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후 잡설>아쉬움의 정동영, 영광의 정동영,-③

-부조리의 토양에서 피고 지는 야합과 패거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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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선임기자 박정례]= 지금도 눈에 선하다. 20년 전 일이다. 어느 방송이었든가 딱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TV를 켜는 순간 풀 샷으로 잡은 영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띄는 화면 속의 인물은 이제 막 정계에 얼굴을 내민 신진 정치인 정동영이었다. 필자가 뉴스를 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본 기자의 뇌리에 찍힌 인상은 길고도 강했다. 정동영이라는 인물에게 관심을 갖는 계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날의 최고 사냥꾼은 단연 촬영기자였다. "당신, 잘 나가던 방송인이었지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나의 취재원 일뿐이오." 입장이 뒤바뀐 기자와 취재원의 처지가 어떤 것인가를 그처럼 대비시켜 주는 장면은 일찍이 없었다.

 

취재 대상 일 순위 정치인

대변인, 당의장,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대변인으로서의 첫날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예식에 다름 아니었다. 김대중이라는 노(老) 정객의 편에 서서 이제 막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려하는 고독한 전사, “오늘 우리 '국민회의'에서는 당직 인선을 단행하게 됐습니다. 대변인에는 저 정동영입니다...." 영상기기에서 쏟아지는 굉음소리를 가르며 정동영은 대변인 성명을 낭독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여전히 취재를 다투며 셔터를 내리눌렀다. '타다닥 찰칵찰칵' 

 

기약 없이 계속될 것 같던 길이었다. 그러나 반전의 시간은 의외로 빨리 찾아온다. 시작도 끝도 모를 만년 야당의 생활이 끝났던 것이다. 김대중 총재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른다. 55년 만의 수평적 정권교체였다. 정동영도 그렇고 야당의 다른 의원들도 여당의원으로의 신분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노무현 대통령 시대까지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동안 여당의원으로서 꿀맛 같은 기간을 보낸다. "지내놓고 보니 15cm는 족히 땅위에서 붕 떠서 지낸 세월이었던 것 같다."고 정동영은 술회했다.

 

17대 선거가 찾아왔다. 민주당 의원들은 대부분 새로 창당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 갈아타 있었다. 정동영도 새당에 둥지를 튼다. 특히나 천정배와 신기남과 정동영 트리오는 <천.신.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열우당 창당을 앞장서 선도한다. 이중 정동영은 열우당의 당의장 직함을 갖고서 총선을 지휘하게 된다. 정동영에게 설화(舌禍) 사건이 터진 것은 이 때였다. 젊은이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는 과정에서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당의장 사퇴는 물론 22번으로 올라 있는 비례대표후보 직 마저 내려놓는다.

 

정동영의 정치신조는 책임정치의 구현이었다. 큰 책임만 두 번이다. 2004년에 치룬 17대 총선이 첫 번째이고 2006년 지방선거가 두 번째였다. 선거 참패로 인해 또다시 대표직을 사퇴한다. 열우당은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대책 없는 추락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초지종은 정세균 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

 

정동영에게는 꿈이 있었다. 상향식 공천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자 후임자들은 정동영이 확립하려던 전통을 서둘러 파괴한다. 선거공학적인 계산과 패거리정치라는 맹독이 뿌려지기 시작한 거다. 염치도 체면도 다 팽개친 패권정치, 정동영의 상향식 공천을 뭉개고 담합과 야합의 공천이 대세로 자릴 잡는다. 그 결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쌓아온 야당의 전통은 간 데 없고, 독재에 맞설 때마다 빛을 발하던 야성(野性) 또한 자취를 감춘다.  

