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당과 박지원

국민의당과 박지원

-조속히 선출된 원내대표와 당 대표 선 보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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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례 선임기자= 새누리당에 이정현 새 대표가 선출됐다. 이와 더불어서 27일이면 더민당 또한 새 대표가 선출된다. 명실공이 두 당은 새 대표를 내세워 정국을 주도하려 할 것이고, 자당의 정체성을 한껏 정립하려 할 것이며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후보군을 띄워 당의 지지도를 높이는 전략으로 나갈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민의 눈에는 새누리당과 더민당만 커 보일 것이다. 세상 그 어디에도 국민의당의 존재감은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국민의당은 4개월 전에 당을 출범시킨 신생정당이다. 국민들은 그들에게서 신선한 충격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고 싶어 했고, 자갈을 고르고 걸림돌을 치워가며 정치 토양을 옥토로 개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국당은 기본과 철칙조차 비켜가면서 무사안일의 길을 택한다. 당이 출범한지 6개월 이내에 새 지도부를 뽑도록 돼 있는 당규를 무시한 채 안철수 대표 체재로 가는 길을 택했고, 원내대표를 선출하자는 의견 분출을 뭉개버리고 박지원 의원을 추대 형식으로 내세웠다.

박지원 의원은 현재 당 비상대책위원장까지 겸하고 있다. 기라성 같이 많은 인재들은 외면과 배재를 당하고 박지원 의원에게 모든 권한이 몰려있는 형국이다. 쏠림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체 이런 당 운영체계가 어떻게 해서 계속되는지 잘 모르겠다. 짐작컨대 당에 대한 오너쉽을 갖고 있는 안철수의 지나친 경계심이 이런 현상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그 누구도 안철수의 오너쉽을 부정하진 않는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어 탈이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박지원 의원의 설레발과 개인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 오늘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이 부분, 매의 눈으로 잘 들여다보자. 국민의당은 한마디로 창당과 더불어 의석수 38석을 얻은 제 3당이 되더니 당원들이 모여드는 정당 상을 구축하기 보다는 독일 작가 권터그라스의 소설에 나오는 양철북을 두드리는 소년처럼 성장이 멈춰버린 정당이 되고 말았다. 

 

새 술도 헌 부대에 담는 국민의당

말로만 새 정치, 무늬만 신생정당

박지원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자고로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안철수 대표 체재를 연말까지 끌고 가려는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정치 경험이 일천한 안철수 대표로 하여금 좀 더 오랫동안 정치 일선에 머무르도록 하여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되도록 하려는 포석이며, 산전수전 다 겪은 박지원 의원을 원내대표로 내세워 의원 수가 각각 129석과 121석인 새누리당과 더민당을 상대로 정국을 대등하게 펼쳐나가려는 계산을 짐작 못하진 않는다.

그러더라도 결론은 정면 돌파 보다는 우회하는 길이었고, 승부수를 구사하기 보다는 안전과 실리만을 추구한 결과가 국민의당이 갖는 현주소가 되었다. 이는 국당의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거니와 대의명분에 우선하지도 않으며 국민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행보이다.

수시로 변하는 정치 지형 속에서 뻑 가는 것은 순식간이다. 박선숙과 김수민의 총선홍보 리베이트문제로 안철수와 천정배 두 공동 대표가 졸지에 대표직을 던지는 사태가 벌어졌지 않은가 말이다. 박지원 의원은 현재 원내 사령탑과 비상대책위원장 직을 겸하며 온갖 사안을 혼자서 쥐락펴락 하고 있다. 이런 박지원의 원맨쇼가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않는 한 국(國)당도 박지원 의원도 한방에 날아가는 수가 있다.

작금의 정세는, 새누리당의 이정현 대표를 보아서도 명백하다. 이정현 대표는 흙수저 보다 못한 자칭 무(無)수저로서 사무처의 말단 당직자로 시작해 '17계단'을 밟아 당대표가 됐다. 해방 이래 호남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보수 정당의 당 대표로서 성공스토리를 담대하게 일궈낸 인물이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당헌당규에 보장된 절차 안에서 보란 듯이 남들과 공개적으로 겨루어낸 결과다.

이런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니까 대표가 되자마자 말발이 서고,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남은 임기가 1년 6개월이다. 5년 단임제에서 남은 임기 1년 6개월은 아직도 긴 세월이다.”며 계파 싸움으로 얼룩진 새누리당을 단합의 모드로 몰아세우고 있다.

