 곧바로 대답이 왔다. 나는 너무나 기뻐서 오늘 12시까지 입금하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다시 "지금 입금해서 지금 보내면 오늘 저녁에 받아보실 수 있다"라고 말해서그럼 지금 보내겠다고 하고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컴퓨터를 켰다.

여기 저기 통장에 있는 돈을 다 끌어모아서 130만원을 만든 후 입금하기 직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t더치트를 검색해보니 내가 거래하기로 한 사람의

이름과 계좌번호가 있었다. 나는 얼른 컴을 끄고 나갔다.

나중에 문자가 와서 받아보니

"연락이 없으시네요. 다른 분 사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실래요?"

나는 "님 이름이 더 치트에 있던데 어떻게 된 건가요?"라고 물었고

"더치트가 뭔가요? 지금 입금하시면 오늘 물건 받으실 수 있어요"라는 답이 왔다.

 

Moon에게 연락을 하니 깜짝 놀라며 그냥 거기서 끝내라고 다른 거 구입하기로 했다고

그렇게 말하라고 한다. 그냥 그렇게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자꾸 신경이 쓰이는 거다.

그 사람은 아이디를 바꿔서 다시 게시물을 올리고

거기다가 "사기꾼입니다"라고 덧글을 달면 지우고 또 게시물을 올린다.

사이버경찰서에 신고를 해도 버젓이 활동을 한다.

그는 시세도 잘 알고 상대방의 심리도 잘아는 것같았다.

꼭 안전거래 하라고 말하지만 시세보다 물건을 싸게 내놓고서

"산다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하실래요?" 그러면서

안전거래는 돈이 늦게 입금되고 그래서 직거래 아니면 그냥 선입금하라고 하는 거다.

그런데 꼭 사는 곳이 부산이나 마산같은 곳인 거다.

 

그렇게 당한 사람의 사연(맥북프로 꼭보세요...저는 눈물이 납니다)을 보다보니

정말 안되기도 하고 또 하마터면 내가 저 사연의 주인공이 될 뻔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하기도 한다.

만약 사기를 당했다면 모든 일은 엉망이 되고 그 일에만 매달렸을텐데.

결론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

본격적으로 편집이 시작되는 때는 내년 3월쯤이니 그 때까지 무기한 연기하자는것

뭐 그 정도로 정리는 했는데....

그 인간은 또 아이디를 바꿔서 또 글을 올렸다.

모른척 하기도, 아는 척 하기도 답답한 이내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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