 

이는 필자의 워딩이 아니다. 뜻있는 사람들이 야당을 향해서 너 나 없이 내뱉는 쓴 소리다. 소신 없는 정치인들은 거짓과 위선을 장착하고서 매사에 개기고 뭉개고 뒤집으며 60년 동안 일궈온 전통을 일거에 군내 나는 묵은 지 취급을 해버린다. 정도를 걷는 사람은 뒤로 처지고, 분장(扮裝)에 능한 사람은 각광을 받는다. 계속되는 편법과 꼼수는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이내 제 2의 천성으로 굳어졌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관성은 관성을 낳고 특정 집단의 형질을 형성한다. 야합과 패권정치는 결국 그렇게 부조리한 토양에서 피어났다

 

영광의 정동영, 

아쉬움의 정동영

 

정동영의 선전(善戰)은 그런대로 이어진다. 2007년도에는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로 확정되는 시기까지다. 100년 정당을 표방하고 창당한 열우당이 4년 만에 막을 내리고 새롭게 결성된 통합야당에서였다. 하지만 그가 나선 17대 대선은 대패(大敗)로 끝난다.

 

이유는 많았다. 노무현 정권은 집권 내내 순탄치 못한 여정을 이어갔다. 당시의 프레시안, 중앙일보 보도내용 등(2016.12.6)을 보면 “불과 1주일 전 14%에서 ‘노 대통령 국정지지도 5.7%로 최저치 갱신’”이라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 기사는 부제목으로 ‘바닥 모르는 하락추세...임기 말 YS보다 못해’로 참여정부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로 김영삼 대통령이 임기 말 지지율은 8.4%다.

 

한편, 언론에서는 참여정부의 몰락과 지지율을 보며 노 대통령이 '탈당 불사'를 말했다가 '당 사수' 발언을 하는가 하면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연이은 실언을 하는 바람에 ‘불신감을 갖게 되지 않았나?’하는 해석을 내놨다. 지지층으로부터는 외면을 당하고, 국민들과는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타협과 상생은 실종되고, 오기와 자만심만 성하여 정치는 상대편들과 접점을 찾지 못하는 노무현 정권이었다.

 

2007년 대선은 누가 뭐래도 참여정부에 대한 심판과 민심이반 속에서 치러졌다. 그 조짐은 제4회 지방선거 때부터 나타났다. 결과는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울 정도의 참패였다. 당시 열우당은 광역단체장 16개 중 단 한군데만 당선했을 뿐이다. 기초자치단체장도 230명 중 19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쳤다. 이런 모습을 보며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개나 소나 내보내면 다 당선됐을 것이다.”고 열우당을 호기롭게 비아냥거렸다.

 

앞에서 필자는 2004년 총선 때 그랬던 것처럼 2006년도의 지방선거에서도 정동영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을 내려놓았다’고 말했다. 이때를 기해서 당은 급속히 와해 모드로 접어들고 많은 사람들이 ‘열우당을 떠났고, 의원들 또한 탈당러시를 이루느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유권자들은 그처럼 열우당에 냉소적이었다. 정동영은 열우당의 온갖 실정을 등에 지고 싸웠고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선거를 치르고 있었다. 예정된 독배였던 것이다. 내부의 적과 바깥의 적으로부터 동시에 얻어맞는 형국이었다. 죽어라. 죽어라! 안팎이 나서서 정동영을 패대기 쳤다. 전자는 실패한 대통령에 대한 콤플렉스와 내부 모순을 정동영이 뒤집어쓰고 죽기를 바라고, 후자는 노무현 정부를 심판하기 위해 단호하게 돌아선 유권자들이었다.

 

후보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 대를 잠깐 보자. 애시 당초 친노들은 대통합민주신당에 맹비난을 퍼붓던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열우당에 그대로 남아 당을 계속 꾸려나간다 한들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으련만 열우당 세력들은 이내 신당에 얼굴을 디민다. 앉아서 폭삭 망하느니 큰판에 뛰어들어 실리라도 챙길 작정이었던 모양이었다.

 

열우당 잔류 세력들은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몰려오고, 이해찬과 한명숙과 유시민이 곧 바로 대선 판에 뛰어든다. 하지만 며칠 못가서 한명숙과 유시민은 후보를 사퇴한다. 사퇴의 변이란 “이해찬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언론에서는 초장부터 이들의 중도 사퇴를 예견하고 있어서인지 “완주를 할 거냐?”고 묻는 기사가 보도되고 있었던 터다.