때마침 주승용·유성엽·황주홍 같은 호남 의원들을 중심으로 의견 제기가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전당대회 조기 개최와 비상대책위원장-원내대표 겸직 체제 해소를 요구하는 목소리다. 박지원 의원은 그동안 문제점을 제기하려는 낌새가 보일라 치면 "기다려 달라" “나도 전대를 빨리하기를 원하다“는 말마디로 의원들의 불만을 잠재워왔다. 그러나 그가 제공하는 립 서비스와는 달리 그가 노니는 세상은 박지원 외에 다른 사람은 끼어들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직계 라인만 믿고 중용하는 안철수의 옹졸한 오너쉽과 박지원의 현란한 플레이의 접점에서 국(國)당의 운명은 결정되고 시간은 어느 덧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오고야 말 것이다. 국당 사람들 정신 차려라!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그래도 빠른 때다. 다행히 지금 국당의 많은 의원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분출하고 있다. 황주홍 의원은 "박지원 위원장의 결단만 기다려야 하는가. 이렇게 가면 지리멸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유성엽 의원은 특히 "총선 직후 원내대표를 합의 추대한 것부터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정인화 의원도 "전대가 늦으면 대선준비도 늦어지니 늦어도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엔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확실히 할 점이 있다. 박지원 의원이 아무리 개인기와 노련함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명분과 도덕성과 대중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의 소리는 허울 좋은 빈껍데기요,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와 같을 것이다. 의원 수 129석과 121석을 가진 두 거대정당은 박지원 원내대표의 노련함과 뛰어난 개인기에 주눅 들어서가 아니라 당의 방침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안 별로 경중을 가려 국당과 연대든 협치든 반대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명하다. 국당은 빨리 담대한 패기와 우월한 도덕심으로 재무장하라. 그리하여 하시라도 빨리 선출된 원내대표와 당대표를 국민 앞에 선보이길 바란다. 늦기 전에 진격하는 것이 답이다.

 

*글쓴이/박정례 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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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3 14:51 2016/08/1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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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김대중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③

-햇볕정책을 비롯한 김대중의 치적과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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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례 선임기자= 여름의 한복판이다. ‘2016년 김대중과 우리’라는 타이틀을 걸고 열리는 하계캠프에 참석한 사람들은 4시가 되자 영상물을 시청하고 이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관장의 강연을 듣기 시작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관장은 이날 강연에서, 조선조 조광조 이래 개혁세력이 암살이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뜻을 이룬 정치인은 김대중이 유일한 사람이다. “길게는 300년 만에 처음이고, 짧게는 해방이후 55년 만이다”라며 한편으로는 DJ의 업적을 거론하기 전에 “DJ는 잘하기만 했냐?”고 물었다.

박정희가 죽으니 기념관 지을 돈이 안 걷혔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에 대해 군말 없이 사업비를 지원해준 일을 DJ가 했다. 전두환 노태우 또한 광주학살을 부정하고 사형선고까지 받고서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이런 전두환 노태우가 반성과 참회를 해도 시원치 않은데 이들의 구명이 뭣이 그렇게 바빠서 당선자 신분으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쫒아가서 그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등 온정주의에 빠졌다. “이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며 잘못된 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클린턴 정부 시절 울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북한을 거쳐서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당시 “‘난 병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럼 지금부터 햇빛정책을 비롯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서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8년 2월 <시사저널>이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역대 대통령 가운데 퇴임 이후가 가장 바람직했던 대통령은 누구라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전체의 31.9%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꼽았다. “가장 한국 사회 발전에 가장 많이 기여했던 대통령’을 꼽는 질문에서도 박정희에 이어 두 번째라고 대답하는 여론이 나왔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21세기국가에 어울릴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했고, 동아시아에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고 조롱한 서양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며 한국전쟁 이래 최대의 위기인 IMF사태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다.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에서는 어떤 대통령이든 IMF만 극복해도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김대중은 이 IMF를 1년 반 만에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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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이 아니다. 그는 IT산업과 문화산업을 중흥시켜 차세대 산업을 육성한 공이 있다. 한일 문화개방만 하더라도 혹자들은 일본문화에 침식될 것을 염려했지만 그의 과감한 개방은 오히려 한류 태동의 화려한 서막을 열기에 이른다.