 

2007년 대선은 이와 같이 정동영의 패배로 끝났다. 5.7% 밖에 안 되는 임기 말 노무현의 지지율이 말해주듯이 참여정부의 온갖 실정과 실책 속에서 치룬 선거였다. 기가 막힌 사실은, 현직 대통령의 형님과 차기 대통령이 된 이명박의 형님 간에 맺은 밀약(위키리크스 폭로문건)이다. 이로 인해서 이명박의 BBK 사기사건과 온갖 비리혐의가 조사도 못해보고 덮인 사실(2007년 12월 12일 수요일자 시사인의 “노무현과 이명박 통했을까?” 등 수많은 기사 참조)과 현직 대통령과 친노들이 합세를 해서 이명박의 승리를 위해 헌신을 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선 기간 중에 이들이 벌인 ‘정동영 돕지 않기’, “내가 정권재창출할 의무가 있냐?”는 대통령의 언행, 형님들 간의 밀약으로 ‘BBK 주가조작 혐의 덮어버리기’ 등은 ‘정동영 죽이기’의 1라운드에 불과했다. 이후 정동영에게는 수많은 불운이 이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아쉬움을 토로하게 만든다. ④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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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8 14:38 2016/05/2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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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후 잡설>정동영, 그 굵고도 화려했던 이름-②

-정동영의 '반전' 있기나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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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방송인에게는 대중적인 인기가 뒤따른다. 박정희 독재 18년에 이어 신군부독재가 또다시 13년간이나 계속되던 시절, 방송뉴스의 메인 앵커의 중요성은 여타의 방송인들하고는 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방송이 국민 편에 서서 정부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소리를 내면 한여름에 소나기라도 맞은 양 시원해 하며 뜨거운 호응을 보내고, 개념있는 앵커에게는 아낌 없는 박수를 보내주는 것은 인지상정이었을지 모른다.

국내외를 아우르는 사건사고 속에서 정동영이 전해주는 뉴스는 때마침 전파의 신속성만큼이나 스피디하고 역동적인 인물상(相)을 부각시켰다. 삼풍백화점 붕괴현장은 그중 하이라이트였다. 부의 상징이었던 삼풍백화점, 보통건물과는 확연히 다른 그 분홍색의 삼풍백화점이 속절없이 무너지던 날 사람들은 경악했고, 백척간두의 위험에 처한 것처럼 충격과 놀라움에 휩싸였다. 그 때 붕괴 현장으로 달려간 MBC앵커는 정동영이었고, 그의 현장중계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붕괴현장에 갇힌 사람들을 조속히 구제하도록 견인차 노릇을 하려는 듯이 당국을 향해서는 간청과 독려를, 건물더미에 묻혀있는 피해자들에게는 “반드시 구제될 테니 힘내라!”며 중계에 몰두했다. 그의 모습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휴머니티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TV방송국이라야 3개밖에 되지 않은 시절, 신군부세력은 자신들의 지배논리를 주입할 수 있는 매체들을 길들이려고 혈안이었다. 땡전뉴스라 부르는 9시뉴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국민들은 약자를 대변하려고 노력하는 방송과 방송인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보냈다. 이런 기저에서 정동영은 앵커로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는 점이다. 중앙일보 등 복수의 매체에 의하면 “깔끔한 용모와 신뢰감 있는 앵커멘트로 시청자들의 호감을 샀다.”며 방송 생중계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고 논리적이고 상황판단이 빠르다.”는 것이 정동영에 대한 세간의 평이라 했다. 또한 “성취욕이 유난히 강해 별명이「악바리」로서 대학시절 유신반대운동으로 옥고도 치렀다”는 점을 짚어 전했다.

또 다른 신문의 기사에서는 "방송사 명앵커 출신으로 깔끔하고 도회적인 이미지만큼이나 매끄러운 언변의 소유자. 지난해 대선 전까지 2년 동안 제1야당의 ‘입’으로서 ‘중산층 공략’을 통한 국민회의의 이미지 변신을 주도해 대선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고도 보도했다.

정동영을 두고 “악바리 근성이 있다.”고도 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정동영이 축구와 등산을 좋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몸을 많이 쓰는 취미를 갖고 있는데다 운동신경이 꽤나 좋은 때문에 알려진 에피소드 때문인 것 같다. 정동영은 기자 초년병 시절에 한.일 기자축구대회에서 결승골을 넣은 당사자라는데 커다란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또한 마포에 있는 경서중학교에서 언론인 단합대회가 열린 자리에서 볼을 모는데 정신이 팔려 상대방이 달려드는지도 모르고 해딩을 하다가 현장에서 사고가 터진다. 순간적인 뇌진탕이었다. 정신을 잃은 정동영은 병원에 실려 가서 6시간 만에 깨어났다.

그러나 병원에서 일주일의 시간이 경과했을 때 5.18소식을 듣게 된다. 정동영은 아픈 몸을 돌보지 않고 곧장 회사로 달려가 광주 취재를 자원한다. 위험하다고 말리는 사측을 설득하여 카메라 기자 한 사람과 동료 기자를 배정받아 셋이서 광주로 향했다.

 

알려지지 않은 진실

보도되지 못한 정동영의 5.18 리포트

성치 않은 몸을 끌고 광주에 간 이유에 대해서 “광주가 어려움에 처하고 사상자가 막 생겨나고 하니까 ‘가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가게 됐어요. 그런데 광주에 쉽게 접근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막혀있었으니까. 고속도로가 차단되고 차량통행이 안되고 막 그래요. 정읍을 지나서 장성까지 갔을 때 비아고개라는 곳에서부터 군인들이 바리게이트를 치고 검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못 들어간다.’고 통제를 하는 바람에 그냥은 갈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그의 인터뷰 내용이다.

MBC 광주특별취재팀은 차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가기로 결정을 한다. 길도 없는 논두렁 밭두렁과 들판을 가로질러 밤을 새워서 광주로 들어갔다. 20일 서울을 출발해서 21일 날에야 도착하게 된다. 그때는 군인들이 철수한 뒤였다. 이른 바 ‘시민공화국’ 시절, 그야말로 1주일의 시민공화국 기간에 정동영 팀은 광주 취재를 하게 됐다고 한다. 그가 목격한 광주는, 대한민국 전체가 계엄 하에 살벌한 분위기였는데 ‘자유와 민주주의가 흐르는 홀로 평화로운 섬’ 같은 상태였다.

5.18이 발생한 당일 날의 취재는 아니었지만, 일단 군인들이 저질러 놓은 만행과 참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착 한 5월 21일 당시에도 공수부대원들은 외곽에 있었고, 이들이 광주에서 저질러 놓은 흔적들을 확인하며 취재로 들어갓다. “광주 도청 앞에 상무대라고 하는 건물이 있었는데 관을 태극기로 덮어서 사망자의 시신을 안치해놓은 안치소가 있었어요. 수많은 시체가 안치돼 있어서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울부짖는 소리며 통곡하는 그 장면이 너무 가슴 아팠고 참혹하고 그랬어요.”

기자의 눈에 광주는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상태였다. 평온한 가운데 질서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신군부 측에서는 26일 또다시 갑자기 탱크를 몰아 광주시로 진입해 온다. 자정 무렵을 넘어 그게 5월 27일로 넘어가는 새벽으로 연결된 일이었다. “아~ 그 새벽에 계엄군이 새벽에 광주에 진입하고 있었어요. 도청 앞에 가 보려고 했는데 숙소에서 들으니 뭐 이게 다 캄캄한 밤중에서 새벽쯤까지 벌어진 일이었을 겁니다. 콩 볶는 소리가 났어요. 총소리죠. 아마 수천, 수만 발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정동영이 당시의 광주를 보며 보낸 1,2차 송고 내용 전문

“광주에서 정동영입니다.”