외교적으로는 휴전 이래 6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남북긴장 사태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려는 <대안>을 고안해낸 인물이다. 70년대에 북한 교차승인과 주변 4대국 보장론을 제기하여 자주적인 외교적 역량을 드러냈고, 대한민국 역사에서 남북 간에 가장 충돌이 적었던 DJ 정부 시절을 열어 불안 없는 시기를 보냈다는 것은 전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때 국민들은 “평화가 곧 돈이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투사였으며 사상가였고, 정치가였으며 동시에 행정가였다. 이러한 능력을 모두 겸비한 이는 요즘 시대에 매우 드물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필요할 때는 마키아벨리즘의 면모도 보여줄 줄 알았던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빌 클린턴, 조세프 바이든, 미하일 고르바쵸프, 리오넬 죠스팽 등과 같은 유명 인사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었으며 심지어 사상적으로는 그와는 대척점에 있었던 헨리 키신저도 그를 거인으로 인정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외국의 유력자들로부터 그와 같이 널리 알려지고 동시에 존경받은 인물은 일찍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의 최고 장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바로 정치력이다. DJ의 정치세력은 비록 그 기반이 호남이라는 지역이었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칫하면 민주당은 군소정당 수준에 지나지 않았을 테지만, 오랫동안 정권과 권력을 독식해온 면에서나 인구수를 보더라도 상대조차 안 될 싸움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김대중은 독재정권과 맞서서 대안세력을 결집하고 그 외연을 넓혔으며 내부의 무수한 충돌을 무마하고 다양다종한 정치인들을 하나로 묶어낸 사람이다. 그의 정치 역량으로 인해서다. 대한민국의 성립 이후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업적을 통해서 오늘을 거울삼는다. 김대중의 치적은 정의와 평화공존과 통일에의 열망이었다. 김대중이 우리 민족에게 남긴 최대 업적은 강물 같은 정의와, 꽃처럼 아름다운 평화와 무지개처럼 소중한 민족통일에의 염원이었다. ④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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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6 18:13 2016/08/0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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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다 모여!...‘김대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②

-불갑사와 영광 힐링컨벤션타운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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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례 선임기자= 대한문에 차를 댄다고 했다. 8시 반부터니까 오는 대로 타면 되고, 차는 9시 출발이라는 공지다. 전남 영광으로 가기 위한 대절버스 말이다. 김대중 사이버기념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강연과 대담을 겸한 ‘2016년 하계 투어’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같이 가는 방법이 내겐 안성맞춤이다. 여러 가지 부담에서 벗어나 경제적이고도 홀가분한 선택이 된다. “중간 휴식입니다!”하면 잠깐 내려 볼일을 보면 되고, ”아침 안 잡숫고 오셨죠? 김밥과 식수 하나 씩 입니다.“며 건네주는 것이 있으면 받으면 된다. 이런 때 주의할 점은 약속장소에 늦게 가면 안 된다. 하여튼 나는, 주최 측으로부터 초청받은 한 정치인과 통하는 사람들이 단체로 참석하기 위해 대절한 버스에 편승했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사뿐히 차에 오를 것을 상상하며 여유 있게 집을 나서서는 “어떤 쪽에 앉아야 가는 내내 햇볕을 받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운전석 반대편 3번 째 줄에 앉았다.

 

영광을 향해

조금 있으니까 박영림 씨가 올라탔다. 아는 언니가 한 사람 온다고 하면서 그 언니를 기다리다 보니 좌석 여기저기서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기다리느라 20분 넘게 출발이 늦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단체 여행에 시간 늦었으면 피 본다. 뛰다보면 나이든 아주머니들은 헉헉거리기 십상이고 다리가 시큰거리고 아침부터 기운이 쏙 빠지는 등 후유증이 장난 아니다.

출발하면서 받은 것은 토마토 즙과 캔 막걸리와 크림빵이었다. 배고픈 김에 빵을 맛있게 베어 물었다. 그 와중에 카톡 문자를 작성했다. 출발 전 막간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 출발해서까지 이어졌다. 이 선생에게 전달할 사항이 생각나서 잊어먹기 전에 전달의 의무를 다하느라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에 출발하는 일행은 그리 많지 않은, 20명 남짓이었다. 

도로는 그리 붐비지 않았다. 7월 마지막 주와 8월 초순, 막바지 휴가기간인데다 월말과 월초가 겹친 주일이라서 굉장히 밀릴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려나간다. 서해안고속을 타고 가면서 백제휴게소라는 곳에서 한 번 쉬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서면 늘 잠시 궁금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온 걸까?”

돌아오지 않는, 실없고도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 이글거리는 운무(雲霧)를 쳐다보노라니 차안으로 빨리 들어가 착석하는 것이 상책이라 싶었다.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데 비해서 차안은 상대적으로 시원하고도 쾌적할 것이기에.