“네 저희들은 잘 있습니다. 아니 뭐 교대도 좋습니다만 여기 있으니까 마음은 편합니다. 총탄이, 늘 머리 위로 계속 총성이 나고 해서 그렇지요 마음은 편합니다. 어제하고 오늘하고 완전히 세상이 다릅니다. 어제까지는 일단은 학생들이 장악을 한 생태에서 시민들은 전혀 불안감이나 이런 건 없었어요. 광주 시내의 표정이라든가 이런 건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만발하는 도시였고 황금동 같은 데나 금남로 큰 네거리에서 ‘계엄령 해제 전두환 나가라’는 플래카드가 또 나부끼고 말이죠.

사람들 말하는 데는 전혀 거리낌이 없고 그런 데서는 완전히 자유 천하였는데요.

오늘 되면서 일단 상황은 완전히 180도 바뀌었죠.

어제 밤에 3시경부터 7시까지 지금도 현지에선 간간히 들립니다. 총성이 수천 번이죠. LMG 클레모어 50 수류탄 투척하는 소리 자동화기 소리해가지고 완전히 전쟁터 공포분위기였기 때문에 시민들이 아침에 나와서 생사 확인하고 말이죠.”

 

시장물가 현황

“다음은 시장물가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오전 광주시 한복판 대인시장에를 나가봤습니다. 무 한 개에 150원에 200원, 5.18 이전보다 50원 정도가 올랐고, 배추한단에 300원 100원 정도 올랐습니다. 양파 2개에 100원, 배정도 올랐고 오이 1개에 80원에서 100원, 어제 KBS에서 시내에서 오이 3개를 천원이라고 했다면서 터무니없는 보도를 비난하는 상인이 많았습니다.”

이 내용은 계엄군이 다시 광주에 들어와 통신이 복귀된 27일의 모습을 현장 스케치 형식으로 본사에 송고한 내용이다. 하지만 끝내 보도되지 못한 기사내용이다. 군사독재 정권의 언론왜곡과는 달리 <광주의 진실>이 담겨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광주의 현장에서 그때 보도되지 못했던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 이나마 정동영이 악바리 근성을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기록에 남지 않을 일이다.  

정치인의 길로 나선 정동영

15,16대 총선, 연이은 전국 최다득표

4.29 재보선도 재보궐 62년 사상 최다 득표

정동영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를 하여 전국 최다득표를 얻는다. 89.9%, 이어 16대 총선에서도 88.24%로 다시 한 번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한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국민들은 신군부를 향해 날선 멘트를 날리는 40대 초반의 앵커에게 전국 최다득표의 영광을 안겨줬다. 첨언하자면 2009년도 4.29 재보선에서 얻은 5만7423표(득표율 72.27%) 또한 재보궐 선거 62년 사상 가장 많은 득표라고 한다. “15.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이어 3관왕의 금자탑”이라는 <데일리 중앙>의 제목의 기사 제목과 내용이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YS와 DJ는 인재영입에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 정동영은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피 수혈에 걸 맞는 사람이었던가 보다.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다 들어주겠다. 전국구든 지역구든 원하는 자리를 주겠다.”며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당시 정동영 MBC 앵커를 영입하며 이렇게 제안했다고 한다.

고심 끝에 정동영 은 정계에 입문했고, 천정배,· 신기남 , 김한길, 정세균 등도 함께 영입되어 모두 여의도에 입성에 성공한다. 잘 아시다시피 정동영의 지역구는 전주(덕진)이고, 정세균의 지역구는 무.진.장(무주,진안,장수)다. 그런데 지금까지 정동영이 국회의원을 지낸 기간은 11년인데 비해 정세균은 20년이다. 똑같이 15대 국회 때 영입된 인물인 정동영과 정세균이 국회에 머문 기간이 각각 11년 대 20년이라니(...)

이 점에서 정동영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이 익히는 대목이다. 정동영의 드라마는 누가봐도 부러워할 만한 영광의 순간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생 드라마에 있어서는 갈등구조가 없으면 재미가 없는 것인가 보다. 그에게 슬픔과 불운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덩달아 부침(浮沈)이 계속됐다. 이 지점에서 자발적인 그의 발걸음은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는 오랫동안 낮은 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길을 찾아 헤매는 영웅들의 영웅여정에서 보듯이 길을 찾아 헤매며 고생은 해도  끝내는 목적지에 다다를지 어떨지 아직은 모른다. 이제 그가 첫 선거구였던 전주(병) 덕진에서 다시 당선됐다. 4선이다. 정동영의 터닝포인트가 궁금하다.  그의 인생에 어떠한 반전이 찾아올 것인가. ③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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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6 20:15 2016/05/2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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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후 잡설>정동영과 정세균-①

-전북의 대표적인 두 정치인

 

기억 한조각이 떠오른다. 글의 타이틀을 <총선 후 잡설>이라 정하고 보니 더욱 그렇다. 몇 해 전에 한 경제연구소와 인연을 맺은 적이 있는데 필요한 인물이라 여겨서인지 연구소 측에서 입사 제의를 해왔다. 시체 말로 “‘나이 지긋한 아줌마에게 입사 제의를 해오다니(...)” 아무리 따져 봐도 뜻밖의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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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중간 역할을 하시는 분이 “연구소에 들어가면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묻는 것이어서 망설이지 않고 “잡일이요.”하고 대답했다. 잡일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연구소에 들어가 뭔 폼을 잡을 일이 있겠나.”싶었기 때문이다. 예 컨데 연구소에 소용되는 사람이 되려면 남들이 싫어하는 잡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하나 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나 생각했다. 근사한 직책을 입에 담지 않아서인지 필자의 말에 상대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잡일이 얼마나 중요한데요.”라는 말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렇다. 이번 글은 잡다한 잡설이기 십상이다. 총선 내내 고군분투하는 정치인들을 지켜보면서 느낀 점을 표출하는 면에서도 그렇고, 스치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유롭게 쓰고 싶은 마음에서도 그렇다. 생각은 때로 핑퐁처럼 들쭉날쭉 튀어 오를 것이다. 말 주머니 안에는 <총선 후 잡설>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다양한 감정과 남들이 하찮게 여길지도 모르는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잡설이 담길 것 같다.

잠깐 우리 역사의 단면 하나, 구한말 고종의 왕비인 중전 민씨와 대원군에 대한 역사 한 토막이다. 두 사람 간의 권력투쟁에서의 승자는 민씨였다. 대원군은 축출되어 구금되었고 끝내는 청나라로 끌려가는 등 끝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중전 민씨의 생애도 파란만장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후궁을 몰아내는 일에서부터 자신의 자리보존이나 눈앞의 적인 시아버지를 제압하는 데는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너머를 보는 눈은 한계점 투성이다. 궁중 안 암투를 넘어 국가경영이나 저 넓은 영역인 국제간의 역학관계에서 배태되고 야기될 수 있는, 결과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은 없었던 것 같다. 이는 하나마나 한 얘기다. 중전 민씨가 자격 있고 유능해서 나랏일에 관여했겠나. 실세 왕비였기 때문에 감 놔라 대추 놔라 국정을 농단한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아무튼 구한말 중전 민씨의 전횡은 자신과 조선을 넘어 자손만대에도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일제(日帝)는 공권력과 현장 칼잡이 격인 사무라이 부류의 낭인들을 동원하여 그녀를 살육한다. 조선의 왕비, 중전 민씨는 그렇게 망국의 한을 천추에 남기면서 시아버지 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필자는 이지점에서 “저 여인은 과연 우리 역사에 어떤 이로움을 끼쳤을까?”하는 질문을 던져봤다. 중전 민씨의 이야기가 오페라 ‘명성황후’라는 상업적 볼거리로 재탄생하여 흥행을 위한 피알 차원에서 과대포장 되어 광고시장을 누비는 것과 역사적 실제 사이의 괴리를 느끼며 한없는 형용모순에 빠졌다. 그때마다 호화롭고도 세련된 의상을 걸치고 명성황후를 연기하는 성악가의 포스에 무조건 박수를 치는 예술의 향유자이기를 사양하고 싶었다. 그들이 주입해주는 비련의 왕비를 동정하는 것 말고, 결이 다른 이성적 질문하나라도 스스로에게 던져보려 애를 썼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다. 오래전부터 더민당의 정세균 씨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대입하여 보곤 했다. “저 사람은 국회의원 20년 하면서 호남의 위상과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과연 어떠한 공헌을 했을까?”라고 말이다.