굴비와 먹거리의 고장 영광 법성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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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 넘어서 드디어 차가 멈췄다. 그곳은 영광군청 앞이었다. 하지만 곧 다시 돌려서 어디론가 향한다. 식당 측에서 나온 길 도우미를 태우기 위해 잠시 주차한 모양이었다. 버스는 다시 주행을 시작하였고 이내 시장입구에 멈춰 섰다. 아취 형 철제 탑 위엔 ‘영광매일시장’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초장마차’, 우리가 들어간 식당이다. 원탁과 네모 형 식탁 위에 음식이 준비돼 있었다. 반찬은 겉절이, 멸치 볶음, 콩나물무침, 가지나물, 젓갈, 깻잎, 양파초저림에 굴비까지 모두 11가지 반찬에 대구지리 탕이 가스 불 위에서 일행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고픈 김에 모두 맛있게 먹었다. 반찬솜씨가 일품이어서 ‘초장마차집’을 나설 때는 모두 자발적인 인사를 건넸다. 식탁마다 세 네 번씩 반찬을 더 갖다가 먹으며 밥그릇을 싹싹 비울 정도로 만족하게 먹은 한 끼였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절대미각을 갖고 계신가 봐요!” 갑자기 들이닥친 20명 넘는 손님에 과년한 딸 둘까지 나서서 어머니를 도와 손님맞이를 하는 것이다. 모두 한 미모 하는 집안이었다.

곧 이어서 불갑사로 향했다. “잠시 경내 구경을 하고 오라”는 안내가 떨어지자 어떤 이는 “절 보다는 계곡에 차를 대주지...”하는 주문을 내놨다. 목적은 어디가고 즉석에서 필요에 의한 희망사항을 내뱉은 경우다. 그런데 개념 없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절 구경을 하고 나온 후엔 강연과 대담프로를 몇 시에 어디서 하는 것인지 확인하지 않고 챙기지 않았다. 이 탓에 4시 경에 혼자 떨어져서 미아처럼 잠시 헤매며 “어디들 모여 있냐?‘고 전화를 해야 했다.

그랬다. 김대중 사이버기념관에서 주관하는 행사는 ‘영광 힐링컨벤션타운’이라는 세미나실에서 열리고 있었다. 총 250여 명이 머무를 수 있는 타운은 각각 치유, 힐링, 숲, 자연, 사랑, 에코라는 이름을 갖은 대형 숙박 동(棟) 6개에 식당과 세미나실을 겸한 연수원 1동으로 구성된 곳이다. 영광힐링컨벤션타운은 지난 5월에 양국진 이라는 사람이 개장했다고 한다. 저녁이 되어 에코 동에 들기까지 우리는 그렇게 불갑사로 향했다.

 

천년고찰 불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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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구경은 약 1시간 반 동안 계속됐다. 걸음을 떼자 의외라 싶을 정도로 잡상인이 눈에 띄지 않아서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입구가 잘 정비돼 있었다. 유명 절이나 관광지치고 입구에서부터 상가(商街) 거리가 형성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시골 장에 있는 듯이 혼잡하고 어수선한 모습일 거라는 선입견이 다소 빗나갔다.

“이런 곳도 있네!” 싶어서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단아한 매무새를 하고 있는 마님에게 허술한 나를 들킨 것처럼 멋 적은 기분을 수습하고 걸었다. 양옆엔 잔디밭과 풀꽃 밭이 조성돼 있고 그 선을 넘으면 어김없이 녹음 짙은 나무숲이 보였다. 그런 길을 보며 몇 백 미터는 걸었을 거다.

​사전 지식하나 없이 온 절일망정 일주문까지만 가면 종합안내도를 통하여 절의 역사에 대해서 알 수 있으려니 했다. 그랬다. 안내판 앞에 서니 산책코스며 법당건물과 각종 산책로로 연결되는 길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더불어 안내도 양 옆에는 어김없이 절의 설립연도와 불갑사의 역사를 집약해서 적시해 놓았다.

불갑사라는 이름의 유래는 불교가 전해진 이후 처음 건립되어 모든 사찰의 으뜸이며 근원이 된다 해서 부처 佛자에 첫째 甲자를 써서 불갑사(佛甲寺)라 지었다고 한다. 고려 말 각진국사가 주석(主席)할 때 수행승이 1천명이나 됐고 본사에 40여동 500여 칸 규모의 가람을 갖추고 산내에는 31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유재란 때 모두 타고 이후 증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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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불갑사는 호남 서쪽 불교의 흥기를 이룬 터전이어서 불갑사를 불지종가(佛之宗家)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불리게 됐다.​ 동에는 불국 서에는 불갑이란 말이 회자됐다 한다.