정세균의 장점이라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겨주며 대안관계가 원만하다는 평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타인에 대한 접근성과 적응력이 좋다는 말이 되겠다. 이런 경우의 또 다른 얼굴은 처세술이 탁월하다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정세균은 그렇게 두루 원만해 보이는 인상과 관리형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당이 과도기에 있을 때마다 임시 대표직이 거론되고 실제로 그 일을 맡게 된다. 열린우리당 시절 위기상황에서 두 차례 ‘구원투수’ 성 임시대표를 맡은 것을 기억하자. 이런 저런 일로 관록이 쌓인 그다. 2008년도에는 정식으로 임기 2년의 당대표로 등극한다.

양지와 음지, 빛과 그늘, 익숙한 말이다. 진부하기도차 한 이 평범한 말을 빌어 정세균 씨가 잘 나가던 때의 그늘은 무엇인지 궁금하기에 묻고 싶다. 그가 잘 나가기 위하여 짓밟았던 인물, 철저히 형극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불쌍하고 불쌍한 야당사에 그는 과연 어떤 해악을 끼치고 어떤 공적을 더했을까. 망조 들어 패망하는 나라에는 항상 원인제공자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의 야당에 김대중의 그 빛나던 야당이 존재하는가?

때마침 정세균과 같은 때에 정치를 시작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이번 20대 총선에서 등원하게 됐다. 이들에 대해 언급해보려 한다.

 

정동영과 정세균

 

정동영과 정세균은 둘 다 전북 출신 정치인이다. 전북 출신 정치인이 어디 한둘일까만 유독 이 두 사람을 거론하는 이유가 있다. 전북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자 라이벌이기 때문이고, 둘 다 오늘 날의 전북정치의 위상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야당정치사에 광주전남 정치인들이 중심인 것 같지만, 김대중 대통령 이후 실질적으로 굵직한 인물은 거의 전북 출신들이었다. 대통령후보를 배출한 곳도 전북이요, 당대표를 제일 많이 역임한 지역도 전북이다. 사족이지만 국회의장도 전북에서 배출했다.

헌데 어째서 오늘 날의 전북정치와 전북의 위상은 바닥권일까? 이점에 대해서 20년 동안이나 잘 나가는 정치인인 정세균 씨가 책임이 없다고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마침 정동영은 “전북 정치를 변방에서 중심으로 끌어올리고 호남 발전을 위해서 온힘을 기울이겠다.”며 하방정치를 약속을 했다.

정세균은 어떨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종로에서 6선 고지에 이르더니 당대표와 국회의장과 대선출마 중 어떤 패를 골라잡을지 즐거운 고민에 빠져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김종인 이후 당의 얼굴이 고민되는지라 작금의 더민당 사정은 간단치 않다. 더민당의 최대 지주인 문재인은 자신의 대선가도를 공고히 해줄 사람을 찾기 위해 고민이 깊을 것이다. 임시대표 체재를 8월 말까지 유지하기로 했지만 그 안에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는 일이 급선무인 셈이다. 이런 와중에 정세균이 당대표로 거론되기 시작한다. 정세균 자신도 대표직을 향해 입질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동영을 보자. 그는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된다. 이전에는 당 대표를 두 차례 역임했고 이제 4선의원이 됐다. 반면에 정세균은 2개월여 임시 대표직 수행을 포함하여 열우당이 해체되기 직전과 2008년 민주당의 당대표까지 합하여 세 번의 당대표 직책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자타가 공인하는 6선의원이 된 마당이다.

정동영과 정세균의 정치 스타일은 걸어온 길만큼이나 대조적이다. 둘의 정치 역정에서 눈에 띄는 확연한 차이는 전자가 풍운아적인 행보라면 정세균은 안정적이고도 권력 친화적인 행보라 할 수 있다. 오랜 기간 주류 권 안에서 놀았다는 얘기다.

이들의 고향은 각각 전북의 순창과 진안이다. 두 곳 다 산간지방인데 정세균의 고향은 북의 ‘개마고원’과 함께 남에서는 ‘진안고원’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면적의 82.4%가 산으로 이루어진 고장으로서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전라도] 편에서 ‘사돈의 팔촌에 정승 하나 없다.’ 할 정도로 산이 높은 오지다. 아무튼 정동영의 순창이나 정세균의 진안은 지금껏 개발이나 산업화의 물결을 타지 못해서 당장 가보더라도 순박할 정도의 옛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고장이다.

산골 출신이라서 그런지 이들은 학구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둘 다 대처로 진출하여 고교를 졸업했다. 하긴 정동영은 좀 더 일찍 부친의 선택에 힘입어 10세 때인 초등부터 전주로 나와 다니게 된다. 정동영은 이후 전주고를 거쳐 서울대 역사과를, 정세균은 신흥고를 졸업하고서 고대 법대를 나왔다. 정세균의 학력에선 특기할 점이 눈에 띈다. 먼저 진안의 능길초등학교를 나와 정규 중학교가 아닌 주천고등공민학교라는 곳을 다닌 점이고 이후 고교는 세 군데를 거친다. 무주의 안성고교를 거쳐 전주공업고등학교로 다시 전학을 한 다음 대학에 진학할 목적으로 인문계인 전주 신흥고로 또 전학한다. 그는 더 나은 길을 찾아서 어려서부터 이주를 자주 한 점이 두드러진다.

전자인 정동영은 MBC 간판앵커라는 직업의 특성 상 방송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반면에 정세균은 종합상사 무역업 출신으로서 대중적인 명성과 상관없이 정치를 시작했다. 둘 다 1996년도에 김대중 대통령의 인재영입 케이스로 국민회의에 들어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정동영은 당선 되는 순간부터 화려한 출발을 한다. 그를 향해서는 카메라세례가 늘 뒤따랐다. 국민회의 대변인으로 지목됐을 때도 역시 그랬다. 헌데 당시의 야당의원들은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고 할 정도로 김대중 선생을 지지하는 열성 지지자들에 힘입은 당선이 많았다. 의미 있는 의석수를 획득하지 못하면 김대중 선생이 망할까봐 호남 유권자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박한 심정으로 투표장으로 달려갔기에 말이다.

정동영이든 그 자신 상대후보를 40% 이상 차이 나게 누르면서 당선됐다고 자부하는 정세균이든 독재정권에 맞서는 민주시민과 김대중을 지키고자 하는 열성당원들의 수혜자가 아니라고는 말 못할 것이다. 필자만의 독특한 생각인진 모르나 호남 정치인들은 대통령 당선이라는 장벽은까지는 높았을지 모르나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이 되어 전국적인 지명도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는 적지 않게 누렸다고 본다.

그러나 정치의 얼굴에는 현재, 과거, 미래의 얼굴이 있으며, 그 속에도 천의 만의 얼굴로 변종 변형을 이룰 수 있는 세계고, 그 결과에 따른 공과(功過)에 대해 다각도로 엄중한 평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북 출신 정동영과 정세균에 대해서도 엄중하면서도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 그들에 대한 공과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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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1 21:44 2016/05/21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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