한참 만에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호랑이상이 보인다. 절 입구에 웬 호랑이상인가 싶었다. 발걸음을 호랑이상 쪽으로 돌렸다. 필시 무슨 이유가 있겠지. 호랑이도 굴속에서 사는가보구나. 굴도 보이게 말이다. 돌계단 전에 안내문이 보인다. 이 호랑이 모형은 1908년 2월 한 농부에 의해 잡힌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본인 하라구찌가 당시 논 50마지기를 살 수 있는 값을 지불하고 사들여서 동경에 있는 시마쓰지작소에 의뢰하여 박제 표본 한 것이고, 이를 목표 유달초등학교에 기증했던 것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불갑산은 이 고장 산이니, 관계당국에서도 불갑산에서 잡은 호랑이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와 스토리로 다가왔을 것이다. 남한지역에서 잡힌 유일한 호랑이 박제라는 점에서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리라. 

경내가 가까워 온다. 보통 절들은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각조 부도상이 있기에 저것도 부도상의 일종인가 하고 다가가니 ‘탑원’이라는 안내판과 함께 간다라 유구들이 조성돼 있었다. 유구란 대지 위해 남긴 인간들의 흔적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라고 한다. 이 유구 조성은 간다라 지방의 대표적인 불교사원인 탁트히바이 사원의 주(主) 탑을 본떠서 건립했다고 한다.

간다라 불상은 우리나라 불상의 원류로 잘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나 중국의 순례 승들이 그 여정의 처음이나 마지막에 접하는 것들이 간다라 불상이며, 인도의 전도승 역시 처음 접하는 것이 간다라지역의 불교와 불상이었다. 하여 간다라 미술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지대했기에 이 고장에 처음 불교를 전해준 동진의 마라난타 존자와 연계해서 마라난타 존자의 출생지인 간다라 지방의 탁트히바이 사원의 유구를 본 때 조성한 곳이다.

영광지방 곳곳엔 불교 지명이 유난히 많다. '법성포'라는 지명도 불교와 연관이 있다. 법성포의 백제시대 지명은 '아모포'로서 '마이타불'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한다. 그 후 성인이 성스러운 불법을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으로 ​법성포라 부르게 되었단다.

불갑사, 사천왕상과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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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사천왕상이다. 사천왕은 호세사왕이라고도 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이다. 어떤 절이든 절 입구에서 유난히 우람하고 정감이 가는 모습으로 반기는 사천왕상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꼬마시절부터 그랬다. 무섭고도 신비한 모습에 오금이 저릴 정도로 희한한 호감을 거둘 수 없었다. 화려한 색깔, 위로 치켜 뜬 눈, 손에 들고 있는 신기한 물건들, 불갑사의 사천왕상은 예술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사천왕상이며 진흥왕 1년인 서기 540년부터 35년까지 연기조사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조선 고종 7년인 1780년 때 설두대사가 폐사된 전북 무장 연기사에서 나무배 4척을 동원하여 현재의 장소로 옮겨왔다고 한다.

천장의 탱화가 고색창연한 포스를 내뿜고 있다. 채색공사를 하지 않았어도 정교하고도 화려한 면모가 보는 이로 하여금 꼼꼼히 들여다보게 하는 흡인력을 갖고 있다. 불갑사 대웅전의 제일 특이한 점은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가 대웅전 정면을 보지 않고 측면에 안치돼 있다는 점일 것이다.

볼거리로 만만찮게 갖고 있다. 대웅전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인데 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팔작지붕인데 장식이 특이하다. 지붕 위부분에 작은 석탑과 보리수를 조각한 장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운데 칸 좌우의 기둥 위에는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모서리 공포 부분에도 용머리를 장식하고 있고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몄다. 창살은 연꽃과 국화무늬 장식이다. 대웅전 기와 가운데 18세기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건륭 29년(乾隆二十九年)’이라고 쓴 것이 발견되어 조선 영조 40년(1764)에 고친 것으로 짐작한다. 그 뒤 융희 3년(1909)에 수리하였다.

​불갑사가 아름답고 기억에 남는 절인 이유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상사화에 얽힌 스토리와 꽃무릇 등 우리의 가슴을 아릿하게 적셔주는 전설 때문이기도 하다. 불갑사를 내려오는 길엔 더위를 식히느라 아이 둘을 데리고 냇물에 발을 담그며 도란도란 자연학습을 하고 있는 아빠와 두 아이의 모습이 보여 유난히 더 정겨웠다. -③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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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6 17:59 2016/08/0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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